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인생을 연기(play)하고 있다. 연기에서 무엇을 얻을까
저명한 교수가 이끄는 고전 세미나에 참석했다. 아직 시작 전이라 분위기를 고취하는 대화가 오가며 인사를 나눈다. 그분이 쓰신 글이나 의도에 대하여 묻고 답하기도 하는 중에 그의 종잡을 수 없는 사회개혁적인 제안도 던져진다. 나는 순간 생각한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결국 저명한 저 지식인의 생각도 전근대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그 수준이란 말인가', '사유가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아 답답한 현실이다', '세미나에 대하여 담담해 지는군'이라는 등 스스로 오만함 속에서 많은 의문을 던지고 판단을 내렸다.
잠시 후 그에 대한 주최측의 짧은 소개를 이어받아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에게서 어떤 변화(mode change)가 일어났다. 조금 전 '내리 꽂는 눈과 쳐든 턱을 높이며 봉건적 안드로메다를 달렸던 그'는 온데간데 없고 학자로서 지적세계의 방대함 속에 작은 탐구를 하는데 대한 겸손함과 자신의 연구를 통하여 정리한 내용을 같이 공유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수줍음을 드러내며 양해를 구하는 모습이란 살아있는 학자적 양심의 모습이란 저런 것이 아닌가 하는 환상을 보는 것 같이 느끼게 했다. 막이 오르기 전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 마치 변신에 탁월한 연기자인 누군가만 남은 것 같았다.
소름끼치는 순간이었다. 그에 대하여가 아니라 나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매순간 진실했고, 영혼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로 그렇게 느껴졌다. 제대로 궁금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의 생각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미나 내내 그의 현학적 태도와 현실을 연결짓는 지성에 감탄하기 보다, 나에게는 왜 그의 이 변화(mode change)가 이토록 쉽게 작동했는가 때문에 나의 생각을 추적했다.
'우리는 모두 연기를 하며 삽니다. 그럴듯한 연기, 보수는 보수다움을, 진보는 진보다움을. 그 연기가 그럴듯하지 못할 때, 반증의 기회가 생길 때, 그 때 우리는 그를 보수답다, 진보답다 하지 못하여 욕하고, 권리를 박탈해야한다고 합니다.'
맞는 통찰이다. 나는 그에게 씌워진 '겸손이라는 가면'에 매료되었다. 나는 그것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의 연기는 매우 그럼직했다. 그는 그 순간 진정성있었다. 이것은 그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되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욕망과 기대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들이 나로 부터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나의 기대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원망할 것도 줄어든다. 나의 기대가 타자에게 투사되고, 타자에 대한 비판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고, 가능성을 감지했지만 오늘도 놓치고 있는 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다. 그것이 나를 구성하는 전부도 아니고, 나를 설명하는 현상 전체도 아니지만, 내가 추구하는 인간관의 매우 중요한 부분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그래서 나는 또 반성한다. (누군가 이 장면에서 나와 같은 성찰이 있기를 기대하는 욕망을 나는 떨쳐버리지 못했다.)
나를 성찰하는 것은 나를 조금 더 객관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더 잘 볼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싶다고 말하는 바가 있다면, 비추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삶의 방식을 비추어 보는 삶'이다. 그것이 바로 '도'이고, 그것이 '이렇게 살고싶은 삶'을 이루어 내는 연습이 될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을 선언하였고, 선언한대로 일치시키기 위하여 행동한 것을 비추어 본다. 나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 속에서 내가 진심 그 가면의 인격체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진정성은 거기서 부터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