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15분의 기적
그가 그녀보다 아프다는 걸,
내일이면 파라다이스로 갈 거란 걸.
다시는 찾아올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면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 자신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정부는 수입이 없는 독거노인들에게 ‘디지털 시티 파라다이스’로의 이주를 강력히 권고했다. 평균 수명 백이십 세가 넘으면 연금과 의료지원 같은 복지가 중단되는 법안도 통과됐다. 권고라는 말이 무색한, 사실상의 강제 이주였다.
대신 올해 안에 파라다이스로 마인드 업로딩을 신청하는 노인들에게는 모든 비용을 면제해 준다고 광고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홍보 문구와 함께.
프로그래머였던 P는 마인드 업로딩을 믿지 않았다. 의식을 0과 1로 번역한다고 해서 그게 '나'일 수 있을까? 파라다이스는 영생이 아니라 정교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했다.
알츠하이머가 악화된 J를 위해 P는 모든 것을 처분했다.
집도, 채권도, 미래도.
J가 들어간 유토피아 요양원은 아날로그 세계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실제 손길이 닿는 곳, 진짜 햇살이 드는 곳.
이십 년간 P를 지탱한 것은 오직 J였다.
주말마다 면회를 가고, 손을 잡아주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들어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P의 몸이 배신했다.
암.
보험은 끊겼고, 남은 선택지는 명확했다. 파라다이스에 자원해야 했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P가 직면한 현실이었다.
P는 뱃속 깊은 곳에서 통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시는가 봐요?”
J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J는 여전히 P를 알아보지 못했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도중에 폭풍을 만나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었거든요."
P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곧 오실 거예요. 저도 소중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함께 기다려요.”
J가 위로하듯 따뜻한 말을 건넸다.
J의 온화한 갈색 눈동자 안에 벽난로의 불꽃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P는 고통이 멀어지며 생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소중한 사람이 누군가요?”
P는 희망을 담아 진지하게 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아 주기를 바랐다. J의 눈동자 너머, 깊숙이 자리 잡은 회색 뇌 속에서 빛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아들이랍니다.”
J가 기다렸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토성에서 일해요. 크리스마스마다 꼭 찾아오죠. 오늘 같은 날은 빠지지 않아요.”
P는 가슴이 조여 왔다.
J의 어깨가 동그랗고 가냘팠다.
혼자 남겨질 그녀.
안쓰러웠지만, P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함께 기다릴 뿐이었다.
젊은 시절의 J도 지금처럼 자주 자기만의 세계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상상들을 이야기하곤 했고, P는 그 독특한 발상에 빠져들었다. J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눈앞에 본 것처럼 생생했었다.
언젠가 밤바다가 보고 싶다며 즉흥적으로 바닷가로 그를 끌고 나가기도 했다.
그날, 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에서 P는 결심했었다.
—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아야겠다고.
외투 주머니 속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P는 J의 무릎을 덮고 있는 진초록 타탄체크 담요에 가려져 있던 종이책을 발견했다.
그가 선물했던 책이었다.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고 계시는군요.”
P가 말했다.
“아, 이 책을 아세요?”
J가 반색하며 반응했다.
J가 자주 읽어 모서리가 닳아빠진 책등을 쓰다듬자, 오래된 책 특유의 묵직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다.
“네, 샘 레이의 목걸이를 좋아합니다.”
P의 대답에 그녀가 보조개가 활짝 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첫눈에 반했던, 양 볼이 오목하게 우물져 아기처럼 보이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러나 J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토록 오랜 세월 보조개는 간직하면서도, 백 년을 같이 살았던 P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P는 자신을 다독이며 그녀의 기억을 되살릴 만한 것을 찾았다. 그때 운이 좋게도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그토록 먼 세월 떨어진 세상에 대한….”
P가 첫 구절을 읊어 보았다.
“전설과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J가 마지막 절을 읊으며 화답했다.
그녀는 첫 구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설집에 실린 열일곱 편의 주옥같은 단편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었다.
P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일순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여유가 생긴 P는 J의 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의 꽃무늬 벽지는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책상 위에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책 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한쪽 벽면에 서 있는 장식장에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그가 선물했던 수십 개의 스노볼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유토피아는 세심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앞으로도 J가 남은 생을 편안하게 지낼 만하다 싶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J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골똘한 표정으로 P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 P는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기를 기다렸다.
“저, 혹시… P?”
J가 조심스레 불렀다.
P는 숨이 멎는 듯했다.
“나예요. P.”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자,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J의 흐릿했던 눈동자에 따뜻한 빛이 돌아왔다.
J가 일어나며 두 손을 내밀자, P가 덥석 잡았다. P는 크고 단단한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J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그를 꼭 붙들었다. P는 그녀의 가냘픈 몸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P는 그녀를 감싸 안은 팔을 풀고 J와 눈을 맞추었다. J가 양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P 자신이 비쳤다.
순간 P는 주책맞게도 눈물이 나려 했다.
“J, 즐거운 크리스마스.”
P가 말했다.
그리고 서둘러 주머니에서 선물 상자를 꺼내 건넸다.
“나는 미리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내겐 당신이 선물이야.”
상자를 열자, J가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와! 스노볼이네요. 고마워요, P.”
J가 스노볼을 흔들자, 이층 집이 들어있는 둥근 그 세상에 흰 눈이 하늘하늘 내렸다. 빨간 지붕 위로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풍경이 평화로웠다.
"예전에 내가 기억 저장 기술을 연구할 때도 이런 작은 세계를 상상했었는데…. 참 아름다워요."
“음악도 나와.”
P가 하단에 삐죽 나온 태엽을 감자, 맑고 청아한 오르골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르골의 캐럴은 십오 분 동안 울렸다.
어쩌다 J의 정신이 돌아오는 시간도, 언제나 십오 분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지난번의 J는 끝내 그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오르골에서 나오는 캐럴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던 J가 불현듯 두리번거렸다.
“올해도… S는 안 오는 건가요?”
J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P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떨궜다.
“일이 많아서….”
그는 강한 사람이어야 했지만, 아들에 관해서라면 그러질 못했다.
묻어두었던 슬픔이 다시 저며왔다.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S는 우리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요?”
“보고 싶겠지. 분명 우리랑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을 거야.”
“그렇겠죠?”
P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요. S가 평소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실은 당신 백세 생일날, 토성의 달 중 제일 큰 타이탄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어요.”
말문이 터진 J가 한 번에 쭉 여러 개의 문장으로 말했다. P가 장단을 잘 맞추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타이탄으로?”
이미 눈앞이 흐려진 P는 겨우 중얼거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당신에겐 비밀이었는데. 당신 모른 척해줄 거죠?”
J는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들뜬 목소리였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당신, 설마 질투 나요?”
눈을 흘기는 J의 목소리에 묘한 흥분이 묻어 있었다. 말투도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니, 내가 언제 질투했다고.”
P가 손사래를 쳤다.
“난 그 애 엄마잖아요. 원래 모자 사이는 특별한 법이에요.”
J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힘내라는 듯 P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S도 알고 있어요.”
“무얼 아는데?”
“당신은 그저 표현하는데 서투를 뿐, 속으로는 정이 깊다는 걸 알고 있다고요. 당신이 프로그래머 은퇴를 선언한 날. 그날 많이 취했잖아요, 기억나요?”
“내가 그랬었나?”
“그날 S가 당신을 이층으로 업고 올라가야 했어요. 내려와서 그러더군요.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당신이 살아온 삶이 대단하다고 말했어요.”
한번 말문이 터진 J는 거침이 없었다.
“S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P는 허허 웃으며 되물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나, 기억력 좋잖아요.”
J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랬다. 그녀는 영민했고 S는 그런 엄마를 쏙 빼닮았다.
“내 삶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녀석,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P는 들키지 않게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그날 밤 자신은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P는 장식장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선반 위에 수십 개가 넘는 스노볼이 놓여 있었다. 저마다 추억을 담고 있었다. 로마 콜로세움, 자유 여신상, 화성 기지…. 그리고 바닷가 이층집. 그들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스노볼들.
그 앞에서 P의 머릿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다른 기억들이 툭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과거가 갑작스러운 밀물처럼 그를 향해 밀려들었다.
바닷가 언덕 위, 이층 침실에서 눈을 뜨면 멀리 반짝이는 윤슬과 은결이 번갈아 보였다. 한때 P의 집에는 많은 친구들이 드나들었고, 오래된 종이책이 꽂혀 있는 책장과 식물을 키우는 화분들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었다. 털북숭이 개를 키우진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볼이 빨간 아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P가 마흔여덟이 되던 해, 띠동갑 S가 태어났다.
P의 엄지손가락을 꼭 잡아 쥐던 조그만 손. 뒤뚱뒤뚱 혼자 걸음마를 떼던 거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수도 없이 함께 오르내려야 했던 나선형 계단. 매일 아침 다 함께 손잡고 산책을 하던 해변. 번쩍 들어 올려 빙빙 돌리면 하늘을 배경으로 자지러질 듯이 웃으며 내려다보던 S의 영특한 눈빛. 눈앞에 선연했다.
P는 흐릿한 시야로 스노볼을 하나를 들었다. 작은 유리 구 속에 파란 줄이 달린 자전거가 멈춰 서 있었다. 눈송이 가루가 천천히 흩날리며, 그날의 해 질 녘 공기 냄새와 아이의 숨결이 다시 살아났다.
“아빠, 손 놓으면 안 돼!”
일곱 살 S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놓지 않을게. 아빠가 계속 잡고 있어.”
하지만 P는 이미 손을 놓고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아빠! 어딨어?”
뒤를 돌아보던 S가 그대로 돌 틈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에서 피가 스며 나왔지만, S는 아픔보다 배신감에 찬 목소리로 울었다.
“아빠, 손 놓지 말랬잖아! 거짓말했잖아!”
그 작은 손으로 P의 팔을 밀치듯 치며 엉엉 우는 모습에, P는 말없이 아이를 껴안는 수밖에 없었다.
P는 그렇게 배웠었다.
손을 놓아주는 것이 성장이라고, 아이를 믿는 거라고.
S는 어릴 적 유난히 겁이 많았다. 천둥 번개라도 치는 날이면 둘의 침대 속으로 뛰어들곤 했었다. P는 S를 단단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우는 S를 번쩍 들어 다시 자전거 안장에 앉혔다. 작고 여린 손으로 핸들을 꼭 잡은 S가 P를 보았다. 글썽이는 눈물 사이로 자신이 보였다.
그때, S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S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혼자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땀에 젖은 곱슬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S가 소리쳤다.
“아빠! 나 혼자 탈 수 있어!”
P는 번쩍 손을 들어 흔들었다.
놓은 줄 알았던 손이 아직도 뭔가를 붙잡고 있는 듯했다. 자전거 너머 해 지는 하늘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 뒤로 자라면서 S는 활달해졌고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언어 배우기를 좋아했다. 새로운 단어를 배울 때면 여러 행성어로 바꾸어 말하곤 했었다.
P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지만 S가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사는 건 늘 그랬다. 진심은 따로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간 말이나 행동은 정작 그 반대일 때가 많았다. 마음과 다른 '나'가 불쑥 나타나 모든 걸 망쳐놓고는, 수습하느라 또 다른 시간을 다 써버렸다. 그래도 속 깊은 S는 다 알고 있었다. 고마운 아들이었다.
순간 P는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토성 하늘에는 달이 백 개도 넘는대요. 우리에게 그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어요. 물론 당신은 벌써 보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셋이 다함 께 우주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잖아요. 당신도 기대되죠?”
J가 P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허어, 그래요.”
P가 헛웃음을 웃었다.
“타이탄에 가면 이것보다 짙은 푸른 바다가 있대요.”
J가 반지를 낀 왼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상상해 봐요.”
“뭘?”
“백 개가 넘는 달들이 뜨는 타이탄의 밤하늘이요. 하늘 가득 빼곡하겠죠? 그 달들이 바다에 비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바다 위 수천 개의 달이 뜨겠죠?”
J는 눈앞에 천 개의 달이 보이기라도 하 듯 황홀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P의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J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여행의 끝자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의 기쁨이자 자랑인 아들 S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P는 울음을 삼키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고통은 무디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P는 아들이 우주전에 참전한 이후 달라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른이 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그것이 죽음으로 몰아갈 줄은 몰랐다. 우주개척 시대에 전 세계 강대국은 지구 밖 우주 행성에서 부딪치곤 했다. 싸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 부족했던 정부는 군 입대를 유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지원해 줄 기세였다. 2년만 복무하면 대학 등록금 전액을 지원해 주겠다는 군대에 입대하라고 권한 건 P였다.
프로그래머였던 P가 참여한 게임이 대 히트를 치자 여기저기에서 일거리가 몰려왔던 시절이 있었다. 부와 명예가 바로 근처에 있다고 느껴졌다. P가 원하기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P는 더 열정적으로 일하는 대신 한적한 바닷가 마을로 이사를 했다. 둘 다 원격 작업이 가능했기에 선택할 수 있었다.
J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성공보다 중요했다. 아침이면 파도 소리에 눈을 떴고 손잡고 해변을 산책한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창 앞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일을 했다. P는 코딩을, J는 뇌과학 논문을 읽었다. 행복했다. S가 태어났고 셋은 여전히 행복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짧았다. 일찌감치 인공지능을 학습시켜 개발에 참여시켰던 게임회사만 살아남았고, P에게 의뢰하던 회사들은 하나 둘 합병되거나 청산되어 사라졌다. P는 고심 끝에 변방 행성을 떠돌며 자원 개발 현장을 감독하는 일에 지원했다. 위험수당 때문에 돈벌이가 짭짤하다는 소문이 돌자 그 일조차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는 달에서 일 년, 그다음에는 화성에서 이 년. 체류 기간은 늘어났지만 벌이는 제자리였다.
J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인공지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지만, 정작 인간의 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실험실보다는 눈앞의 아이를 이해하느라 바쁜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고 사라지는지, 언젠가는 모든 걸 밝혀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S가 군 입대를 선언했을 때, J는 결사반대했지만 P는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S의 뜻을 존중한 것도 있지만 군대를 제대하면 대학 등록금을 무상 지원한다고 들었기에 안도하는 마음이 컸다. S는 전쟁에 나가 무공 훈장을 받고 전역했다. 집으로 돌아온 S는 훈장을 받은 이유를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우주 개척이 한창이던 평화시대에 태어났던 P는 군대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P는 아들이 훈장을 받은 이유에 대해 묻지 못했고 왠지 아버지로서 못할 짓을 시킨 기분이 들었다.
P는 S가 일 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지낼 때 싫은 소리를 한마디도 안 했다. 그저 세상 모든 일에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아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토성 우주 개척단에서 파일럿을 구한대요.”
어느 날 불쑥 S가 말했다.
청춘을 허비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던 때였다. S가 대학에 가지 않고 우주군 경력을 인정해 주는 우주선 파일럿이 되겠다고 해서 놀랐지만, 내심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넓고 광활한 우주에 네 미래가 있을 거야. 네 능력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다.”
P가 격려했었다.
우주비행사란 직업을 동경했던 J는, 막상 S가 우주비행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혼란스러워했다. 특별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 되는 줄 알았던 우주비행사가 군 경력만으로도 통과되다니, 그렇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면 왠지 단순 노동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도 우주가 아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모든 우주선에 인간 우주비행사가 최소 2인은 반드시 탑승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인간이 존중받는 직업이었다. S는 영특한 데다 성실하니까 잘 해낼 거라고, 평범하게 잘 살아갈 거라 믿었다.
오늘은 우주선에 고장이 나서 일곱 시간 동안 유영을 했어요.
텅 빈 우주는 차갑고 어둡고 고요하지만, 그곳은 죽음과 광기가 가득해요.
파도와 바람 소리가 들리는 고향 집이 그리워요.
S는 P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부가 아들을 만나러 가던 도중에 소식을 들었다. 토성에 도착해 그들을 맞은 건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S였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지구에서 날아오는 부모를 만나지도 않고 훌쩍 떠나버렸다.
인간에게는 타인은 절대 닿을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 있었다.
유난히 다정했던 엄마와 아들 사이에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과 나누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J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들의 죽음은 그녀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한동안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쏟아져 눈길조차 피했던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서로를 할퀴기 시작했다.
“S는 영혼이 자유로운 아이였어요. 그런 애를 왜 군대에 보냈어요.”
“내가 보낸 건가? 그 애가 자원한 거야. 그리고 당신이 그런 말을 나에게 할 입장인가? 기억 안 나?"
“우주비행사는 당신이 애가 어릴 적부터 주입시켰던 꿈이었잖아.”
“우주 비행사가 되길 원했지 군인이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이제 와서 그 애가 군인이 된 것이 내 탓이란 말이오? S는 훈장도 받았어.”
“그래서요? 훈장과 그 아이 목숨을 맞바꾼 거잖아요.”
“말 다 했소? 당신이야말로 평소 아들과 대화 좀 나누지 그랬소?”
둘만 알던 추억은 서로만 아는 묵은 상처를 헤집는 무기로 변했다.
둘은 점점 강퍅해졌고 서로에게 잔인해졌다. 어느 날인가, J가 고함을 지르자 P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심한 말을 아무 감정도 없이 내뱉었다. 그날 싸움은 점입가경 막장으로 치달아 고성이 오갔고 J의 통곡으로 끝났다.
그때부터 P는 입을 다물었다. 싸움을 피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를 거부하는 P에게 J는 더 집요했다.
한 번은 J가 “당신 날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그 마음은 다 어디로 간 거야?”라고 물었지만 P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J는 일에만 매달렸고, P는 S가 쓰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둘의 관계가 파탄 나기 일보 직전, J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았다.
P는 그것조차 J가 자신을 괴롭히려는 수작이라고 의심했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자신에게 떠넘기고 혼자서 다른 세상으로 도피해 버릴 수가 있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J를 잃는다고 생각하자 온 세상이 아득해졌다.
P는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아내가 병들고 망가질 때까지 P 자신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도대체 그 마음은 다 어디로 간 걸까?
P는 헌신을 다했지만 J의 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우리 아들은 효자예요. 그러니까 봐주자고요. 올해는 우리끼리 오붓하게 보내요.”
J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웃어 보이자 P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스노볼처럼 작고 투명한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던 아들의 죽음과 P의 모진 말들을 다 잊은 것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당신,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누구에게 잘 보이려 이렇게 잔뜩 멋을 부렸죠?"
J는 어느새 시간을 거슬러, 어딘가에 멈추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걸까?
J의 얄궂은 표정을 보던 P는 멍해졌다가 빙긋 웃었다.
“누군 누구겠소? 다 이 넥타이 덕에 내가 멋져 보이는 거지.”
P는 J의 기억을 되살리려 했다.
J는 코끼리, 낙타, 얼룩말 같은 동물 문양이 가득한 넥타이를 선물하곤 했었다.
P는 그중에서도 오늘 매고 온, 그녀가 첫 월급으로 선물한 노란색 실크 타이를 가장 아꼈다.
“처음 보는 건데. 또 어떤 여자가 선물했죠?”
J가 발끈하며 물었다.
그녀는 뜨거운 여자였다. 열정적인 만큼 질투도 강했었다. 매서워진 J의 눈초리에 P는 난감했다. 한편, 늙고 병든 자신을 아직도 멋지다고 봐주다니 그런 J가 귀여웠다.
“글쎄 누굴까? 어떤 귀여운 여인이었는데.”
P가 엉뚱한 대답을 내놓자 J의 표정은 금세 풀렸다.
“흠, 누군지는 몰라도 눈썰미가 있네요. 넥타이가 당신이랑 아주 잘 어울려요."
그녀가 곱은 손으로 넥타이를 고쳐 매 주었다.
J의 손길에 P의 기억은 신혼 시절로 달려갔다.
밤새 바라보았던 밤바다의 하얀 파도, 하늘거리던 커튼에 비쳐 든 햇살, 공기 중에 떠돌던 커피 향
그녀의 길쭉길쭉한 팔다리,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결, 쾌활한 웃음소리.
P는 손을 뻗어 J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오늘 유난히 아름다운걸…….”
P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은 잠시 그윽한 눈길로 서로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