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호떡 트레일러의 진실

범인은 도둑이 아닌 덴마크 경찰

by 김희욱

시장에서 날아온 계약 종료 통보


지난 1년, 매일 무거운 짐을 싣고 코펜하겐 거리를 떠돌아야 했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시장이라는 고정된 장소에서 손님들을 마주하는 것은 저희에게 더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시장에 발을 들인 고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호떡 자전거에 시선을 멈출 때의 설렘, 그리고 인사를 건네는 단골손님들의 재방문은 하루를 지탱하는 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시장 안에서 손님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배달프로젝트’의 가치를 증명해 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1년 동안 시장 내 동료 점주들과 안부를 묻고 시장의 일원이 되어간다는 만족감과 함께 이곳에서 다음 시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따뜻한 일상 속으로, 시장 매니저의 뜻밖의 메일 한 통이 날아들었습니다.


“내년에는 KOPAN과 계약 연장을 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단호했습니다. 유기농 시장의 컨셉과 기름에 호떡을 튀기는 자전거 노점의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방이 오픈된 공간에서 조리하는 모습이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실내외를 막론하고 단정한 시설을 갖춘 다른 점포들을 보며, 청결해 보이는 인상이야말로 이곳 시장이 고객과 소통하며 신뢰를 쌓는 가장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시장 내 호떡 자전거의 모습


호떡 자전거의 진화, 트레일러로의 과감한 전환


메일을 확인한 후, 저는 곧바로 매니저에게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계약종료 텍스트 너머의 진의를 확인하고, 어떻게든 이 소중한 자리를 지켜낼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주 앉은 매니저에게 저는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 제가 보완해야 할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매니저는 조리 공간의 위생적 보완과 유기농 시장에 걸맞은 외관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컨테이너를 제작하기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기에, 저는 자전거를 넘어선 대안으로 ‘푸드 트레일러’를 떠올렸습니다. 다음 시즌 계약까지 남은 시간은 촉박했습니다. 저는 한시가 급한 마음으로 온종일 중고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운명처럼 한 대의 트레일러를 찾아냈습니다.


KOPAN의 정체성과 시장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도록 중고 트레일러를 디자인하며 공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시장의 허가를 다시 받아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재입점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공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황당하고도 허무한 방식으로 사라지게 될 줄은, 그땐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중고 사이트에서 발견한 트레일러

꿈의 무게만큼 무거웠던 텅 빈 주차장


새로운 트레일러와 함께 기분 좋게 시즌을 마무리하고, 덴마크의 혹독한 겨울인 1월을 이용해 한 달간 한국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주차비를 아끼려 집 앞 주차장에 안전하게 세워둔 제 분신과도 같은 호떡 트레일러를 확인하려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어라...? 어디 갔지?"


있어야 할 자리에 트레일러가 없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 주변을 몇 바퀴나 돌았습니다. 덴마크는 CCTV가 흔치 않아 물어볼 곳도 없었습니다. 도둑이 가져갔나 싶어 3일 내내 자전거를 타고 동네 주변을 뒤졌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밤새 중고 거래 화면을 새로고침하며 보낸 날들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걷는 듯한 막막함의 연속이었습니다.

KOPAN 호떡 트레일러

범인은 도둑이 아닌 경찰


사건의 실마리는 실종 두 달 만에 만난 주택 관리자의 툭 던진 한마디로 풀렸습니다.


"아, 그 트레일러? 경찰이 견인해 갔어."


제가 휴가를 떠난 사이 경찰이 '번호판이 없다'는 이유로 제 트레일러를 불법 방치 차량으로 간주해 수거해 간 것이었습니다. 번호판을 트레일러 안에 넣어둔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경찰은 주택 관리자에게 고지서를 맡겼다는데,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전달이 누락된 것이었습니다.


'도둑이 아닌 경찰이 가져갔다면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경찰서에서 들려온 대답은 제 가슴을 무너뜨렸습니다.


"수거해 간 트레일러는 이미 폐기 처분되었습니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고철로 분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유지 주차장이었다는 점과 트레일러 외관에 회사이름과 등록번호 정보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여러 번이나 컴플레인을 했지만, 경찰은 보상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어렵게 구하고 페인트칠까지 새로 했던 제 ‘꿈의 마차’는 그렇게 한 줌의 고철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상실의 폐허 위에서 배운 협상의 기술


상심에 젖어 있을 시간조차 사치였습니다. 시장 오픈 날짜에 맞추어 다시 한번 급하게 트레일러를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한 가운데 트레일러를 구입하려다 보니 중고사이트에 올라온 매물 들은 가격조건에 상관없이 무조건 보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조급함을 감추기 위해 여유로운 덴마크 친구와 동행했습니다. 마음에 쏙 드는 트레일러를 발견했지만, 예상보다 높게 책정된 가격 앞에 속이 타들어 가는 간절함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철저히 감정을 지워낸 무심한 표정으로 매물을 살피며 매물을 살폈습니다. 비즈니스 협상에서 주도권은 결국 더 아쉬울 게 없어 보이는 사람, 즉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트레일러를 둘러본 후 "시설은 괜찮지만 제가 생각한 예산과는 차이가 크네요"라며 협상의 여지를 열어두었습니다.


그러자 제 의중을 살피던 주인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습니다. 중고 사이트에는 아직 올리지 않은 또 다른 매물이 있다며 다른 트레일러를 보여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처음 보았던 것보다 관리 상태와 조리 시설이 훨씬 훌륭한 트레일러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처음 보았던 매물보다 더 좋은 조건의 트레일러를 오히려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경험은 마치 예측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와 같았습니다. 시장 퇴출 위기를 넘기자마자 전 재산이었던 트레일러가 폐기되는 극단적인 고저를 겪으며, 저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가파른 절망의 구간은 저에게 현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 가장 혹독하고도 값진 수업이 되었습니다.


텅 빈 주차장에서 시작된 그 혹독한 겨울을 지나며, 새롭게 마련한 중고 트레일러와 함께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KOPAN 트레일러 2.0 버전

tvN '국경 없는 포차'에 소개된 KOPAN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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