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묘연해진 찻잔들의 행방에 대하여
뭣도 모른 채로 결혼해서 일만 죽어라 하던 첫 5년은 살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남편도 나도 새벽같이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와서 겨우 씻고 잠들기 바빴고, 주말에도 밀린 일을 처리하고 교회에 다녀오면 또다시 월요일이 되곤 했으니까. 이따금씩 찌개도 끓여 먹고 밑반찬도 만들어두긴 했으나 애들 소꿉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주방 용품에도 관심이 별로 없던 때라 그저 엄마가 사주신 그대로 군말 없이 쓰곤 했다. 그 당시 주방과 나는 한 집에 살면서도 낯을 가리던 관계였던 것 같다.
후반 5년은 이 매거진에 줄곧 써왔듯이 연달아 두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무진장 바빴다. 친정에서 공수해 온 먹거리를 가지고 최대한 버티거나 종종 가공식품에 의존했다. 물론 나도 요리를 하긴 했으나 왠지 주방의 주인은 친정 엄마요, 나는 다 된 음식을 데우기나 하는 말단 조수 같았다. 그래서 내가 부엌의 주인이라는 느낌은 딱히 들지 않았다.
그런 나도 한때 식기류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많아졌지만 아직 돌볼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던, 아주 짧디 짧은 내 인생의 황금기에 그랬다. 그땐 에프터눈 티 세트를 사서 친구들을 불러 우아하게(?) 티 타임을 갖기도 했다. 혼자 커피를 내려 먹을 때에도 꼭 예쁜 찻잔에 담아 먹곤 했다. 그 당시에 친한 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어김없이 우아한 찻잔 세트를 꺼내어 (물론 밖에서 사 온) 예쁜 디저트와 함께 차를 대접했다. 그런데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 오래 던 그 언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시 나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너 이제 이거 이거 싹~~~ 다 치워야 된다.
낳아 봐라. 이제 여기 싹~ 다 치우게 된다.
언니 돗자리 펴셔도 되겠어요. 그로부터 1년 뒤, 거실 한편에서 고운 자태를 뽐내던 찻잔들은 쪽방으로 밀려나 뒷방 짐덩이 신세가 되었다. 몇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 아리따운 찻잔들은 쪽방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찻잔? 하. 찻자아안? 하하. 우리 집 장난꾸러기들 앞에서 뜨거운 음료 느긋하게 홀짝이는 사치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그러다 엎지르면 대형사고요, 용케 다 마신다 해도 그 소란통에 고상한 취미를 소모하고 싶지가 않다. "엄마 이거 뭐예요? (매달리며) 엄마 나도 마실래요. (기어오르며) 엄마 이거 커피예요? 엄마 00가 내 장난감 뺏었어요.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아우 생각만으로도 귀가 따갑다. 안 먹고 말지.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서 티타임을 즐기면 된다고? 혼자 집에서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 같은 외향인들은 좀이 쑤셔서 못 산다. 거기다가 차려 먹고 치우는 것도 다 내 몫, 그냥 안 먹고 안 치우는 게 더 편하다. 이래서 엄마들이 점점 양푼이에 이것저것 담아 먹게 되나 보다. 설거지 거리 줄이려고.
그런데 결혼 생활 10년 차가 된 올해, 나와 주방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느새 아이들이 자라서 비교적 어른 사람과 같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고, 친정 엄마는 그동안의 음식 조달로 인해 부쩍 쇠약해지셨으며, 그러던 와중에 친정은커녕 전기밥솥도 없는 캐나다에서 몇 개월 살았던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제는 주방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는 때가 온 것이다.
이게 잘 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구 반대편에서 애들 삼시 세끼 챙겨 먹이는 주방 전지훈련을 다녀온 후로 나는 부쩍 이 곳이 편해졌다. 이게 바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얘도 날 편안해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이제 얘가 낯설지 않다. 이렇게 서먹하던 주방에 주인의식 비슷한 게 생기면서 가족들의 식사를 챙기는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겨우 장을 보고 있던 음식이나 겨우 데워 먹이는 느낌이었는데, 요즘엔 주도적으로 식단을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장을 봐서 요리를 한다. 이것저것 해 먹는 게 퍽이나 재미있고 보람 있다. 내친김에 관리가 어렵기로 소문난 무쇠냄비도 큰맘 먹고 하나 샀다. 냄비가 카리브해를 닮은 영롱한 푸른색이라 볼 때마다 칸쿤에서 요리하는 기분이다. 노동자의 정신승리.
맛은... 일단 내 입엔 맛있다. 남편은 맛있어야만 하는 입장이다. 애들도 반찬투정 했다가는 식판을 모조리 압수당할 처지라 군말이 없어야만 한다. 다소간의 강압적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세월의 짬이 많은 것을 해결해 주리라 믿고 견뎌라 가족들아. 너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너희를 강하게 할 것이니... 아무쪼록 부디 주방과의 우정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