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8.
해결사는 존재한다.
뭘 해결해 주냐고? 사실상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가장 근본을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닌가. 대신 원인을 해결해 준다는 것은 그만큼 비싼 비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해결은 근원을 해결해야 가장 깔끔한 법이다. 더 이상의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원천을 차단할 수 있다면 그보다 확실한 서비스가 무엇이 있을까.
정보상들의 거래는 언제나 거대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평범한 소시민의 정보는 가격이 낮기 때문이다. 평범한 직장인 A 씨의 은밀한 취미를 알고 있다고 한들 그것을 비싼 값에 주고 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반면 전 국민이 아는 사람의 일탈은 다르다. 고작 연예인이 조금 잘못했다고 하면 모든 언론사에서 신줏단지 모시듯 바이럴 마케팅을 해주니 스피커 성능이 확실하다. 큰 소리가 뻥뻥 터져나가고, 지우고 싶은 소리는 확실히 지우고. 결국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라는 말은 고도로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인들에게는 알 수도 없거니와 도대체 그곳이 어떤 생태계인지도 누가 구매자이고, 누가 판매자인지도 알지 못하는 실체 없는 도시 전설급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필요는 어떤 형태로든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다. 원래는 안 되는 서비스도 웃돈을 부르는 고객을 마다하는 일이 있겠는가. 웃돈을 얼마가 됐던 준다면 그 어떤 서비스도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가 한 번은 크게 웃은 적이 있다. 바로 '배고프고 성실한 친구들'이란 표현이다. 참 세상엔 배고프고 성실한 친구들이 많다. 돈 500만 원에 인생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건실한 이들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겠지만 당장 서울에 살고 있는 하위 1%만 해도 10만 명이다. 소득 하위 0.1%만 해도 1만 명에 가깝다. 그러면 1만 명 중에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0.01%만 해도 1000명인데, 1000명이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아주 작지만 시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장이 존재한다면 거래가 이뤄지고 구매자와 판매자가 계속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모든 산업에는 중개인이 있다. 중간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유통 분야에서도 중간 유통을 하는 사람이 있듯 모든 시장에는 편의를 위해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를 이어주는 수많은 유통 체인이 존재하고, 그 과정에서 위험성을 낮춘다. 서로에게 제한된 정보만 거래를 하며, 제한된 서비스만을 제공하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한 시장은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며, 그것을 감추도록 돕는 세력도, 그것을 들추려는 세력도 존재한다. 그러나 워낙 작기에 크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조용 조용히. 내가 그들을 싹쓸이할 마음을 품고 있는 검사가 아니라면,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아니라면 싹쓸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상한 서비스가 우리 사회의 심연에 제공된다. 거래는 중개인들을 통해 전달되고, 중개인은 또 다른 중개인을 통해 전달하여 그 어떤 소비자도 공급자를 알기 어렵게 한다. 그것을 역으로 추적하려는 정의의 심판관의 눈으로 보기에도 뿌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결국 한 명 한 명 위로 올라가는 방법 또는 판의 주인에 해당하는 키맨을 찾아야 한다.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을 찾으면 체크메이트. 맵핵을 켜고 게임을 하듯 모든 상황을 보게 된다.
너무도 소프트한 세상에서 사는 친구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평생 알 필요도 없거니와 그저 영화에서나 가끔 소재로 사용되는 진부한 이야기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게 웬걸. 필요에 따라서는 누구든, 연루가 되어있다면 아주 깊게라도, 모조리 찾아내 모조리 밝혀낸다. 내가 털렸음에도 털린 사실을 인지할 수도 없다. 도둑질한 사람은 있는데 도둑 당한 줄도 모르는 것이다. 참으로 신묘한 일 아니겠는가. 도둑을 예술의 경지로 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경지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털린 사람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도둑질. 그것이 종종 생기는 이 세계에서 피해자들은 본인이 피해자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
기가 막힌 현실. 황당한 일들의 연속이 인생이라지만 나는 종종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과거 나의 지인들의 세계와 너무도 달라지는 이질감에 싱크를 맞추는 노력을 하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게 세계의 진실이었고, 그저 한쪽 면만을 바라봐왔던 것이긴 하지만.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만진 부분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니 누가 이 세계 전체를 조망하겠는가. 그저 코앞의 코끼리 다리 정도 만지면서 이게 코끼리구나 하는 것이지.
많이 아는 것은 더 많은 소음을 듣는 것과 유사하다. 그전까지는 인지하지 못하던 도시의 소음과 범죄들이 가깝게 느껴지고, 그전엔 인지하지 못했던 위협이 더 가깝게 보이기 시작한다. 알면 알수록 더 강해지는 것 외에는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강해지는 것뿐이다. 국가가 나를 지켜줄 일도 없고, 나의 가족이 나를 지켜줄 수도 없다. 오히려 약점이 된다면 약점이 되겠지.
비극으로 매듭짓는 인생들도 종종 있다. 결국 원인은 언제나 같다. 비극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 되는 순간 비극은 찾아오는 법이다. 누구에게? 주체는 다르겠지만 대상이 나를 노리는 자들일수도 있고, 스스로가 될 수도 있다. 칼을 쥔다는 것은 칼을 쥔 사람들의 경계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무장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을 적으로 두고 살아가는 이는 없다. 칼을 쥔 이들은 칼을 쥔 이들을 알아보고, 서로의 칼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지 경계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칼을 쥔 이들은 서로의 칼이 상대를 향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규칙이다. 그 규칙을 어기는 이가 있다면 그 끝은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규칙은 모두를 위한 것이고, 불문율은 불문율을 깰 때 무서움을 알게 된다.
여전히 나는 평범함 속에서 살아가지만 철장 속에 갇힌 개처럼 나를 가둔 이들을 주시한다. 날 수 있는 새를 가둬두었다면 아무리 좋은 새장에 가두었다고 한들 새가 가둔 이를 고마워할까. 자유라는 날개를 베어간 이들에게 남은 것은 자유를 되찾는 일뿐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을까. 분노한 개는 두려움 속에서도 개장수를 물 수 있다. 하늘을 꿈꾸는 새는 새장이 단 한 번이라도 열리는 순간, 온 힘을 다해 새장 밖으로 달아난다. 어떤 이가 무언가를 미친 듯이, 끊임없이 하고 있다면, 그 안에는 거대한 괴로움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그 거대한 괴로움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 일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비극인가 희극인가. 무지의 축복인가 지식의 저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