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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여정

연애

2025. 3. 28.

by 한상훈

나는 통계적으로 꽤 솔직한 편이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이 꽤 있다. 특히 첫 번째 연애가 그랬다. 여자친구 눈에는 내가 이미 여러 번 연애를 해본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사실은 나도 처음이었는데 처음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에둘러 빙 돌아갔었다. 지나고 보면 꽤 현명한 답변이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꼭 그럴 필요도 없었겠다 싶기도 하다.


가장 설렘이 적었지만 가장 기뻤던 이상한 연애도 있었다. 내가 외모적으로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기에 여성에게 대시를 받는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하루는 이태원에서 래퍼 두 명과 술을 마시고 있던 날이었다. 사실 나는 그들을 처음 봤을 때 래퍼인 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딩고에도 나오고 나름 팬 층도 있는 래퍼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쉽지 않은 길이겠다 싶었다. 적당한 팬층도 있고, 딩고에 나올 만큼 유명한 곡 한 두 개와 자신들만의 특색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대박을 치지는 못했기에 언더에 남아 있는 상태.


함께 시간을 보내진 않았지만 멋진 공연을 하신 우원재님

날씨 좋은 날에 술을 마시면서 이태원 하늘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 술보다도 물담배가 신기했다. 물담배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어쩌다 보니 해보게 됐고 상당히 중독성이 있었다. 담배도 태우지 않고 물담배할 일도 없지만 꽤 즐거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날 밤 먼저 연락을 했었다. 보고 싶다는 연락에 래퍼와의 인연은 뒤로 하고 강남으로 돌아갔다.


강남으로 돌아와 한 포차에 갔다. 그녀는 파전이 먹고 싶다고 했다. 해물파전. 꽤 인기가 있는 집이었던 것 같다. 늦은 시간에도 자리가 꽉 차있었다. 그렇게 파전도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


적극적으로 다가와준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기에 그녀와의 기억은 꽤 즐거운 순간이 많은 것 같다. 한 번은 여행을 갔을 때 이름이 비슷한 다른 곳으로 도착하게 됐다. 그녀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여행을 가는 데까지 운전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기에 딱히 정확한 위치로 가기보다는 이름이 비슷한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도 내가 살아온 이야기도 꽤 많이 했다.


첫 연애를 하기 전에는 연애에 대해 환상이 많았는데, 살면 살 수록 별 건가 싶다. 그저 마음 맞는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게 연애가 아니고 뭘까. 서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속 상처도 치유받고. 서로에게 사랑도 받고.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가장 소중한 시간이 연애 인 것 같다.


늦은 밤 와인바

그런 몇몇의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제는 연애에 대해서 큰 환상도 없이 그저 좋은 사람에게 이끌리는 것 같다. 닮고 싶은 매력이 있는 사람. 함께 있을 때 즐거운 사람. 그거면 족한 것 같다.


며칠 전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완전히 잊었던 옛 연인의 자는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누군가를 기억할 때 사진의 모습 정도로만 기억하곤 하는데, 눈을 꼭 감고 자던 모습이 기억이 났다. 지금이야 아무런 감정도 없지만 자신의 가장 연약한 순간인 잠자는 순간을 공유하는 것은 특별한 것 같았다. 좋은 기억을 주었던 그녀가 떠올랐었다.


그러고 보니 옛 여자친구 중 한 명은 내가 자는 모습을 한참 동안 봤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항상 나는 먼저 잠들었는데, 그러면 그녀는 한참이나 내가 자는 모습을 보다가 자곤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감정으로 보고 있었을지 알 것 같다. 아마도 똑같았겠지. 걱정 없이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내 모습이나 그녀의 모습이나.


사랑은 그래서 좋은 것 같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들 말하는데, 실제 사랑은 그래야만 한다. 감출 수 없는 벗은 몸. 감추기 힘든 생활 습관들까지도. 입냄새가 많이 날 수도 있고, 생각보다 더러울 수도 있고. 생각보다 게으를 수도 있고. 결국 날 것의 나를 보이면서 서로의 사랑이 완성된다. 그럼에도 함께 살아간다면 그거야 말로 진짜 사랑이겠지.


그때는 몰랐는데 한걸음 물러나서 보니 꽤 달달한 날들이었던 것 같다. 우스운 일이 아닐까. 돌아보면 고생하고 무너져 내리면서 살아온 것 같은데 언제도 그렇게 바삐 연애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온 건지. 사업에 눈이 돌아가 해내고야 말리라 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는 다 멀리 보이던 것이 한 걸음 뒤에서 산책하는 마음으로 보니 꽤 괜찮았었구나 싶었다. 나 역시 똑같이 편향되어 있었다. 힘들 때는 내가 힘들었던 순간들만 필터링되어 보였으나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어쩌면 지금도 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나 역시 배부른 사람이었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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