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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Feb 02. 2024

아빠의 세 번째 그녀

마지막 그녀

아빠는 올해 여든한 살이다.

그런 아빠의 곁에 딱 아빠만큼 나이가 든 할머니가 있다. 어쩌면 아빠보다 서너 살 어릴 수도 있겠다.

오래전 점쟁이가 말했던 세 번째 여자이자 아빠의 마지막 그녀이다. 난 점쟁이의 말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아빠에게는 맞아떨어졌다.


그분과 같이 살기 시작한 건 아빠가 환갑을 지나셨을 때쯤인 것 같지만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나도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사느라 아빠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저 아빠가 별일 없이 잘 살아주시는 게 감사했다.

'별일 없이 잘 산다'는 게 살다 보니 가장 감사한 일이라는 걸 느낀다. 


아빠는 우리에게 별말씀도 없이 언젠가부터 그분과 함께 살고 계셨고 우리 삼 남매도 그냥 그런가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재산이 많지 않으니 법적으로 이러쿵저러쿵 계산할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분의 성품이 눈에 환히 보여 그저 감사한 마음이 컸다.

그분은 아빠의 세 여자 중 내가 유일하게 엄마라고 부르지 않은 여자이기도 했다. 그건 의도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이제는 타이밍을 놓쳐서 엄마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관계로 굳어져버렸다. 다만 나의 새언니만이 그분께 '어머니'라고 살갑게 부른다. 난 그런 새언니가 또 고맙다.


그분과는 같이 살아본 추억이 없으니 정이 들지 않아 만날 때마다 서먹하고 어색하다. 그분은 조용하고 모든 일에 매우 바지런한 성품이셨다. 조용히 아빠의 곁에서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셨다. 

또 아빠의 두 번째 그녀였던 새엄마와는 달리 아빠를 많이 존중해 주시는 것 같았다. 아빠가 그분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삼 남매는 덕분에 아빠에 대한 걱정을 많이 덜 수 있었다.


난 외로운 아빠의 곁에서 나란히 걸어주는 그분의 존재가 감사했다.

명절 끝에 만나고 헤어질 때면 언제나 손수 만든 음식을 잔뜩 싸서 우리 손에 쥐어주곤 하신다.

그럴 때면 '엄마'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오지만 끝내 난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힘드신데 뭘 이런 걸 준비하셨어요. 감사히 잘 먹을게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분은 씩 웃으시며 내 어깨를 톡톡 치곤 하신다.

친엄마는 일찍 돌아가셔서 그 모습이 생각조차 나지 않지만 만약 살아계셨더라면 지금 이분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난 추석에 우리 가족은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동생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한자리에 만났다.

우리는 다 함께 엄마의 산소를 찾았다. 차에서 내려 좁은 산길을 올라가야 엄마의 산소가 있다. 우리가 그 좁은 산길을 오를 때 아빠의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먼저 올라가신다.  몸은 말랐고 허리는 굽었다. 그 종종걸음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의 뒤를 나의 새언니가 부지런히 따라가서 부축을 한다.

사실 아빠의 그녀는 얼마 전 파킨슨 진단을 받았다. 내 시아버지가 앓다가 돌아가신 그 병을 아빠의 그녀도 똑같이 앓고 계신다. 난 그 사실이 너무 마음 아팠다.


나의 시아버지가 그러했듯 그분도 언젠가 더 이상 걷지 못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고 어쩌면 치매가 와서 아빠를 못 알아보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파킨슨은 치매를 데리고 오는 경우가 흔하고 나의 시아버지 또한 그러셨으니까.


늙은 아빠 곁에 아픈 그녀가 나란히 걷는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사셨으니 아빠의 세 여자들 중 가장 오래 아빠와 함께한 여자이다. 건강하게 마지막까지 사셨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반갑지 않은 병이 그분께 찾아왔다.

아빠와 그분의 걸음이 조금은 고단할 것 같지만 함께이므로 외롭진 않을 것 같다. 다만 두 분이 좀 더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명절에 만나면 두 손 꼭 잡고 다정히 고마웠다고 진심을 담아 아빠의 그녀에게 인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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