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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박'이면 어때, 그게 인생인 걸!

영화 '스윙걸즈'

by Ellie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3~4년쯤 지났을 때였을까. 비슷한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이제는 ‘대리’ 정도의 직급을 달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적응했을 즈음이었다. 나름대로 지난하고 힘들었던 취준생 시절과 사회생활 초년병 시절을 지나 시간적인 여유와 마음의 틈도 조금씩 생기면서 마음을 쓰고 시간을 보낼 새로운 취미생활이자 즐길거리가 필요했다. 친구의 제안이었던가 나의 꾐이었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친구와 함께 우쿨렐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 친구를 친구는 또 다른 친구를 꾀어내면서 규모가 커졌고, 우쿨렐레는 기타로 커졌다. 한 주에 한 번씩 홍대에 있는 한 악기사에 모여 다리를 꼬으고 앉았다. 기타를 등에 짊어지고 홍대로 향하는 마음과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만큼은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 마음만은 영화 ‘비포 선셋’의 셀린(줄리델피) 저리 가라였다. 나만의 제시(에단 호크)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줄 작정이었으니까.

기타로 일동단결 모인 기타팸 친구들과 단체 대화방을 파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어떤 노래를 배울까, 어떤 곡이 멋있더라 등 기타 얘기부터 끝나고 뭐 먹을까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맥락 없는 이야기의 소용돌이.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홍대 악기사에 둘러앉아 기타 줄을 튕겼다. 그땐 일주일에 한 번씩 악기사에 가는 게 일상의 가장 큰 놀이이자 일탈이었다. 신나게 기타 놀이를 즐긴 뒤 늘 들르던 곳은 근처에 있는 한 공연장의 이름을 딴 주막이었다. 사장님도 한 주에 한 번씩 대단한 음악가 마냥 우르르 기타를 들고 오는 애들이 꽤 웃겼을지도 모르겠다. 시크하게 서비스도 내어주시고 가끔은 실없는 농담으로 대화에 참전하기도 했다.

기타에 대한 열정만큼 연습도 했으면 좋으련만 연습은 그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기타 치는 흉내 내는 게 전부였으니 실력이 크게 늘 턱이 있나. 아, 그래도 한 주에 코드 하나씩 배워나갔다. C코드 잡고 G코드도 잡고 Am 코드도 잡고 어느 날은 어렵다는 F코드도 짚어냈다. 잡을 수 있는 코드 수가 늘어나니 도전할 수 있는 노래의 수준도 높아졌다. 오, 이러다 기타의 세계에서 끝판왕으로 불리는 ‘황혼’도 치겠네! 초보라서 용감했다.

어느 봄날이었던가.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마스터한 뒤 음악을 틀어 놓고 ‘징기자카 징기자카’ 하며 기타 줄을 신나게 튕기기 시작했고, 그때의 우리는 신이 나서 그 어떤 기타리스트도 부럽지 않았다.

꽃비 날리던 봄날, 그렇게 우리만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던 그날이 떠오른 건 20여 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스윙걸즈’ 덕분이다.


영화의 주인공 스즈키 토모코와 친구들은 한 여름 보충수업 빠질 궁리만 하던 중 식중독으로 단체 입원한 밴드부를 대신해 밴드부에 가입하게 된다.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땡땡이칠 요량으로, 누군가는 야구부 선배에게 반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남들보다 폐활량이 뛰어났을 뿐, 그냥 어쩌다 친구 따라왔다가 등 대단한 이유도 없고 탁월한 재능도 없다. 색소폰이 뭔지 재즈가 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곳에서 재즈와 스윙을 만나게 된다. 그저 그런 시간 때우기용으로 시작했고 소리하나 제대로 내지 못했지만 폐활량을 늘리고 연습을 하다 보니 웬걸, 악기에서 조금씩 ‘부웅~’라고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거다. 그사이 밴드부 친구들이 복귀해 더 이상 연주할 이유도 없어졌지만 재즈의 맛을 알게 된 이상 멈출 수가 없다. 악기를 사기 위해 집에 있는 게임기를 내다 팔고 알바를 하고 알바를 하다 엉겁결에 멧돼지도 잡아 격려금도 받게 된다.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길거리에 나서기도 하고 조그만 노래방에 옹기종기 모여 연습하다가 시끄럽다고 쫓겨나기도 한다. 집도 학교도 공부도 뭐든 심드렁하다가도 좋아하는 마음이 움트기 시작하니 거칠 게 없어진다.


그런 마음, 무언가를 좋아하기 시작해서 잘 알지도, 잘하지도 못하지만 요란스럽게 우당탕탕 맹렬히 앞으로 향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그런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세상 모든 게 동화된다. 신호등에서 나오는 신호음도, 안내 호루라기를 부는 소리도, 탁구 소리도 온 세상이 재즈로 들리기 시작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재즈란 아저씨들이나 위스키잔 돌리며 똥폼 잡으면서 듣는 음악 아니냐며 놀려대던 이들은 온데간데없다. 재즈에 폭삭 빠졌수다!


영화는 말한다. 정박 아닌 엇박이면 어때. 그게 인생이고 그게 재즈라고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흣따 흣따(‘따’에 강조)’하는 식으로 뒤 박자에 강조가 들어가는 재즈식 박자법에 심취해 ‘색소폰 레슨’을 검색하고 있는 본인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내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채우고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봄에 어울리는 따스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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