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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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이야기는 이제 내게 딱히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저런 사건들은 먼지가 되어버렸고, 그 먼지가 쌓인 곳에서 풀이 몇 포기 자랐다. 그 풀에서 피어난 꽃 무더기, 어쩌면 그 향기만이 허공에 떠다닐 뿐이지만, 거기서 생겨난 질문 혹은 생각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나는, 어릴 때 나는, 내가, 내 경우에는 말이야.. 어릴 적 일기장의 모든 말머리가 그랬듯, 내가 쓰는 모든 글머리는 나로 시작했다. 그런데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말을 하니 그 말이 부러웠다. 나는 아직도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일인칭에서 벗어나려면 시선을 어떻게 확장해야 하는 걸까. 좁은 방구석에서 엉덩이 털고 일어나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방향의 움직임을 찾아보기로 한다. 하도 죽치고 앉아있었더니 바닥이 맨질맨질하다.
요즘 들어 목구멍에 뭔가가 턱- 막힌듯한 느낌이 있다. 여기저기 온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이야기도 쉽게 내뱉지 못해서 일거란 생각을 해본다. 애초에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것도 있지만, 내 생각과 의견을 정리해 말하는 게 여전히 어렵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는 뭐든 유창하게, 매끄럽게 이야기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이 있어 음- 하고 시간을 끄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가깝지 않은 관계에서는 특히나 내 생각과 의견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도 있다. 그러니 그냥 생각 없이 뱉어도 될 말을 ‘굳이-‘ 하며 자꾸만 삼키고, 그것들이 목구멍에 자꾸 쌓이나 보다. 예전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와 같은 이야기를 뱉어냈다면 이제는 그냥 쓰자.라고 나에게 말해준다. 부정이던 긍정이던, 노트에 쓰던 여기에 쓰던, 누가 읽던 말던, 뭐라 하든 말든 단 몇 자라도 써보자고. 그럼 차차 가벼워지겠지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