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여정

분산과 파괴

2025. 3. 10.

by 한상훈
Divide et Impera


오늘은 중요한 회의를 마쳤다. 주말 내내 분석한 데이터 세트는 수천 개의 조합을 바탕으로 얻어낸 최적의 숫자들이었다. 2.95-0.95와 같은 숫자들. 마법 같은 숫자를 얻어내기 위한 비밀의 열쇠. 조합식을 만들어내면서 나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일을 걷어내고 잊으려 했다. 머리로 온전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마주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집을 청소했다.


가끔 이렇게 집을 청소하다 보면 꽤 더럽게 지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더러움도 익숙함에 속한다. 정리안 된 상태가 오래되면 정리가 된 상태를 잊고 지내게 된다. 결국 정리 안된 상태 속에서 디버프에 걸린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더럽고 습한 환경은 곰팡이가 살기 쉽고 곰팡이는 호흡기에 영향을 주고. 뻔한 이야기지만 삶에서 익숙해진다는 건 꼭 좋은 건 아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 양가적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두 가지 가장 극렬한 상황으로 분리되어 있다. 끔찍하면서 환상적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보다 적합하게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양가적 상황. 선과 악. 생명과 파괴. 참으로 기괴한 현실이었다.


꿈에서 신을 만났다. 신은 손으로 흙을 빚어 약을 만들었다. 흙으로 만든 약은 나뭇잎 위에 올려두었고, 그것을 나에게 먹으라 했다. 모습은 거북했지만 나는 그것을 먹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 모양이 소똥과 같다고 하여 먹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저 먹었다. 그리고 꿈속의 세계에서는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종종 나는 모든 것들을 시계열 데이터로 나열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흔히들 정해진 규칙대로만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아마도 이 글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이 글을 맨 위의 문단부터 순서대로 읽으면서 앞부분을 당연히 앞의 내용으로 뒷부분은 당연히 뒤의 내용이라 여길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해서 그렇게 안 할 수 있다는 경우의 수도 고려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글의 아나그램이다. 내 글은 글 자체도 문단도 아나그램으로 순서가 시간 순도 아니며 논리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섞인 시계열 데이터는 곧 이 글들과 사건들이고 섞인 시계열과 진실과 거짓을 섞어야 하는 것은 온전한 진실에는 증명의 문제가 섞이기 때문이다. 주장하는 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요즘은 많이 사라진 것 같지만 증명하기 힘든 사건들에 대해서는 증명보다는 사건의 나열이 더욱 중요하다. 완벽한 시계열 기록들은 그 모든 기록과 흔적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사건의 큰 흐름을 판단하는데 문제가 없다.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강줄기를 역행하고 있다면 연어가 포착된 위치와 시간을 통해 속도와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지금 어디에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은 할 수 없고, 증거도 없지만 추정할 수 있다.


추정의 힘은 강력하지만 그 추정을 방해하기 위해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은 분산시키고 개별적으로 정복하는 분할 정복 알고리즘이 들어간다. 프로그래밍을 비롯한 이산수학에서 사용되는 전략이지만 실제에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 분열시키고 각 분열된 작은 그룹을 정복한다. 그 방식이면 한 입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도 잘게 잘라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맛있게 잘린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그냥 음식을 삼키지 않는다. 스테이크를 칼로 자르고 나서도 이로 씹고, 침과 위에 섞인 소화효소가 영양소를 하나하나 모조리 녹여낸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행방을 담당하는 것은 거대한 시스템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개인의 손에 있다. 상대해야 하는 적을 거대한 집단이 아닌 개별 개인과 그들과 엮인 이해관계로 세분화해서 바라보면 문제는 180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는 국익을 위한 것도 아니게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작 자신의 통장에 얼마를 더 넣어보겠다는 얄궂은 생각으로만 가득 찬 인간들이란 걸 알 수 있다.


각개격파가 그 방식이다. 거대한 적을 상대하는 것 같지만 대가리만 죽이면 끝난다. 머리가 잘린 뱀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댈 수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신경 반사로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 생명은 끝난 상태다. 이처럼 거대한 조직도 대가리가 잘려나가거나 아주 작은 신체 부위에 해당하는 곳이 공격당하는 순간 그로기 상태로 빠지게 된다.


우리가 UFC 선수와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맨 손으로 아무런 무기도 없이는 힘들다.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전쟁이라고 가정한다면 눈을 멀게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눈이 먼 상대는 아무리 강한 주먹이 있어도 24시간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휘두를 수는 없다. 강대한 인물도 신체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곳이 무력화되면 전체가 무력해진다.


시스템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전체 시스템을 모조리 셧다운 시킬 것이란 생각은 멍청한 생각이다. 아주 일부분. 아주 작은 부분만 공격하면 끝난다. 거대한 컴퓨터가 웅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해도 고작 콘텐츠 전원이 꺼저버린다면 작동될 수 없는 것처럼. 핀셋처럼 작은 곳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아니 모두의 전략이다. 핀 포인트로 적중하는 공격을 이용해야만 비대칭적 전력을 역전시킬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강대강으로 붙을 생각만 하는 멍청한 놈들이 산더미처럼 많다. 진짜 전쟁은 적들이 인지하지도 못한 채 수뇌부를 점령해 사실상 속국으로 만드는 것이 됐다. 현대전은 눈에 보이는 포탄과 총은 젊은이들의 피만 뿌리는 쇼에 가깝다. 전쟁이 끝나면 부자들이 넘쳐나고 해외로 이동하는 수많은 현금들은 무엇인가. 전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출처 없이, 이름 없이 움직이는 자금들과 그 과정에서 몫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천지 사방에 있다. 가장 나약한 자를 죽이고, 가장 악랄한 자의 배를 불려준다. 그렇기에 전쟁은 자신에게 놓인 상황을 극명하게 증명한다. 내가 이 세상이라는 도박반에 호구인지 타짜인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P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