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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콬콬 Apr 08. 2018

악행의 매혹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작가 (2)

4화. 품위 있는 이야기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3화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품위 있는 이야기꾼


스티븐슨의 소설에는 잔인한 범죄나 죽음의 공포, 악마의 유혹 같은 별난 소재가 많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에는 살인과 자살이, <하룻밤 묵어가기>에서는 추운 겨울밤 지낼 거처를 구하지 못 한 여자가 길에서 얼어 죽는다. 주인공 비용은 시인이자 강도인데 그는 추운 겨울밤에 길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하룻밤 묵을 곳을 찾다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기로 한다. <마크하임>은 주인공이 살인자이고 단편의 주요 사건이 살인 그 자체이다. <시체도둑>은 지금은 유명한 의사가 된 인물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데, 이 저명인사는 자기 비위를 건드린 사람을 죽여서 해부용 시체로 의과대학에 공급했다. <자살 클럽>은 말 그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가입하는 클럽이다. 죽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이 클럽에 가입하면 회원들 중 어떤 이는 살인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피살자가 된다. 이 클럽과 클럽을 운영하는 사악한 인간 그리고 그들을 뒤쫓는 왕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해변가 모래 언덕 위의 별장>에서도 역시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이 불에 타서 죽는 잔인한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게다가 그는 금용 사기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사기꾼이기도 하다. <악마가 깃들인 병>이나 <목소리의 섬>은 악마에게 휘둘리던 주인공이 죽을 뻔한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요약만 해놓아도 당장 책을 펼치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스티븐슨이 만든 이야기에는 사람의 여러 감각을 자극하는 소재들이 차고 넘친다. 한번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반드시 결말까지 들어야만 자리를 뜰 수 있을 게다. 그가 쓴 수필 <꿈속에서>에서 밝혔듯 스티븐슨은 돈을 벌기 위해 이야기를 썼고 팔았다고 하는데 그가 선택한 소재만 봐도 사람들이 단박에 흥미를 느낄 만한 소재를 얼마나 잘 찾았는지 알 수 있다. 무척 대중적인 소재를 선택했다고 해서 그가 쓴 이야기가 그저 흥미 위주로 쉽게 쓴 소설은 결코 아니다. 스티븐슨은 분명 품위를 갖춘 문장을 쓴 작가이다.
 스티븐슨을 대표하는 ‘모험소설, 공포소설’의 작가라는 명칭은 어쩐지 작가 스티븐슨의 역량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단편 <마크하임>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세세하게 미묘한 순간을 묘사하는 글솜씨가 탁월한지 알 수 있다. 다만 그가 친하게 지낸 헨리 제임스처럼 심리 묘사를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스티븐슨은 바람과 공기를 가르는 빛과 그늘, 안개가 퍼지는 순간의 대기 같은 외부의 공간과 귀 기울이면 사방에 물건들이 마치 들숨과 날숨을 내쉬는 듯 소리를 내는데 그는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것들을 인물의 심리를 드러낸다. 스티븐슨은 결코 거친 문장이 난무하는 모험담으로 사람을 홀리기만 하는 작가가 아니다.
  
마크하임은 입고 있던 긴 외투 주머니에서 손을 밀어 넣으면서 주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어 결연하게 우뚝 서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와 동시에 많은 다른 감정들이 마크하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려움, 전율, 결의, 매혹, 육체적 혐오감. 마크하임의 윗입술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고 곧 그의 이가 드러났다.  
 “이거라면 아마 괜찮을 겁니다.” 주인이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마크하임이 뒤에서 달려들었다. 꼬챙이 같은 기다란 단검이 한 번 번뜩이더니 아래로 내리꽂혔다. 상인은 암탉처럼 버둥거리다 선반에 관자놀이를 쿵 부딪히며 덜퍼덕 바닥으로 쓰러졌다.  
 가게에 있는 시계들이 시간을 알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몇몇은 오래되어서 그런지 천천히 장중한 소리를 냈고, 다른 것들은 장황하고 성급한 소리를 냈다. 초침들이 똑딱이면서 복잡한 합창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한 행인이 보도를 달려가며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냈고, 시계들이 내는 작은 소리는 그 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마크하임은 발걸음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두려운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계산대 위에 세워진 양초 불빛이 바람에 음산하게 흔들렸다. 이 사소한 움직임으로 인해 방 전체에 소리 없는 소란이 일더니 마치 바다처럼 계속 솟아올랐다. 키가 큰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가게 안의 어둑어둑하고 혐오스러운 얼룩들은 숨을 쉬는 것처럼 부풀었다가 줄어들었으며, 초상화의 얼굴들과 중국의 잡신雜神들은 물에 비친 형상인 양 급변하며 흔들렸다. 가게 안쪽 문은 약간 열려 있었다. 그림자로 가득 찬 가게 안에 가느다란 햇살이 뭔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비집고 들어와 있었고, 열린 문이 그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듯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마크하임은 가게 주인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시체는 몸을 웅크린 채 뻗어 있었다. 생전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기이할 정도로 누추해 보였다. 불쌍할 정도로 누추한 옷에 꼴사나운 몰골의 가게 주인은 마치 톱밥 더미처럼 누워 있었다. 마크하임은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결국 그건 시체일 뿐이었다. 시체를 보고 있자니 낡은 옷가지들과 피웅덩이가 웅변적인 목소리를 갖추기 시작하는 듯했다. 틀림없이 시체는 쓰러져 있었다. 누군가가 이 시체의 정교한 관절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거나 기적이 일어나 시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일은 없을 터였다. 분명 시체는 발견이 될 때까지 쓰러진 채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발견? 그럼, 그다음에는?(… … …)아무 소리도 없던 방에서 돌연 그렇게도 많은 시계들이 소리를 내자 마크하임은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기운을 내고 움직이는 그림자에 둘러싸인 채 촛불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값비싼 거울들이 많이 있었는데 일부는 잉글랜드에서, 일부는 베네치아나 암스테르담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크하임은 그런 많은 거울들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수많은 그의 모습들은 마치 첩자의 무리 같았다. 거울에 비친 수많은 마크하임의 눈들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마크하임> 중에서, 현대문학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마크하임은 놀라운 단편이다. 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른 아주 짧은 순간 실내의 공간에 퍼지는 이상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문장이 잡아챘다. 사건 자체보다 살인이 벌어지고 나서 살인자가 느끼는 심리와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이 더 중요하게 서술되었는데 여러 감각 중 특히 청각을 두드러지게 묘사해서 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문장이 정말 뛰어나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 비슷한 시기에 출판해서 꽤 성공했던 장편소설 <유괴>는 해양모험 소설처럼 보이는데 이 소설 안에서 사건은 도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작은아버지가 데이비드의 재산을 빼앗아가려고 그를 배에 태워 노예로 팔아버렸는데 유괴당한 배에서 탈출해서 온갖 고초를 겪은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 이 작품은 육지에서 시작해 바다와 해안가를 두루 거치는 모험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나섰던 정치적인 배경이 데이비드가 먼 바다에서 다시 육지로 돌아가려고 분투하는 동안 이야기의 배경을 이룬다. 단편 <해변가 모래 언덕 위의 별장>에서도 주인공들이 맞서 싸우는 상대가 단순한 협박범들이 아니라 이탈리아 급진 공화주의 결사체인 카르보나리 당원이다. 스티븐슨은 모험과 환상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안에 자신이 감지한 당대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소설에 끌어들였다.  
 환상과 모험이란 소재로 그가 살았던 사회의 실체를 탐색했던 작가라고 스티븐슨을 평가한다면 스티븐슨은 19세기에 ‘도시’의 면모를 관찰한 작가였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누비고 다닌 런던의 거리는 작품 속에서 ‘도시의 거대한 동맥’라고 불린다. 런던은 어떤 도시인가.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도시에 철도가 들어오고 공장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생산량이 이전과 비교해서 엄청난 규모로 늘어나 부를 누리게 된 공간. 어터슨과 지킬과 하이드가 산책하는 도시의 거리에서 상점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부지런히 호객을 벌인다. 스티븐슨이 살았던 도시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조화와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였다.
  모순 상태나 야만적, 비합리적인 것들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웠던 당시 런던이란 대도시에서 이 도시가 배출한 저명인사 지킬 역시 자신의 모순적인 생각을 단일하게 통일해서 조화를 이루고 싶어 했다. 그는 악을 저지르고 돌아와 후회하는 선한 자아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과 악을 깔끔하게 분리할 방법을 찾아 하이드로 변신했는데 악의 표상 하이드로 변신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부강한 대영제국, 합리를 추구한 이성의 시대 역시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되어 있었다. 인접국이나 식민지와 전쟁을 자주 치렀고 발전한 기술 덕분에 생산량이 늘어나는 만큼 실업자는 늘었으며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와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 역시 점점 번영하는 도시에 강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킬이 분리하고자 하는 선과 악도 인간이 감당하면서 직시해야 하는 모순적 속성인데 이를 이성적으로 처리하려고 들었다가 결국 지킬은 자멸하고 말았다. 이처럼 암울한 결말은 예민하게 날선 감각으로 시대를 관찰했던 스티븐슨의 눈에 비친 유럽의 속살이 아니었을까.  


때는 아침 9시경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난 뒤 처음으로 아침에 안개가 끼고 있었다. 초콜릿색의 짙은 안개가 하늘에 아주 낮게 깔려 있었지만, 바람이 공중에 포진한 안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흩어 놓는 중이었다. 마차가 거리에서 거리를 천천히 지나치면서 어타슨 씨는 어스름의 정도와 빛깔이 천양지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쪽은 저녁 말미처럼 어두웠고, 다른 한쪽은 마치 큰불이라도 난 듯 검붉은 갈색빛이 일렁거렸다. 또 다른 곳에서는 잠시 안개가 걷히자 햇빛이 힘없이 맴도는 안개 사이로 드문드문 빛났다. 음울한 소호의 구역은 이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에 더해 진창길, 방종한 모습의 행인들, 밤이면 어김없이 들이닥치는 음울한 어둠과 싸우기 위해 계속 켜두거나 새롭게 점등하는 가로등 따위가 울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터슨 씨의 눈에는 악몽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도시의 모습이었다. 이런 광경 때문인지 변호사의 마음까지 덩달아 음울해졌다. 함께 마차를 탄 경관의 모습을 잠시 보면서, 어터슨 씨는 법률과 그 집행관들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의식하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사실 이러한 두려움은 때때로 가장 정직한 사람도 느끼곤 한다.  
 마차가 해당 주소지에 도착하자 안개가 약간 걷혔다. 화려하게 꾸민 싸구려 술집, 저가의 프랑스 음식점, 1페니 짜리 싸구려 잡지와 2페니 짜리 샐러드를 파는 가게, 누더기를 걸치고 문간에 옹기종기 모인 많은 아이들, 열쇠를 손에 들고 아침부터 술을 마시려고 거리를 활보하는 다양한 국적의 여자들 따위로 인해 거리는 지저분하게 보였다. 이어 암갈색 천연 안료 같은 갈색 안개가 거리에 다시 내렸고, 그리하여 암울한 거리 풍경은 더 이상 어터슨 씨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헨리 지킬이 총애하는 남자가 사는 곳, 지킬로부터 25만 파운드를 상속받게 되어 있는 남자의 집이었다.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 중에서, 현대문학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눈앞을 가린 것은 안개였을까 아니면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온 뿌연 연기였을까. 낡은 집들과 새로 지어진 집들이 서로 뒤섞인 곳. 스티븐슨은 사람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위선을 부리면서도 혹시 자신의 비밀이 세상에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면서 죄악이 흘러넘치는 하수구를 지나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도시의 풍경을 괴물로 변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통해 표현한다.  

변신하려는 인간
 
 지킬 박사의 ‘괴물’로 변신한 시도는 후대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각색된 작품들은 원작의 개념을 토대로 하면서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켜 대중에게 다가갔다. 영화와 연극, 뮤지컬은 물론이고 가장 재빠르게 동시대의 유행을 포착하는 방송 드라마에서도 항상 재해석되는 작품이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이다.  스티븐슨과 같은 시대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가 나온 지 4년 뒤인 1890년에 발표되었는데 도리언 그레이는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신해서 누리고 싶었던 영원한 젊음을 지킬보다 조금 더 누린 인간변종이다. 이후 변신하는 인간은 카프카의 <변신>(1915발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근대인의 혼란이 스티븐슨의 변신에 담겼다면 카프카는 현대인의 무기력을 벌레로의 변신으로 표현했다. 카프카는 (지킬 박사처럼) 붉은 액이 흐르는 약품이나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도리언 그레이처럼) 노화하는 거울 같은 장치 없이 어느 날 아침에 성실한 직장인을 벌레로 바꿔버린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도 내세우지 않는다. 물적 속성이 변하자 자신의 진짜 존재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주목하면서 현대적 인간의 고립감과 고독을 표현했다. 카프카가 그의 윗 세대 작가에게 영감을 얻지는 않았을까? 물론 오래전 신화에서부터 인간과 짐승의 특성을 공유한 괴이한 존재의 이야기는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근대의 스티븐슨처럼 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공포의 소재로 삼아 변신과 변신하려는 의지를 이야기의 공간에서 극화한 작가는 없었다. 문학에서 근대의 스티븐슨이 시작한 '인간 존재의 의식을 탐색하려는 시도인 변신'이 현대의 카프카에 이르러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탐색하는 변신'이라는 메타포로 변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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