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소설, 김연수
[버지니아 울프를 만났다, 조경란]
나는 거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은 희미한 회색 색연필을 쥐고는 동그란 원들이 얽혀 있는 패턴이 인쇄된 방바닥을 칠하고 있었다. 내가 원과 삼각형, 사각형을 그린 그림을 내밀었을 때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난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할머니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그림을 도로 집어 맨 처음에 그린 원 하나만 남기곤 그 옆에 있던 세모와 네모를 지우개로 쓱쓱 지웠다. 그리고 처음에 그렸던 동그라미 옆에 나란히 제각각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원을 더 그렸다. 두 번째 원은 노란색 크레파스로 칠했고 세 번째 원은 마블 느낌이 나도록 초록색과 보라색을 뒤섞어 칠했다. 마지막 원에는 중간에 둥근 띠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자, 봐 할머니. 나를 지구라고 치자. 나는 맨 처음에 연필로 그린 원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게 나야. 그 옆에 이 노란색은 화성이겠지. 그 옆은 목성일 테고, 그 옆에 띠를 두른 건 토성. 지구랑 가장 가깝게 붙어 있는 이 노란색 화성이 바로 할머니야. 나는 모처럼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한 것 같아 약간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화성 안으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지금은, 우는 할머니도 볼 수가 없다. 나는 플리니의 방바닥에 그려져 있는 여러 개의 원을 색칠했다. 떠나는데 아무것도 줄게 없어서 동그라미 하나를 유독 진하게 색칠하고는 너는 나의 토성이야 소냐, 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럴싸하게 띠를 그려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나의 책. 아직 씌어지진 않았지만 이렇게 읊조릴 때마다 안도가 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만약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그냥 빈 종이로만 남을 것이다. 이제 원하는 게 생겼으니 늦어도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나는 나의 지난 여름과 할머니와 소냐,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에게 작별 인사를 할 요량으로 창밖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곤 아우우, 아우우, 짐짓 구슬프게 우는 시늉을 해본다.
[이에 대한 김연수 작가의 글]
지구의 옆에는 화성이 있고, 금요일의 옆에는 토요일이 있고, 편의점에 갔더니 레종의 옆에는 던힐이 있더군요. 공원에 갔더니 메타세콰이아의 옆에는 느티나무가 있고, 책꽂이를 보니 시집 <사무원>의 옆에는 과학책 <여섯 개의 수>가 있고, 창밖을 보니 바람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흔들리는 나뭇잎이.....아마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찬사는 "내 옆에는 네가 있어"라는 말이 아닐까요. 방바닥에 태양계의 그림을 그리든, 공원을 걸어가면서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리내어 말하든, 그게 아니라면 지금 창밖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가리키든, 어떤 식으로든 "마찬가지로 지금 내 옆에는 네가 있어"라고 말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세요. 그게 "내가 레종이라면 너는 그 옆에 진열된 던힐이야"처럼 웃긴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우는 할머니마저도 볼 수 없게 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