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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크리스마스

1화 : 크리스마스 아침, 유토피아로

by Stardust

P에게 남은 시간은 하루.

파라다이스 입주 전, 그는 마지막으로 아내를 만나러 간다.



외출 준비를 마친 P는 에어 택시를 기다렸다. 동트기 전 하늘은 거대한 회색 구름이 두텁게 덮여 있었다.

P가 사는 외곽 동네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빈속에 한기를 느낀 P는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차를 마시기로 했다. 주전자를 레인지에 올려놓자 서서히 물이 끓었다. 투명한 주전자 바닥에서 하얀 기포가 방울방울 올라오며 반짝였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P는 괜스레 울컥한 감정이 들었다.


식탁 의자에 앉은 P는 일부러 뜨거운 찻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위에 도착하자 부유하던 감정들도 가라앉았다.

P는 여느 날과 똑같은 아침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십 년 전부터 혼자 사는 임대주택은 무채색 붙박이 가구로 차분하고 간소한 분위기인데 현관 입구에 놓인 여행 가방만 알록달록했다.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의 파란색 가방에는 P가 젊었을 때 여행 다녔던 수많은 행성들의 스티커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가방 안에는 P가 마지막으로 떠날 여행을 위한 채비가 들어있었다.


집안을 둘러보던 P는 창틀에 놓인 제라늄 화분에 눈길이 닿자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집을 비워줘야 했기에 살림살이 대부분은 처분했지만, 햇빛 없이 전기로 키우는 식물 화분을 받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새 차가 식어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P는 남은 찻물을 화분에 부어 주었다. 연보랏빛 꽃잎에서 희미한 향기가 올라왔다.

폭풍이 오기 전 출발하려던 P가 조바심이 나려던 순간 에어 택시가 도착했다.


집을 나서기 전, P는 전신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구부정한 어깨를 펴자, 반백의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노신사가 보였다. 노란색 실크 넥타이에 중절모까지 갖추었으니 멋쟁이였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듯했지만 당장 떠오르지 않던 P는 문을 닫고 나섰다가 허둥지둥 돌아왔다.

J에게 줄 선물을 놓고 나온 것이다.

여행 가방은 그대로 놓아둔 채였다.


“어서 오십시오. P 씨, 반갑습니다.”


택시에 승차하자 그가 즐겨보는 뉴스 채널의 여성 앵커 목소리가 나왔다. 지구 반대편 테러 사건이나 수년째 끝나지 않는 행성 간 전쟁 소식을 전해주던 그녀가 기껏 택시 기사라니, 반갑기보단 아끼는 무언가가 훼손된 느낌이었다.

마침 거리의 가로등이 일시에 꺼졌다. 희부연 잿빛 도시는 요란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점멸하는 전구들로 생경해 보였다.


“유토피아까지 예상 탑승 시간은 1시간 20분입니다. 오늘은 모래폭풍이 예보되고 있어 예상 시간보다 늦어질 확률은 67%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지만, 고속 할증요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P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P는 디지털 마인드 도시인 파라다이스로 영구 이주하는 주민에게 주어지는 무료 교통권으로 아내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P님, 내일이면 파라다이스에 가신다죠?”

보이지 않는 앵커가 물었다.


에어 택시는 승객 P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빈틈없는 복지정책의 산물이었다.


“그렇소.”


“축하드립니다. 파라다이스는 정말 완벽한 천국이라고 합니다. 무료로 디지털 영생을 누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허!”

P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1과 0으로만 만들어진 그곳이 완벽한 천국이란 말에 심사가 틀어졌지만, 상대는 택시일 뿐이었다.


“유토피아에는 가족이 있으신가요?”


“…….”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가족끼리 모여야죠. 선물은 준비하셨나요?”


독거노인 승객은 외롭고 고독할 테니 무조건 대화를 시도하라는 설정이라도 되어있는지 자꾸 말을 걸었다. P는 아무리 좋아하는 앵커 목소리라지만 알고리즘대로 움직이는 택시와 수다를 떨어야 할 만큼 외롭지도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P는 대답 대신 오디오를 음악 채널로 돌려버렸다.


마이클 부블레가 부르는 올드 캐럴인 “I’ll be home for Christmas”가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음색이 좁은 공간을 채우는 동안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에어 택시가 천 미터 상공에 펼쳐진 전용 항로에 들어섰을 때, P는 자신이 탄 택시가 겨울 아침의 유일한 차량이라는 것을 알았다.


텅 빈 하늘에 눈이 시렸다. 두터운 회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 가까웠다. 광활한 하늘이 온통 그만의 것이 되었다. 장엄한 풍광이었다.

P는 눈을 감았다 떴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자신이 가뭇없이 사라져도 세상은 영원하겠구나.'


문득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룬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는 자신에겐 홈이라 부를 만한 장소조차 없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노래는 애절한 클라이맥스를 지나 후렴 부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순간 P는 J가 마치 자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J가 있는 곳이 나의 집이지. 그래,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

P가 명심이라도 하듯 소리 내 중얼거렸다.



유토피아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운영되는 숲속 요양원이었다. 개원 당시, 숲에 둘러싸인 호숫가에 자리했던 유토피아는 쾌적한 맞춤 서비스를 위해 제한된 인원 유지를 표방했었다. 방문객에도 예외가 없었기에 P는 한 달 전 예약해 두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인데도 방문객이 별로 없어 로비가 한산했다. 스산한 분위기에 놀란 P는 복도에서 한 무리의 가족을 만났을 때 약간 안도감까지 느꼈다. 길을 비켜주려고 잠깐 멈춰 누군가에게 눈인사하는 기회가 고맙게 여겨질 정도였다.


J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P는 방문 앞에 섰다.

111호실.


폭풍으로 차가 심하게 흔들리자, 멀미를 심하게 했던 P는 손으로 입을 막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자라고 있는 암세포에서 고약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P는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옷매무새를 다시 만지고 어깨의 모래 먼지를 털어낸 P가 문을 열었다.


J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P는 그녀가 놀라지 않게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J의 옆에 섰다.

P가 J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자 동그란 어깨뼈가 한 손에 들어왔다.


“안녕!"


인사하는 P의 목소리가 떨렸다.

살짝 설레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J는 묵묵부답이었다. 찰나 당황한 P가 J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그리고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J는 예의 침묵에 빠져 있었다.

P도 익숙한 침묵이었다. 그래도 반갑고 좋았다. P는 숨을 들이쉬면서 그녀의 곁에 섰다.


J의 은빛 단발머리는 숱을 유지한 채 단정했다. 부드럽고 두툼한 하늘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왼손 약지에 블루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J가 특별한 날에만 꺼내어 끼는 반지였다. 그녀도 오늘을 기다렸다는 생각에 P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제법 알이 굵은 그 반지는 P가 해왕성에 파견 나갔다가 일 년 만에 다시 만날 때 선물했던 반지였다. 그 시절 그들에게 일 년이란 시간은 그리움으로 범벅된 애틋함, 그 자체였다.


해왕성에 다이아몬드가 흐르는 바다는 없었지만, 우주 공항 면세점 특산물 코너에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장신구가 가득했다. P는 J의 반지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미묘하게 찰랑이며 반짝거리는 푸른빛은 J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P는 선뜻 몇 달 치 월급을 털어 반지를 샀다.


마음에 드냐고 묻는 P에게 J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었다.

“당연하지. 블루는 언제나 정답이거든!”


P는 J의 유쾌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J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커다란 이중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것은 휘몰아치는 거친 모래바람뿐, 딱히 볼만한 것은 없었다.


P는 모래바람이 멈추었을 때의 창밖 풍경도 알고 있었다. 녹청색이 아름다웠던 호수는 말라붙어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울창했던 소나무 숲도 풍파를 버틴 몇 그루만 겨우 남아있을 터였다. 유토피아도 모진 풍파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바람이 거칠어지는지 짙은 갈색 모래들이 창유리에 부딪히며 타타타 소리를 냈다. 벽에 설치된 고풍스러운 벽난로 화면에서 나무 장작이 타들어 가는 효과음을 내고 있어 묘한 조화를 만들었다.


말을 건네기 조심스러워진 P는 J의 곁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P는 오는 길 내내 J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었다..


>>제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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