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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Mar 11. 2024

미소의 세상 (1)

내가 3살이고 미사언니가 4살이던 해, 엄마는 바람이 나 집을 나갔다. 아빠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에게 우리를 맡기고 서울로 올라갔다. 금방 데리러 온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감성적인 아빠의 유일한 이성적 판단이자 어긋남의 시작이었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조그만 슈퍼를 했다. 시골에서 슈퍼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을 떠나 노인들의 사랑방 역할까지 했다. 할아버지들은 가게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서 술을 마셨고 할머니들은 가게에 연결된 집 안방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당신들의 적적함을 달래줄 불륜이나 이혼 등 자극적인 이야기가 주였다. 그것이 아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정서적인 문제는 배부르고 등이 따뜻해서 일어나는 사치에 불과했다.


아빠는 매일 전화를 했다.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아빠의 전화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명절에 내려오긴 했지만 늦은 오후에 도착해 다음날 낮에 올라갔다. 바쁘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랍장 뒤편에 떨어진 양말이 된 것만 같았다. 언제 떨어뜨렸는지도 잊어버린 채 캄캄한 공간에서 곰삭고 있는 양말.


아빠는 3년이 지나서야 우리를 데리러 왔다. 이제야, 라는 원망보다 곰삭기 전에 찾아왔다는 고마움이 앞섰다.

아빠의 옆에는 여자가 함께였다. 아빠는 그 여자를 엄마라고 소개했다. 할머니들의 수다에서만 들어왔던 엄마였다. 엄마가 활짝 웃으며 “미소야 안녕?”이라며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엄마가 착한 사람이라 확신했다.

할머니의 품을 떠나는 것은 아쉽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남들처럼 아빠, 엄마와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멀미를 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집은 강북 끝자락에 위치한 오래된 빌라의 반지하였다. 주방은 성인 두 명이 앉기도 좁았고 작은방은 성인 두 명이 누우면 꽉 찼지만 안방은 성인 네 명이 모두 누워도 공간이 조금 남을 정도로 컸다. 오르막이 가파른 곳이었기에 주방과 작은방은 반지하였지만 안방과 화장실은 1층이었다. 언니와 나는 작은방을 썼다. 가구 하나 없고 침대 대신 이불을 깔고 잤지만 좋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에 집에 온 첫날에는 밤잠을 설쳤다.


언니가 8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엄마는 괜히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며 밖을 못 나가게 했다. 텔레비전은 아침에 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뉴스 등 재미없는 것들만 나왔다. 책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책을 읽으면 주인공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었다. 반지하를 벗어나 머나먼 숲속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안락함이 들었다.


엄마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언니가 학교에 갈 때 같이 집을 나섰지만 퇴근시간은 늘 불규칙했다. 어떤 날은 정오에 집에 왔고, 어떤 날은 오후 4~5시에 집에 왔다. 정오에 집에 올 때면 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었지만 오후에 올 때면 점심을 거르기 일쑤였다. 귀찮아서가 큰 이유였다. 엄마는 점심을 먹지 않아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먹었는지 물어보지를 않았다. 나는 그것이 좋았지만 아빠의 생각은 달랐다.


저녁 시간이었다. 안방 바닥에 신문지를 깔며 삼겹살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굶은 터라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엄마가 아침 일찍 나가 아침도 못 먹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배가 많이 고프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굶어서 많이 배고파요.”


나의 솔직함에 집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밥을 먹는 내내 아빠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빠는 9시도 안 된 시간에 우리를 잠자리에 들게 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아빠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굳어있었다. 방문을 닫고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는데 아빠, 엄마의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지만 다툼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던 중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노려보는 엄마의 눈빛은 섬뜩했다.


여느 날과 같이 점심을 거르고 동화책을 보고 있었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엄마가 왔다. 엄마는 도착하기 무섭게 라면을 끓였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나는 부엌에 서서 엄마의 눈치를 봤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엄마는 라면을 그릇에 덜고는 밥상 위에 쾅 소리가 나게 올려두었다.

갓 끓인 라면은 너무 뜨거웠다. 후후 불고 입에 넣어도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라면을 식혀서 먹으려고 숟가락에 올려두었다.


“빨리 처먹어.”


엄마가 젓가락으로 그릇을 내리치며 말했다. 처음 듣는 엄마의 호통이었다. 엄마는 어제의 섬뜩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릇 안의 라면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김이 나고 있었다. 후후 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슬쩍 본 엄마의 얼굴을 보고 포기했다. 엄마의 눈빛은 동화책에 나오던 마녀와 똑같았다.

숟가락의 라면을 그대로 입에 넣었다. 뜨거운 기운이 입안으로 퍼져갔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라면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했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알약을 처음 먹던 것처럼 꿀꺽 삼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 너머로 움직이다 어느 한 곳에서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괴로움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찬물을 마시니 진정이 됐다. 엄마는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서러움 때문인지 뜨거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금방이라도 흐를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인 채 라면을 숟가락에 덜어 입으로 넣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엄마의 눈초리보단 견딜만했기에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잘 시간이 다 되어서야 퇴근한 아빠는 나에게 점심을 먹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화상 때문에 입을 벌리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낮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 같아 눈물이 글썽였다. 우는 것을 들킬세라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엄마는 점점 변해갔다. 감춰왔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은 노골적인 편애였다. 아빠의 퇴근이 늦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마랑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엄마는 언니에게 맛있는 반찬을 주고 내가 하나라도 먹으려고 하면 욕을 했다. 욕으로 시작된 편애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맞을 짓만 골라한다며 나를 때렸다. 고통에 눈물이 흐르면 “잘못했어요.”라고 말했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거나 옷에 음식을 흘리는 것이 온몸을 두들겨 맞을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비비며 잘못했다고 말하면 덜 맞을 수 있었기에 습관이 됐다.


엄마가 없을 때면 언니와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엄마의 편애 때문에 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나의 미움은 엄마에게서 오는 것이지 언니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 때문에 유일한 말상대인 언니와 멀어질 수는 없었다.


언니는 엄마가 오면 반갑게 맞았다. 엄마가 불편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같은 자식인데 왜 나만 싫어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저주받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면 머리 위의 창에 비추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엄마가 나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땅보다 낮은 곳에서의 기도는 하늘에 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다 한 해가 지났다. 입학이라는 행복이 찾아왔다. 엄마와 떨어져 다른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기쁨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아빠는 일이 바빠 입학식에 오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였지만 괜찮았다. 밖에서의 엄마는 보통의 엄마들과 같았다. 다른 엄마들처럼 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주지는 않았지만 혼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언니와 같은 학교였지만 등교는 따로 했다. 언니는 동네의 친구들과 같이 등교를 했다. 일 년 먼저 학교를 다녔기에 언니는 동네에 친구가 많았다. 나도 혼자 등교하는 편이 좋았다. 집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기에는 혼자가 편했다. 설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짝꿍인 설희는 하얀 피부에 큰 눈을 가진 아이였다. 눈처럼 빛난다는 이름처럼 구김살 없이 예쁜 아이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기에 우리는 자석처럼 붙어 다녔다. 학교 가는 길에 설희의 집에 있어 등교도 같이 하고 학교가 끝나면 설희의 집에서 놀기도 했다. 설희의 방은 우리 집 안방보다도 컸다. 집도 반지하가 아닌 9층이었다. 처음 설희의 방에서 봤던 밖의 풍경은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고소공포증이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땅바닥보다 낮은 곳에 사느라 높은 곳에 대한 공포가 생겨버린 것이다.

설희의 방에서는 우리 집도 보였다. 정확하게는 우리 집 빌라였다. 9층은 너무 높아 반지하의 창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일층인 안방의 창문도 보이지 않았다.

설희의 집에서 기도를 한다면 어떠한 기도도 이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설희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설희의 아빠도 일을 했지만 우리 아빠와 달랐다. 새벽 일찍 출근을 하지 않고 아침에 같이 밥을 먹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퇴근이 늦는 것도 아니었다. 저녁 7시면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설희 아빠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우리 집은 반지하인지, 설희의 방보다 작은 곳에서 언니와 둘이 자야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주말의 아빠는 잠을 자느라 바빴다.


“미소야, 너 오늘 생일이더라?”


교실에 들어서자 민성이 사물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물함에 붙어있는 내 생년월일을 본 것이다.

우리 학교는 생일인 사람이 친구들을 집에 불러 생일파티를 했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부담스러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생일인 아이는 피자와 치킨 등의 음식을 준비했고 초대를 받은 아이들은 저마다 간소한 선물을 지참했다. 그것이 부담이라 며칠 전 민성이가 생일파티에 초대했을 때 집에 일찍 가야 된다며 거절을 했었다. 선물을 살 수가 없어서였다. 선물은 공책이나 지우개 등 비싸지 않는 선물이 주였지만 용돈이 없는 나에게는 무리였다.

생일이라는 말에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반색하며 모여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생일인 거 말 안했어?”


옆자리의 설희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생일이라고 말하지 않은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끝나고 미소네 가자!”


안 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친구들의 격한 반응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화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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