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둘 누나 둘
정민의 동네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네댓 명은 있었고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나 삼촌이 같이 사는 집이 태반이었다. 이른바 대가족 시대였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출산율이 6명에 이르자 정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며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장에서 불임 수술을 조건으로 훈련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이런 근시안적인 인구 정책은 결국에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 사회에 돌아왔다. 이제 대한민국은 2024년 기준 출산율 0.75명이라는 세계 신기록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중국이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인도가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이유도 인구가 주요 원동력이라고 한다. 또한, 베트남, 필리핀 같은 동남아 국가들의 거리에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넘쳐나는 모습을 보면, 전체 인구의 1/5이 65세 이상 노인이 된 대한민국의 미래 국가 경쟁력이 우려되기도 한다.
대가족 시대, 정민에게는 형 둘과 누나 둘이 있었다. 부모님까지 총 일곱 식구가 한 집에 모여 살았다. 그 시절 가장 평균적인 가구 구성이다.
정민의 형들은 상업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자식을 고등학교까지 가르친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부모님의 희생은 그만큼 더 컸을 것이다. 지금도 은행원이 억대 연봉을 자랑하는 선호도 높은 직업이지만, 그때 역시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하면 중산층에 가까운 삶이 보장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직업 경로가 형들을 둘러싼 제반 여건을 감안할 때 최상의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형들은 그 길을 가지 못했다.
오히려 대학에 보내주지 않았다고 부모를 탓하던 큰형은 무슨 세제류 판매 대리점을 하겠다며 창업 자금을 요구했다.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하던 농촌 살림에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집 팔고 논 팔아서 사업 자금을 대줄 수 없었던 부모님과 이에 불만을 품은 형 사이의 갈등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적잖은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결국 부모님께서는 어렵게 빚을 내어 쌀 100가마니를 형의 사업 자금으로 제공해 주었다.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2천만 원 정도에 해당하는 그 돈은 집안의 기둥뿌리가 휘청할 정도로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형은 어느 날 모든 것을 접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그간 연락 한 번 없던 형이 결혼할 사람이라며 형수를 데리고 나타났다. 형수는 단박에 부모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이든 잘 먹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좋다며 후한 점수를 받았다. 그 호감에는 형수와 함께 형이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소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정민에게도 '서울 형수'는 합격이었다.
훗날 정민은 대학에 입학해서 반년 정도 형 집에 얹혀살았다. 형수는 재봉틀로 옷을 만드는 기술자였다. 처음에는 재봉틀이 열 대가 넘고 직공들 여럿이 들락거릴 정도로 돈을 잘 벌었다. 중간에서 주문을 받아다 주고 완성된 옷의 납품을 대행해 주던 사람이 모든 것을 들고 사라져 버리기 전까지는.
형은 형수를 원망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형수는 이혼을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잘못 끼운 첫 단추를 바로잡을 기회가 형에게 다시는 오지 않았다. 누구보다 똑똑했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고 세상과 타협하지 못했다. 결국, 마음속에 가득한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형과 재혼했던 두 번째 형수는 형의 장례식 이후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거두어 떠났고 다시는 정민과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던 원래 형수는 조카들 덕분에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제야 정민은 '삼촌'하고 부르는 형수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
그 시절 맏딸은 맏이와 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고, 나이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이른바 '살림 밑천'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했다. 바로 정민의 큰누나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형들과 달리 누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낯선 타향 서울을 향해 혈혈단신 상경했고 이른바 '직공 노동자'로 돈을 벌었다.
누나처럼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가난한 농촌을 벗어나고자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단칸방조차 얻지 못한 이들이 서울역과 청계천 일대에 모여 살게 되면서 이 지역에는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정부와 서울시는 이들을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닌, 치워 버려야 하는 존재로 취급하였다. 그런 그릇된 행태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광주 대단지 사건'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땅과 집, 일자리를 주겠다며 1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을 군용 트럭에 태워 서울 동남부 외곽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사람들은 군용 텐트 한 개씩을 달랑 받아 들고 허허벌판에 서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서울시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초 토지 분양 대금 보다 오른 가격을 제시하며 기한 내 납부하지 않으면 강제 퇴거시키겠다고 겁박하였다. 이에 그동안 분노가 쌓여 있던 주민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놀란 정부와 서울시는 광주 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고 주민의 요구 사항을 대부분 수용한다고 발표하여 난리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결국 이 일대는 복부인들의 투기 처로 변하였고 대부분 주민은 딱지를 팔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성남시는 2021년 50주년을 맞이하여 이날의 난리를 8.10 성남 민권운동이라고 명명했다.
다행히 정민의 누나는 공장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이런 시대적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누나는 마찬가지로 대가족의 장남이었던 매형과 결혼함으로써 비로소 직공 노동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나는 봄이면 사방에 하얀 배꽃이 만발하던 서울 외곽지역에 살았다. 형이 사업 실패로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자 정민은 부득이 형 집을 떠나 누나의 시집살이에 숟가락을 얹게 되었다. 누나는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 남편, 아들 셋, 게다가 친정 동생까지 총 10명의 대가족을 부양하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가사를 도맡아야 했다.
수동으로 펌프질해서 물을 받아 썼고, 새벽이면 잠을 설쳐가며 방마다 연탄을 갈아야 했으며, 하루 세끼를 숨 돌릴 틈도 없이 차려내야 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어떻게 그런 모진 생활을 버티고 견디어 냈을까. 어느 늦은 밤, 낯선 흐느낌에 잠을 깬 정민은 부엌 한구석에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누나의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 그랬다. 누나는 원더우먼이 아니었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그리고 혹독한 가사 노동의 후유증으로 지금 누나의 별명은 종합병원이 되었다.
동생이 형의 집을 방문하면서 썩은 고기를 가져간다? 나쁜 마음을 먹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어떤 이유로 쌓인 감정이 있었다면, 의도치 않은 단순한 실수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한번 고개를 쳐든 불신의 싹은 순식간에 한여름 잡초처럼 무성해져 종국에는 관계를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다.
섣달그믐날이면 노란 대봉투에 담긴 통닭을 사 들고 와 가족 송년회를 소집하던 작은형은 다정다감하고 부모님을 잘 챙기는 편이었다. 생활력 또한 강해서 형을 보면 항상 듬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은 결혼하고 나서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부모님과 형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젊은 형수가 시골에서 늙은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댁 식구들에 대한 사소한 불만들은 형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형의 부모님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고 급기야 분가를 단행하였다.
한 번은 정민이 부모님을 뵈러 내려간 길에 조카들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싶어서 형 집에 들르기로 했다. 작은형은 부모님 댁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형수 그리고 조카 둘과 살고 있었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샀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들고 간 고기를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 두고 서둘러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신경 쓰였지만, 곧 누군가 들어오겠지 했다. 지금처럼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개인 통신 장비가 없었기에 이런 사실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져 버렸다. 바깥 날씨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날따라 형 가족들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그 탓에 현관에 걸어둔 고기가 그만 상해버렸다. 이 일은 '썩은 고기 파동'으로 확산하였고, 형과 정민 사이에는 오해의 골이 깊어지고 말았다.
정민이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작은형은 상고를 졸업했지만 큰형과 마찬가지로 바라던 은행에 취업하지 못하였다. 입대를 기다리던 형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청료 징수 같은 소소한 일을 하기도 하고, 전라북도 이리에 있는 공장에 임시직으로 취업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생겼다.
"오늘 오후 9시 15분경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 소속의 화물 열차가 이리역에서 폭발하였습니다."
아직 형이 돌아오지 않고 있던 늦은 시간, 방송에서는 이리역에서 엄청난 폭발 사건이 일어났음을 반복적으로 알리고 있었다. 이리는 작은 소도시였으므로 형이 일하는 공장은 폭발사고가 일어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을 터였다.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한국화약 호송 직원이 정차하지 않고 이리역을 통과하려고 했으나, 이리역 직원들이 '급행료'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관행적으로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바로 통과하려면 역에 돈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지불할 돈이 없어 열차는 이리역에 발이 묶였다. 그날 밤 호송 직원이 술을 마시고, 추위를 피하고자 촛불을 켜두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이 사고로 사망자 59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희생자에 대한 추모나 사고의 원인 규명보다, 무명이었던 희극인 故 이주일이 가수 하춘화를 극적으로 구출한 이야기가 더 세간에 오르내렸다. 어떤 이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이 된 재앙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걱정과는 달리 정민의 형은 이 사고와 관련하여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고 무사히 귀가했다. 그날 밤늦게 형이 돌아올 때까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발을 동동 구르며 대문을 눈이 빠지게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이 온갖 끔찍한 상상을 하던 그 시간, 정작 당사자인 형은 사고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정민과 작은형은 네 살, 작은누나는 두 살 차이가 난다. 큰형, 큰누나가 어른 축에 속했다면, 작은형과 작은누나는 진짜 형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누나는 같이 고교 시절을 보냈던 만큼 정민과 각별한 사이였다. 누나는 소신이 뚜렷한 성격이었으며 뭐든 항상 빚어 놓은 듯 명확한 걸 좋아했다.
아궁이를 떠나 굴뚝으로 나온 연기가 붉게 물든 하늘 위로 산산이 흩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ㅇㅇ은행에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하던 누나가 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일만 열심히 하는 줄 알았던 누나가 어느새 연애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벚꽃이 만발한 어느 날, 둘은 결혼을 했다. 이후 매형은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둘의 아버지가 되었다.
매형은 본가는 물론 처가에도 매우 헌신적인 분이다. 특히, 정민의 부모님께서 병으로 쓰러지셨을 때는 친자식보다 더 정성껏 보살펴 드렸다. 서울에 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가뭄에 콩 나듯 코빼기를 디밀던 다른 자식들하고는 달랐다. 정민이 보기에 아버지와 매형은 마치 사이좋은 친부모와 자식 같았다. 마찬가지로 정민에게 매형은 친형보다 더 형 같은 사람이다. 매형은 교사로 정년퇴직하였고 지금은 작은 농막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밤 농장과 벌을 기르면서 살고 있다.
형 둘, 누나 둘 그리고 부모님. 정민은 그렇게 대가족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나 대가족 시대의 강력한 안티테제는 성장과 변화였다. 물질적 빈곤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달라졌다. 지금은 이미 핵가족 시대를 벗어나 1인 가구의 시대의 한복판에 있다.
2024년 기준 대한민국의 1인 가구는 약 1,000만 가구를 돌파했다.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40%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독사 같은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세상에 다 좋거나, 다 나쁜 것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가끔은 그 시절, 대가족 시대의 수많았던 애환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 누구보다 고단했을 부모님의 삶이 기억날 때마다 정민은 온 마음을 다해 그 숭고한 희생에 감사하며 머리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