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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시작일까

2025. 3. 13.

by 한상훈

일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서 오늘은 몇 가지 테스트를 해보고 편의성 기능을 개발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끌어올릴 수 있는 부분은 이제 많이는 없는 것 같다. 좀 더 깨끗하고 순수한 형태로 파이프라인을 구성하는 정도 남았다고 할까. 이젠 내가 아니라 우리 팀원들이 잘해주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요즘은 강해진 기분과 약해진 기분이 동시에 느껴진다. 강해진 기분의 출처는 그 어떤 개발도 딱히 두려움이 생기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약해진 기분은 아무리 일을 해도 보상받지 못한 게 오래되다 보니 약해진 기분이 든다. 리스크 있는 일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다. 대부분의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실력이 없다. 그게 사업하면서 배운 세상의 진면목이다.


꾸준함도 없고 실력도 없고. 병신 같은 인간들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처럼 보일만큼 답답한 마음이 들곤 한다. 싱가포르 사업도 그랬다. 싱가포르의 파트너는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했다. 모든 미팅을 녹화 녹음해서 문서로 남겨 모조리 소송을 해야만 하는 건가 싶을 만큼 지리멸렬한 인간들이 차고 찼다.


날 것의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게 편하다. 순수하게 천부적으로 뛰어나고 스파크가 튀듯 일을 하는 이들의 일은 즐겁고 자극적이다. 일 자체가 자극이 된다. 물 먹은 나무처럼 어떤 짓을 해도 불이 붙을 생각이 없는 흐리멍덩한 놈들하고 일을 할 때 겪는 답답함이 이들과 일할 때는 없다. 천재성은 폭발력을 가져서 어떤 방향으로든 폭발적 결과로 향한다.


그러나 지난 경험을 돌이켜봤을 때, 사람들을 그다지 믿기보다는 시스템을 믿는 편에 집중하고 싶다. 천재적인 파트너들과 일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기대보다 못해줄 수도 있고, 내가 예상 못한 내 실수가 있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다른 이들의 일을 조금만 지켜볼 생각이다. 이들은 과연 기대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니면 지난 수년동안 만난 수많은 패배자들처럼 스스로도 구원 못하는 멍청한 놈들일까.


문득 드는 생각은 큰 갈림길에 놓인 기분이 든다. 내 주변에 CTO로 일하는 분들은 2~3억 정도를 받으며 근무하는 게 보편적이다. 나도 다 때려치우고 CTO로 일을 하는 게 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 적어도 도전 때문에 겪을 괴로움은 좀 덜할 것이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시작일지 마지막일지. 사업으로 10년. 2015년부터 시작한 사업이 올해로 10년을 꽉 채우고 있다. 딱 이맘때였을 것이다. 대학원을 포기하고 개발한 번 해보자고 다짐했던 게.


그렇게 딱 10년의 시간 동안 기대보다 얻은 것도 있고 기대보다 잃은 것도 많다. 아마도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이제 내 손을 떠난 건 아닐까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 더 조금 더 완성도를 높여두는 것 정도? 아니면 이번 기회를 통해 더 이상 사업이 아닌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할지도.


시작인지 10년 여정의 끝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몇 년간 참 쉽지 않았는데 헌신의 보답을 얻고 싶다. 그 정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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