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훼방을 가로챈 소극적 훼방의 은밀한 그림자
문득문득 불편하다.
기대가 높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공간으로 움직일때나 잘 알지못하는 사람들을 대할때
그가 또는 내가 '왜 그렇게 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그저 타인을 배려하는데 '민감함'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저 내버려 둘 것인가에 대하여는 또 고민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무례함'으로 인하여 치르는 비용이 얼마일까
지인들에게는 결국 털어놓게 되는
소심하고 들키지 않을만한 사회적 복수는 또 얼마나 자주 이뤄지고 있을까
이것이 인간 의지의 반영이라면 살아있다는 사회적 역동의 단면일테지만
조금 더 건강하고, 서로에게 품격있는 모습일 수는 없을까
조금 더 서로에게 허용되는 임의적인 몸짓을 알아채려고 노력할 수는 없을까
정답이 없어야 정답일 것 같은 상황이겠지만
그 모호함의 경계를 서로의 감수성으로 응답하는 사회적 몸짓을
서로 조금 더 더해보는 노력이 캠페인되었으면 하는 바람
너무 꼰대같은 생각일까
신뢰사회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잘못한 일에 대하여 고자질하는 뉴스가 범람하지만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이 부족한 사회,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눈치를 보고, 용기를 내야 하는 사회
"너나 잘하세요"라는 관용없음으로
어떻게 이 어린 사회를 성숙시켜 나갈 수 있을까
문유석 판사의 책, '개인주의자 선언'에 대중이 열광했던 이유도 그래서이지 않을까
그 안타까움에 대한 공감이 있으면서도
변화는 요원하다 생각하고
우리는 계속 거기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나는 그 행동을 '교양'이라 부르고 싶다.
다만 그 '실행'의 첫단이 '내가 먼저'인 교양의 발휘
늘 그가 먼저 실행하지 않은데서 오는 실망과 절망에서
우리의 '기대'가 좌절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관용'과 '포용'이라는 '교양'을 발휘할 순간은
바로 그 '기대의 좌절'의 순간이지 않을까
오늘 약간의 불편을 느꼈다면,
그 순간 행동을 해봄직하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약간의 '교양'을 생각해 보며
나는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보는 개인주의자가 되어 보련다.
(이 교양 내가 제일 불편하다.
교양의 저편 무례함을 반성하며
실내에서도 살포시 걸으며 자기를 주의하는 고양이들만도 못한 나의 교양을 돌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