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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아이 환 Nov 09. 2021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면서 생각나는 책

올가 토카르추크 <태고의 시간들>에 관한 기록

  @오랫동안 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읽기 기록 하나를 발행해 봅니다. #올가토카르추크


지난주에 가구를 보러 광명 이케아에 갔다가, 커피  봉지를  왔다. (가구는  샀다. ^^;;) 저녁 식사를 위해 푸드 코트엘 갔는데, 패밀리 카드를 제시하면 받을  있는 무료 리필 커피  잔이 너무 맛있었다. 푸드 코트에서 나오는 길에 보니, 바로  커피콩을 진열해  바구니가 있었다.  무료 리필 커피가 시식이었구나. 너무 괜찮은, 자신감 넘치는 마케팅이라 생각했다.


  오늘 아침, 그 커피를 그라인더에 가는데, 지난겨울 읽었던,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난생처음 읽은 '그라인더'라는 물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나무와 도자기, 놋쇠가 하나의 물체로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나무와 도자기, 놋쇠는 '갈아낸다'는 관념을 물질로 형상화한 것이다. 커피콩을 갈고 나면, 거기에 끓는 물을 붓게 된다. 그라인더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창조란 단지 시간을 뛰어넘어 영구히 존재하는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무(無)로부터 무엇인가를 창조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태고의 시간들> p52.)  


  마침 고객들이 선택한 주제로 즉흥시를 창작하는 포엠 스토어 프로젝트로 화제가 되었다는 시인 '재클린 서스킨'의 책(<시처럼 쓰는 법>)을 읽는 중이어서였는지, 사물에 관해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재클린 서스킨은 아주 흔한 대상을 골라 의미를 부여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시처럼 쓰는 데 가까이 갈 수 있는 한 방법이라 말한다. 그 방법에 대해 읽으며, 대학 때 필수 교양으로 들었던 국어 작문 수업이 떠올랐다.

  그 수업의 기말 시험 문항 중엔 (정확히 그 문항이 정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대략) '치약을 닮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를 밝혀 쓰라.'는 항목이 있었고, 이런 글을 쓰라는 요구를 처음 받아 본 난 당황하여 시험을 그르치고 강의실을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라.

  '그라인더'에 관한 의미를 부여한 문장으로, '마시아의 그라인더의 시간'은 내가 아는 한 최고의 글일 것 같다. 나도 이 작가처럼 사물이 지닌 의미와 신성을 찾아낼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을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 그런 기대를 하며 방금 간 이케아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그녀의 소설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보다는 더 치열한 시간을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태고의 시간들> p53.)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라인더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한다. 폭격당한 기차의 풍경, 고여 있는 핏물, 매년 다른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버려진 폐가가 그라인더 속에 저장된다. 그라인더는 차갑게 식어버린 인체의 따뜻함과 익숙한 것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절망을 자신 안으로 빨아들인다. 사람들이 그라인더에 손을 갖다 댈 때마다 각자의 손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여느 사물들처럼 그라인더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이 모든 걸 흡수한다. 일시적인 것들,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 두는 것이다. (<태고의 시간들> p.53.)


만리타국에서 우리집을 찾아온 커피콩을 갈면서 나 또한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풍경, 지금은 소원해졌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가 가족을 잃고 슬퍼하고 있다는 소식, 나의 일, 꿈, 건강 따위, 결국은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세상의 진실. 그것들을 갈아내고 해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 잔의 커피로 담아내는 길을 열어주는 신성을 지닌 사물. 그라인더는 내게도 그런 사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태고의 시간들> p54.)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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