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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생활 Mar 29. 2016

컴컴한 동굴 집의 움직이는 사진, 영화가 되다.


 저녁에 한 컴컴한 동굴 집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벽에서 광선이 비치며 사람이 다니고, 말이 달리고, 남녀가 연극을 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하는데 천태만상으로 실제 움직이는 것과 똑같다. 기이하다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화첩을 거울에 비춰 전기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 하나 그 이치는 알 수가 없다.( 1896년 6월 17일 맑음, 바람이 참)

 - 민영환 ‘해천추범’ 중에서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고종의 사신으로 참석하게 된 조선 시대의 문신 민영환이 쓴 기행문의 일부이다. 민영환은 수행원 김득련, 윤치호 등 5명의 사절단과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와 미국을 경유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등을 거쳐 러시아로 간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인 셈인데 러시아의 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본 소감을 남긴 글이다.


그에게 120년 전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극장은 ‘컴컴한 동굴 집’이었고, 영화를 처음 본 느낌은 ‘기이함’ 이었다. 민영환과 사절단은 최초 세계일주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영화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라는 기록도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영화, 에디슨 또는 뤼미에르 형제


영화는 원래 ‘움직이는 사진’을 의미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영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활동사진’이라고 불렸다. 여러 장의 연속된 사진을 규칙적인 속도로 보여주면 우리 눈은 1장의 개별 사진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움직임, 즉 동영상으로 느끼게 된다.


이것은 잔상 효과 때문에 생기는데 연속된 사진을 빠르게 보면 우리 눈의 망막에 앞서 본 사진의 이미지가 남아 있고 다음 사진이 보일 때 이게 겹쳐지면서 끊김 없이 이어져 보이는 것이다. 움직이는 사진에서 기인한 ‘활동사진’이라는 이름은 이런 기본 원리에서 나온 이름이다.


영화는 영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순수한 기능에 중점을 두느냐, 아니면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관람하는 것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처음 영화를 만든 사람과 최초의 영사기가 달라진다.


1889년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은 짧은 동영상을 찍을 수 있는 ‘키네토그래프’라는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라는 영사기를 만든다. ‘키네토스코프’는 조그만 구멍에 눈을 대면 1초에 46장 정도의 사진이 지나가 30초 정도의 움직이는 영상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기계로 한 사람만 볼 수 있었다. 권투, 서커스, 동물의 움직임 같은 짧은 영상을 동전을 넣고 보는 것이었는데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에디슨은 키네토그래프에 축음기를 결합시켜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장치인 '키네토폰'도 만들었는데, 배경음악을 같이 듣는 정도의 수준이라 유성영화로 보기는 힘들다.


키네토폰, 짧은 배경음악을 들을 수 있었지만 혼자만 볼수 있다


1895년 프랑스에서 사진 회사를 운영하던 뤼미에르 형제는 에디슨의 발명품을 참고하고 더 발전시켜 ‘시네마토그래프’를 만든다. 시네마토그래프는 영화 카메라 겸 영사기로 에디슨이 만든 영사기와 가장 큰 차이는 여러 사람이 큰 화면에서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다. 1895년 2월 13일 뤼미에르 형제는 이 기술에 특허를 내고 3월부터 영화를 촬영한다. 제일 처음 찍은 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라는 제목의 46초짜리 동영상이다. 필름 길이가 약 17m에 달했는데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았고, 3월 22일 프랑스 국립산업진흥협회에서 무료 상영된다.


뤼메에르 형재가 만든 일체형 영사기 시네마토그래프


뤼미에르 형제는 그 해 총 10편의 영화를 찍고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상영을 한다. 1프랑의 입장료에 33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물 뿌리는 정원사와 이를 방해하는 꼬마의 모습이 담긴 ‘정원사’(49초), 뤼미에르 부부와 딸의 식사 장면이 담긴 ‘아이의 아침식사’(41초)처럼 단순한 일상을 담은 1분 미만의 영상 10편이 상영되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곧 큰 인기를 얻어 하루에 2500명 정도의 관객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좀 과장이 섞였겠지만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1896년 1월 25일에 상영된 ‘열차의 도착’은 큰 화면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모습에 놀란 관객들이 소리를 지르며 숨고 더 놀란 사람은 자리에서 뛰쳐나갔다고 한다.


먼 곳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담은 '기차의 도착',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산업혁명과 영화의 발전


방적기계, 증기기관, 철도 등 180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노동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농사를 짓던 사람이 공장의 노동자가 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대도시가 생기고 인구가 급증한다. 하지만 기존에 여러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며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낮아져 많은 사람들이 궁핍하게 생활한다.


또 어른뿐 아니라 10~15세의 청소년까지 저임금의 고된 노동에 시달렸는데, 공장에서 하루 최소 12시간 혹은 2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급기야 영국에서는 1847년에 1일 노동 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1838년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도 산업혁명 시기 고아 소년의 삶을 다룬 이야기로 노동자들과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산업혁명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인 1800년대 말에 시작되어 1900년대 초반까지 여러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점점 발전해 나간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만들어 낸 대도시 속 노동자들의 삶을 위로해주는 여가 문화로 자리 잡는다.


19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영화사의 주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멜리에스는 1902년 13분짜리인 최초의 공상과학 영화 ‘달나라 여행’을 만들었고, 최초의 장편 영화는 70분짜리로 1906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제작된 ‘캘리 갱 이야기’이다. 최초의 유성영화는 1927년 제작된 워너브라더스의 ‘재즈싱어’이고, 처음 만들어진 3 원색을 사용한 컬러 영화는 1932년 제작된 디즈니의 8분짜리 애니메이션 ‘꽃과 나무’이다.



한국 최초의 영화는?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간 김득련은 러시아에서 영화를 보고 '전기희영관'이라는 한시도 남겼다.


거울 사이로 그림을 비추어 번개처럼 열리니, 그림자를 옮겨 유리벽 위로 보내었네.
사람이 능히 춤을 추고 차가 능히 갈 수 있으니, 활동하는 것이 참으로 오가는 것 같구나.


1896년 러시아에서 영화를 본 민영환과 사절단 말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건 언제일까?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1897년 조선연초주식회사가 담배 홍보를 위해 서울 진고개에서 3일간 영화를 상영했다는 것, 1899년 미국인 여행가이자 사진작가인 버튼 홈스가 본인이 가지고 다니던 영사기로 고종 황제 앞에서 상영했다는 이야기다.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영화 관련 내용은 1903년 6월 23일 황성신문의 영화 상영 광고다. 동대문 한성전기회사의 기계 창고에서 입장료 10전을 내면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활동사진(영화)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기계 창고는 1907년 5월에 ‘광무대’로 이름을 바꿔 영화와 춤을 공연하는 극장이 되었고, 1907년 6월에는 종로에 ‘단성사’가 세워져 2011년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우리 손으로 만들어진 초기 형태의 영화는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1919년에 만든 ‘의리적 구투’이다. 재산을 노리는 계모 이야기로 연극으로 진행되면서 필요한 때 중간에 영상이 들어가는 형태라 완전한 영화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1923년 1월 13일에 상영된 ‘국경’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감독과 촬영이 일본인이라 이것 역시 온전한 최초의 한국 영화라고 하기도 힘들다. 1923년 4월 9일 개봉한 ‘월하의 맹세’는저축을 장려하는 계몽 영화로 당시 돈 5만원의 제작비와 20여 명의 배우가 출연했으며 각본, 감독, 연기를 모두 한국 사람이 한 것이다. 이어 1935년에는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이 제작되었다.



활동사진 구경할 때 주의사항


영화는 서구 사회에서도 산업혁명, 미국의 대공황처럼 살기 힘든 시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좋은 구경거리이자 문화생활이 되어 주었고, 1920년대부터는 할리우드가 영화 산업의 발원지가 되면서 영화가 세계적으로 전파된다. 우리나라 역시 암울한 일제 시대에 영화가 그래도 마음을 달래주는 좋은 오락거리로 인기를 끌게 된다.


‘춘향전’ 같은 경우 당시 50전이던 요금을 1원으로 올려 받아도 관객들이 구름처럼 왔다고 한다. 이 무렵 극장과 영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의사항’들이 있었는데 잡지에 광고처럼 내보내거나 극장 앞에 적어두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키스하는 장면이 나와도 흥분하지 마시오. 배우들은 키스 한 뒤에 반드시 양치질을 한답니다.

-. 굉장한 물건이나 화려한 실내가 나와도 결코 놀라지 마시오. 사실은 책상 위에 만들어 놓은  조그만 장난감이랍니다.

-. 여배우나 남배우에게 속없이 미치지 마시오. 그네들은 아들, 딸, 손자까지 있고 본 얼굴은 주근깨 투성이랍니다.

-. 자막의 영어를 열심히 읽지 마시오. 영어 문법에 낙제점수 당하십니다.


‘여배우나 남배우에게 속없이 미치지 마시오’라는 주의사항은 지금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데, 영화는 예부터 지금까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좋은 친구로 우리와 함께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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