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러맨'
내 어릴 적 콤플렉스는 중성적인 이름과 큰 키였다. 가뜩이나 키도 큰데 이름도 중성적이어서 초등학교 입학식 때 출석부에 남학생으로 분류되어있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엔 동명의 남자 어른 배우가 유명했던 터라 더 놀림감이었다. 어린 시절 사진만 봐도 또래친구들보다 머리가 하나씩은 더 커서 나는 늘 뒷자리 차지였다. 공부를 대단히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고 큰 말썽도 부리지 않는 조용한 모범생 정도였다. 큰 키만큼 뭔가 좀 더 성숙하거나 철이 든 아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뒷자리 구석에게 존재감 없이 조용히 앉아있는 키 큰 여자애’ 정도가 당시의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 정도 될지 모르겠다.
키만 컸지 생각이나 행동은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중학생 때였을까. 괜한 반항심에 몇 번의 도둑질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훔친 건 주로 학용품이었다. 볼펜, 지우개, 다이어리에 붙이는 스티커 같은 걸 호주머니에 몰래 집어넣고 아무렇지 않은 척 나오는 식이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나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학용품들이 필요해서였다기 보단 그런 일종의 일탈 행위를 나도 해봤다고 친구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일종의 인정욕구의 하나였고,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관심받고 싶어 행한 너무나 평범해서 존재감 없는 아이의 꽤나 적극적인 어필 행위였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사건으로 비화하지 않았고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나만의 중2병 에피소드로 간직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혐오 혹은 연민, 열등감은 한 개인을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 놓기도 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영화 ‘베러맨’은 영국의 슈퍼스타 로비 윌리엄스의 전기 영화다.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 서길 즐기며 끼가 많고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로비는 어릴 적부터 슈퍼스타를 꿈꿨고 보이밴드 ‘테이크 댓’으로 데뷔해 영국 전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하지만 인기가 커질수록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등 각종 사건사고로 멤버들과 갈등을 빚고 결국 팀을 탈퇴한다. 화려한 솔로 복귀에 성공하지만, 늘 우울증에 시달렸고 내면의 상처와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간다. 자신을 버리고 꿈을 좇아 떠난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존재 ‘노바디(Nobody)’가 될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무대 위에 설 때마다 환영에 시달렸고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술과 마약에 찌든 슈퍼스타의 뻔해 보이는 배부른 투정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내면의 깊은 상처와 끊임없이 대면한 뒤 자기혐오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꽤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영화 제목인 ‘베러맨’처럼 자기혐오와 연민, 열등감과 결별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못난 모습을 기꺼이 보듬어주면서 조금씩 ‘나를 넘어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