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된 응원과 가공되지 않은 잔소리 사이, 댓글을 통해 본 부모님의 마음
2015년 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코펜하겐의 매서운 바람을 뚫고 호떡 노점 영업을 마쳤습니다. 온종일 몸에 밴 기름 냄새를 씻어내고 겨우 한숨 돌리려던 찰나, 침대에 누워 무심코 연 노트북 화면에는 낯선 발신인의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보낸 이는 KBS 다큐멘터리 <다큐 공감> 제작진이었습니다. 덴마크에서 호떡 장사를 하는 한국 청년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담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인연의 시작은 아주 우연한 곳에 있었습니다. 당시 방송국 PD님이 유럽 배낭여행 카페를 훑어보다가 “코펜하겐 길거리에 호떡 파는 청년이 있다” 는 짧은 글을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마침 한국 사회는 세월호 사건 이후 깊은 슬픔과 경제 침체에 빠져 있었고, 제작진은 절망한 한국 청년들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줄 수 있는 해외 창업 사례를 절실히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진행하던 ‘행복배달프로젝트’를 한국에 알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제목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아들, 힘내!> 다큐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타지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응원하는 ‘어머니’의 존재가 다큐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덴마크까지 유학을 간 자식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길거리에서 호떡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제대로 알려드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작가님이 여러 번 전화를 드려 어머니의 출연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어머니의 정중히 거절했고 후에 어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희욱아, 엄마는 네가 미디어에 이용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방송에 나가는 게 너에게 정말 도움이 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방송에 조금이라도 출연할 마음이 없으니, 너는 네 길을 현명하게 판단해서 결정하렴."
어머니의 거절은 단순한 거부라기보다 방송에서 소비되다 잊히는 일회성 소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단호한 경계심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출연 확답을 받지 못한 채 촬영팀이 덴마크에 도착했습니다.
촬영을 위해 코펜하겐에 오신 PD님은 이미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다른 출연자들을 찍고 오신 상태였습니다. 피디님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 들은 다른 출연자들의 면면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저력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한 명은 ‘공부의 신’ 강성태 씨의 친동생으로 이미 직원이 여럿인 규모 있는 사업가였고, 다른 팀은 한국의 진동벨 시스템을 중국 시장에 소개하며 영업을 뛰며 확장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제 길을 걸어왔다고 자부했는데, 그들의 화려한 이력 앞에서는 제 모습이 새삼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시스템도 직원도 없이 오로지 몸으로 부딪히는 제 방식이 방송이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비칠지,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제 고민을 털어놓자, 묵묵히 카메라를 들고 제 일상을 쫓던 PD님이 의외의 말을 건넸습니다.
“희욱 씨, 물론 다른 나라 창업가들도 대단하지만, 지금 거리 위에서 하고 있는 도전을 보게 될 시청자들은 훨씬 더 깊은 생동감과 용기를 얻을 겁니다.”
그때는 그 말이 칭찬인지 격려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방송이 나간 뒤에야 알았습니다. 덴마크 편이 전체 분량 중 가장 컸던 이유, 그리고 다큐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짠함’ 속에 담긴 진정성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어머니의 출연이 끝내 무산되자 제작진은 아버지를 ‘대타’로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방송의 인위적인 연출이 싫어, 아버지께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전화를 걸었습니다. 평소 아버지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대참사였습니다.
"아니, 그래서 그 호떡 장사는 언제까지 할 거야? 박사 과정은 언제 시작할 거니? 너도 나이가 있는데 앞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야지 "
응원보다 매서운 잔소리가 쏟아지자 당황한 PD님은 급히 전화를 끊으라는 수신호를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노점에서 장사하는 아들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그 진심은 확인했지만, 다큐멘터리의 기획 의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냉혹한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다시 전화를 걸어 지금 이 모든 대화가 촬영 중임을 실토해야 했습니다. 수화기 너머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아버지는 “라이브 방송은 아니지?”라고 물으시며 몹시 당황해하셨습니다. 아들에게 핀잔을 주던 조금 전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내 헛기침을 몇 번 하시더니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두 번째 통화에서야 비로소 “아들아,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다. 아빠는 항상 너를 믿고 응원한다”는, 다분히 방송용인 교과서적인 멘트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실제 방영된 영상입니다. 편집의 힘을 빌려 첫 번째 통화의 솔직한 걱정과 두 번째 통화의 다정한 응원이 절묘하게 섞여 나갔죠. 시청자들은 모를 테지만, 그 편집된 음성 사이에는 아들이 안정적인 길을 걷길 바라는 부모님의 해묵은 갈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믿어줄 수밖에 없는 부모의 사랑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방송은 하루 수익 20만 원을 벌고, 마지막 장면에서 호떡 가게 앞에 가득 늘어선 손님들의 줄을 비추며 희망찬 '성공 신화'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진 뒤의 삶은 여전히 시리고 고달팠습니다.
하루에 호떡 10개도 못 팔아 허탕을 치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비바람이 치는 날이면 노점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 때문에 달궈진 판에 팔을 데이며 화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퇴근 후 호떡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도로를 달릴 때, 술 취한 취객들이 호떡 자전거를 쳐다보며 던지는 비아냥거림을 미소로 넘겨야 했던 치욕스러운 순간들은 당연히 방송에서 삭제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가장 알리고 싶었던 '행복배달프로젝트'의 취지보다는 '석사 졸업한 청년의 낯선 일탈'이라는 프레임이 더 부각된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본 방송이 나가고 유튜브에 영상이 공개되자, 다행히 대다수의 분들은 타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저를 뜨겁게 응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응원 속에서도 가슴을 후벼 파는 비수들은 존재했습니다.
“부모님 피눈물 나게 할 짓이다”, "대학원까지 나와서 왜 저러고 사냐" “공부한 돈이 아깝다”는 글들을 마주하며, 저는 다시 한번 출연을 한사코 거절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곱씹었습니다. 덴마크에서 하고 일의 형태가 미디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그저 가벼운 얘깃거리로 소비되거나, 차가운 품평회 위에 올려져 상처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방송 출연을 제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기억합니다. 방송 덕분에 유명세를 탄 것보다 더 값진 것은, 제가 하는 일이 단순한 장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될 수 있음을 대중의 목소리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는 비록 박사 학위 수여식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들이 낯선 땅에서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걸고 살아가는 모습을 TV라는 공신력 있는 매체를 통해 보여드림으로써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초심이 흔들릴 때면 10년 전 그 영상을 찾아봅니다. 거기엔 서툰 손놀림으로 호떡을 뒤집으며, 사람들의 웃음을 보며 진심으로 행복해하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응원의 댓글도, 따가운 비난도 모두 제가 살아있음을 알려준 고마운 흔적이었습니다. 이 일기장은 제게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호떡 하나에 담았던 '행복'이라는 가치를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해 나가는, 새로운 도전의 나침반이 되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툰 청년의 도전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빚어내기 위해 밤낮없이 애써주신 황작가님과 PD님, 그리고 모든 제작진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