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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포유류

2025. 3. 11.

by 한상훈

인간은 포유류라 포유류의 한계에 머무는 게 참으로 많다. 본능적으로 도전을 두려워한다. 변화를 두려워한다. 계층 이동에서 불안을 느낀다. 당연하다. 원시 부족 사회를 생각해 보자. 한 청년이 어느 날 목숨을 걸고 홀로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면 어떨까. 주변 사람들이 응원해 주고 기뻐할까. 모두들 걱정하면서 동시에 견제한다. 그와 비슷한 나이 때의 부족 남성들에게는 위협이 된다. 만약 그가 호랑이를 잡아온다면 부족 내에서 그의 위상은 올라간다. 그의 위상이 올라가면 내가 원하는 여자를 얻을 확률도 부족 내에서 내 입지도 낮아질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도전을 개인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그게 설령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온라인 속 대상일지라도.


그 정도로 인간은 본능적이고 멍청하기에 도전자들과 한 배를 타고 호랑이를 잡으러 가는 것보다는 집구석에 처박혀서 온라인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을 스토킹 하는 것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도전자들은 구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도전에서 승리하면 할수록 기존 무리에서는 배척당하기 쉽다. 그 무리에서 자신의 위치가 올라갈수록 나머지 구성원은 불편함을 느낀다. 도전자의 도전이 실패해도 문제다. 실패자를 품는 건 힘든 일이다.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 팔이나 다리를 잃어서 온다면 그의 가족은 그를 보살피는데 에너지를 써야 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전을 최소화하거나 보편적 도전 정도를 하는 선에 멈춘다. 남들이 다 하는 수준의 도전으로만 살고 남들 이상의 도전을 하는 사람들을 따라 하진 못한다. 동물의 본성으로 남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타인의 우열에 민감할까. 이유야 많겠지만 제로썸을 두고 경쟁한다 착각하기 때문이다. 작은 부족에서는 자원이 풍부하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누군가가 매력을 얻고 인기를 끈다면 내 입지는 줄어들고 내 번식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도전자를 아니꼽게 보는 인식이 있으나 결국 부족을 이끌어가는 족장은 도전자다. 목숨 걸고 부족 간의 전쟁에서 부족을 지켜내거나 위협이 되는 짐승을 잡거나. 결국 부족 전체가 승리하기 위해선 도전자를 귀하게 대접해야 하고 그 도전자가 리더가 된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모든 이야기는 도전자들의 이야기로 쓰였다. 집구석에서 처박혀서 똑같은 짓만 하다 뒤진 놈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경우는 없다.


이 단순 명료한 사실을 바탕으로 겁쟁이들과 열등감에 가득 찬 인간상의 기원을 알 수 있지만 여기서부터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인간 대부분은 겁쟁이에 도전하지 못하는 포유류의 본성을 따른다. 문제 인식을 하고 투쟁을 하느니 괜한 짓이라며 이불속에 숨어 있는 게 생명 유지에 도움이 된다. 단 한 번도 목숨 걸고 싸워본 적 없는 겁쟁이 새끼들이 가장 당당하게 겁쟁이로 살아갈 수 있다. 병신 같은 세상이다.


대다수가 쫄보에 아무것도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비리가 있으면 밝혔을 때 받을 피해가 두려워 전전긍긍하곤 한다. 두려움이 크면 더 크게 터뜨리면 되고 더 많은 다수의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그러다 그럴 배짱이 없다. 대다수의 인간은 뇌의 구조가 “아무것도 안 하기”라는 답을 만들기 위해 논리 구조를 짜도록 작동되어 있다. 그 명료한 사실과 명료한 본능을 이용한다. 생존에 도움이 되는 “돈”을 주거나 먹고 마시고 유흥하는 쾌락으로 가지고 놀면 대부분은 꼭두각시처럼 손발에 실을 묶고 춤을 춘다. 남자를 병신 만드는 건 그렇게나 쉽다. 돈과 여자로 통제하고 원하는 걸 뽑아내고.


조직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이 본능 이상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뇌가 좆끝에 달린 놈도 탈락이고 가장 큰 위협을 감당하는 인물을 질투하고 경계하는 머저리 새끼들도 탈락이다. 자신의 삶과 아무 연관성도 없는 타인을 질투하고 시간 낭비하는 등신 새끼들도 탈락이다. 극단적으로 뛰어나야 하고 동시에 아무에게도 알려질 필요도 없는 인물. 그렇기에 세상을 구하는 건 얼굴에서 꽃향이 나는 기생오라비들도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족에 위협이 되는 호랑이를 잡고 있는 도전자들이다.


안전지대에서 사는 사람은 호랑이를 모른다. 호랑이를 못 봤으니까. 그러니 호랑이를 잡으러 가야 한다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쓸모없는 짓을 한다고 한다. 병신들. 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목숨을 빚졌다. 생명의 은인도 모르며 살아가는 병신들이지만 어찌하겠는가. 아버지의 고생을 자식이 알리가 없고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선 누군가 손을 더럽혀야 하는 걸. 단 한 번도 바닥까지 가본 적도 없는 인간과 위협을 느껴본 적 없는 온전한 평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무지의 행복이며 지식의 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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