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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Jan 11. 2024

어쩌다 무개념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 앞에는 야채 가게가 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가볍게 들르기 딱 좋은 위치이다. 행여라도 성격 급한 사람이 버스에서 바삐 뛰어내리기라도 한다면, 의도치 않게 야채가게 안으로 바로 돌진해서 사장님과 머쓱한 인사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이다. 

가게에는 낮은 매대가 쭉 늘어서 있고 그 매대 위에는 싱싱한 과일과 야채가 탐스럽게 진열돼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서너 명의 직원들이 둘러앉아 야채를 소분해서 포장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가게의 분위기가 좋은 만큼 직원들의 수다는 즐겁고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유쾌하신 사장님은 계산능력마저 뛰어나 아무리 많은 물건도 몇 번 중얼거리고 나면 계산기 부럽지 않게 척척 계산해 내고야 만다. 게다가 싸고 싱싱하기까지 하니 안 갈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나보다 나이도 많으신 사장님이 자꾸 이모라고 부르시는 건 아무리 다녀도 적응이 안 된다.

"파가 이천 원 상추가 천오백 원, 딸기가 구천 원, 음 그래서 이모는 만이천오백 원!"


저녁을 먹고 나면 난 남편과 함께 산책 겸 동네 한 바퀴를 돌곤 한다. 그날도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야채가게 앞을 지나는데 매대에 색깔이 너무도 예쁜 딸기가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다.  우리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저녁시간 가게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딸기를 두 팩 집어 들고 북적이는 사람들을 뚫고 사장님한테로 다가갔다.

"계산이요!"

사장님은 손님이 많아서인지 정신없는 얼굴로 내 딸기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딸기 두팩이니까 이모는 만팔천 원!"

난 돈을 건넸고 사장님은 그 돈을 받아 바구니에 넣었다.

"수고하세요!"

난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남편을 찾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곁에 있어야 할 남편이 가게 밖 저 멀리로 도망가 있었다. 나는 장바구니를 어깨에 들쳐메며 남편에게로 다가갔다.

"왜 이렇게 멀리 와있어?"

내가 물었더니 남편이 말했다.

"너 왜 새치기했어?"

"응? 무슨 소리야?"

"네가 간 반대쪽으로 사람들이 길게 서있었는데 그게 계산을 기다리는 줄 같았어!"

"뭐? 진짜야?"

난 고개를 돌려 야채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손에 저마다의 야채를 든 사람들이 사장님 옆으로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있었다.

순간 난 너무나 창피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정말 몰랐다. 그 많던 사람들이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는 것을."

"그럼 말해주지 그랬어!"

내가 남편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미안! 네가 너무 씩씩하게 새치기를 하길래 창피해서 그냥 도망 나왔어."

남편은 다시 생각해도 도망가길 잘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사장님은 왜 새치기를 한 내 물건을 먼저 계산해 준 걸까?

'줄 섰으니 뒤로 가서 줄을 서세요.'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남편도 아무리 내가 창피하더라도 말을 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너무나 민망한 나머지 이 사람 저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많은 줄 선 사람들 중에 내게 뒤로 가라고 말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없었는지, 정말 다시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다.

자고로 세상을 넓게 보라고 했거늘, 숲을 볼 줄 알아야지 눈앞의 나무만 봐서는 안된다고 했거늘..... 

넓게 보았다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을 것을 그러지 못하고 개념 없는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반성한다.


정말 그럴 마음은 없었다. 그런 개념 없는 사람들을 평소에도 무지 싫어한다. 하지만  결국 내가 그런 개념 없는 아줌마가 되고 말았다.

이 글을 빌어 그때 줄 서서 기다리셨던 모든 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몰랐어요. 진짜예요."


그리고 당분간은 그 야채가게는 피해서 다녀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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