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어떤 특별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 세상을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들이 교회에도 모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일반 사회처럼 상호적이고 정상적인 연애, 상호적이지만 일탈적인 연애, 연애와 성추행의 모호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관계, 그리고 명백한 성범죄도 존재합니다.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교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거죠.
교회라는 곳은 어느 곳보다 CC(Church Couple 교회 커플)가 많은 곳입니다. 특정 연령대 거의 전원이 교회 내에서 성사된 결혼 커플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 주변은 모두가 친구이자 선후배 사이인 거죠. 그리고 은연중에 교회 내 커플들은 결혼 전후로 역할 모델로 삼는 선배가 있기 마련입니다. 또 그런 선배들도 상황이 비슷하다 보니 이심전심 교회 안에서 맺어진 후배 커플들을 적극적으로 멘토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 큰 계보를 형성하고 영향력 있는 모임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물이 좋은(?) 청년부를 찾아 결혼을 목적으로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는 결혼적령기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대기업에 취업하듯 결혼의 기대치도 한껏 높여 수준도 높고 믿음도 좋은 배우자를 찾는 것이 신앙적인 성취 과제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우수한 짝을 찾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인정받는 우수 인맥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혼이 완성되는 과정 전반에 교회 주요 관계자들에게 심리적 경제적 도움을 받게 됩니다.부채 의식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교회의 중요한 일꾼이 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출산을 하게 되면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라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고 친한 친구, 교회 선후배 자녀(손)들까지 평생 내 식구로 함께 성장합니다.
산업화, 도시화 이후 고전적인 마을공동체와 가장 흡사한 형태가 교회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요즘 같이 분주한 현대 사회에서 1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 1시간 이상 시간을 같이 보내고 1끼 이상의 식사를 함께 하는 인간관계는 흔치 않습니다. 친부모자식, 친인척도 이보다 정기적이고 끈끈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2.
그런데 교회 커플도 단번에 맺어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 사람인가?' '아니 아니지...그럼 저 사람인가?'
아무리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도 내 인생 배필이 누구인지 실제 연애가 진행되기 전까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인 거죠. 교회 역시 인기인이 있고 사랑의 짝대기가 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론은 장황한데 정작 실전에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관계에 미숙한 유형들도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목사가 맺어주고 기도 많이 하는 유력 장로 권사가 응원하고 축복한 커플도 이혼을 하고, 더 이상 얼굴을 들 수 없어 교회를 떠나고, 신앙보다 인간관계 비중이 컸던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자체를 떠나는 씁쓸한 경우도 많습니다.
연애에 실패하거나 나를 떠난 사람이 교회 안의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아이 낳는 모습을 같은 교회 안에서 지켜보는 건 일반적인 고통은 넘어서는 수준의 고통입니다. 게다가 나도 어찌어찌하다 교회 사람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끼리 같은 교회학교 친구로 지낸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지만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다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며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아, 눈물로, 간절히, 온갖 좋은 말로 기도하고 형제님 사랑합니다, 자매님 사랑합니다, 사랑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연애는 어렵고 후회하고 화가 나고 도망치고 싶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교회 안 연애는 신앙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3.
암투병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던 목사가 사실은 아내에게 폭언을 일삼는 독재자였습니다.
속사정을 아는 소수의 지인들은 그 목사의 카톡 프사를 보며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그 위선에 환멸의 심정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암에 걸린 건데...'
차마 입으로 내지 못했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 암투병 중이던 목사의 아내(사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목사의 카톡 프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녀들과 환하게 웃는 사진으로 교체되었고, 서너 달 뒤에는 독사진으로 바뀌더니, 부인이 세상 떠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재혼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카톡 프사로 올라온 재혼 대상은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사모보다 젊고 외모가 더 출중했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완벽한 실사판 간증 같았습니다.
아내 암투병 중에는 헌신적인 남편이었고,
아내 장례 후에는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간 아내를 위해 슬퍼하기보다 기뻐하며 살았고,
몇 개월 뒤 급속도로 하나님의 위로로 회복되어 말짱해진 뒤,
천국의 아내도 응원할 젊고 예쁜 새 '돕는 배필'을 얻어 남은 인생도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신앙 모범생...
지어낸 이야기보다 더 완벽했습니다.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서 이 목사가 무대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며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단 한 번도 축복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먼저 떠난 사모가 불쌍했고 두 번째 사모도 걱정이 됐습니다.
가장 지척에 있었던 이의 죽음과 어떤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결혼도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극에 지나가는 행인 1, 행인 2로 만드는, 너무나 이기적인 자기애를 기독교 신앙으로 교묘하게 합리화하는 모습에 넌덜머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명분, 또 명분,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완벽한 역할만 강조되고 가면과 연기가 강조될수록 현실의 폭군은 더욱 극명하게 존재감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 이중인격을 유지해주는 찰떡 도구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4.
야훼께서 욥과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즈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욥기 42:7/공동번역)
자비롭고 이해심이 한없으신 하나님께서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흥미롭지만 그 이유가 솔직하지 못한 신앙인들 때문이라는 것은 더 흥미롭습니다.
같은 구절을 여러 번역으로 비교해 보면, 솔직하지 못한 것은 진실하지 못하고 정당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차라리 위에 등장한 목사가 '나도 젊고 예쁜 여자와 새장가 가고 싶었다!'라고 이야기했으면 어땠을까요? 어차피 솔직해도 욕을 먹었을 것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철판을 깐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상처를 주는 그도 자신이 상처받고 거절당하는 것은 견딜 수 없기 때문이겠죠.
교회를 옮기며 차라리 이곳에는 이제 내가 만날 사람이 없으니 교회라도 옮겨서 나보다 잘 나고 훌륭한 사람을 만나 인생 업그레이드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솔직하지 않을까요? 거기 예배가 더 좋아서, 그곳에는 해외단기선교팀이 활성화되어 있고, 제자훈련을 제대로 시켜서 라는 이유가 아니라요...
일부 기독교인들은 왜 이리도 가장 욕망에 충실하면서 가장 욕망이 없는 사람들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가장 이타적이고 욕망을 비우는 훈련장이 되어야 할 교회공동체는 연애와 결혼을 통해 어느 곳보다 철저히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합리화의 전시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솔직하지 못한 이들에게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으시다는 하나님 입장이 십분 이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