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다시 시작한 건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익명의 공간에서 맘껏 넋두리를 휘갈기다 보면 나도 모르는 응어리가 좀 풀리지 않을까 싶어서. 실제로 꽤 많은 도움이 됐다. 뭔가 쏟아내고 싶지만 들어줄 사람은 없을 때, 눈치 안 보고 마구마구 써댔더니 나름대로 배설의 카타르시스가 좀 생기더라고.
그런데 웃긴 건, 상태가 정말 나쁠 때는 오히려 글을 쓸 수가 없다는 점. 정말 안 좋을 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기도 하고, 사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으니까. 반대로 상태가 좋을 때도 글쓰는 게 쉽지 않다. 일단 밀린 생업들을 처리해야 하고, 그땐 뭔가 쏟아내지 않아도 괜찮다보니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밀리거든. 그러니까, 글이 잘 써지려면 적당히 우울해야 하나보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글을 잘 썼을 때는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아니었나 싶다. 그때 썼던 글의 흔적들을 오래된 일기장이나 학교문집에서 발견할 때면 흠칫 놀란다. 와.. 내가 이렇게 글을 패기 있게 쓰는 애였어?문장은 거칠지만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아주 펄떡펄떡 하는구만. 그랬던 소녀가 이렇게 무기력한 중년이 되다니. 영고일취, 인생무상.
예전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괴롭히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이야기에 헛웃음이 나곤 했다. 딱히 불행할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소위 '예술하는 사람'들은 대체 뭐 그렇게 엄살이 심해. 예술이 그렇게 어려우면 그냥 때려치우고 취직이나 하든가..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까 참 어렸네. 어린 나야, 역시나 참 패기가 있었구나.
이제 이모양 이꼴(?)이 되고 나니, 조금씩 그 사람들의 불행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같은 게 뭐나 된다고 이런 말을 하나 싶지만, 어쩌면 그때의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다. 예술하는 사람이라 예민한 게 아니라, 예민하기 때문에 예술을 하는 걸지도 몰라. 불행하면서도 예술을 고집했던 게 아니라, 예술을 한 덕분에 그나마 덜 불행했을지도 모르지. 역시..한 번 당해보는 것만큼 확실한 역지사지가 없다.
물론 모든 예술가들이 예민하거나 불행하진 않겠지. 하지만 감수성과 배출욕구는 평온한 상태보다 격동의 상태일 때 더 커진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작가들을 좀 다른 방향으로 바라봐야지. 엄살에 아니라 섬세한 거라고.
그리고 나도, 이 충동적인 상태가 주는 장점을 그나마 하나 찾은 셈이다. 누가 알아? 지금 내가 싸지르고 있는 이 글이 나중에 '어느 불행했던 무명작가의 기록'으로 후세에 전해지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