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하고 싶어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어.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정민이 중학교에 다닐 무렵 이런 노래가 유행이었다. 형 방에 몰래 들어가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주로 이런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1970년대에는 포크와 록 음악이 대세를 이루었다. 청년들은 군사정권과 유신체제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저항하며 음악을 통해 자유와 열정을 표현했다. 경제 성장과 라디오, TV 등 대중 매체가 발전하면서 음악이 대중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영향도 있었다.
그런데 유독 1975년 연말 가요대전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시상식 직전에 터진 대마초 파동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들이 모조리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이들이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여 줄줄이 끌려가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문화적 가치관의 대변혁은 대중음악뿐만이 아니었다. 길이가 무릎 위로 올라가는 짧은 치마나 머리가 귀를 덮는 긴 머리 같은 새로운 시도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퇴폐풍조를 근절한다는 이유로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하였다. 경찰이 시민의 치마 길이와 두발 길이를 측정하는 진풍경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정민은 형들 덕분에 만화, 무협지, 가요 같은 대중문화의 접촉이 빨랐다. 30분 정도 걸리는 등하굣길에는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곡인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중학생인 정민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마을을 관통하여 이웃 지역으로 향하는 그 등하굣길은 이름만 신작로(新作路)였지 희뿌연 먼지가 휘날리는 자갈길이었다. 그나마 길 양옆으로 늦여름부터 피기 시작하는 코스모스가 정민의 콧노래에 흔들흔들 장단을 맞춰주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는 이 길을 따라가며 코스모스 씨를 받으러 다녔다. 편지 봉투에 가득 담아 제출하는 것이 숙제였다.
학교의 교문으로 들어서는 길 양옆에는 각각 작은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하나씩 있는데 거기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교문을 통과하면 울타리 대신 키 높은 나무가 둘러싼 운동장이 나왔고, 운동장에서 높은 계단 몇 개를 올라서면 교실이 들어찬 삼 층 건물 여러 개가 있었다. 쉬는 시간 건물 옥상에 올라서면 멀리 철길을 따라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한 반에 학생 수가 60명 정도였고 한 학년에 12개 반이 있었으니 전교 학생 수가 개략 2,000명이 넘었다. 매월 한 번씩 교장 선생님께서 훈화 말씀을 하시는 조회가 열렸는데 이런 날이면 까만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학생들이 겨울 들판의 까마귀 떼처럼 운동장에 가득했다.
교복은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상의에는 금색 단추가 달려있고 카쿠란 방식의 딱딱한 카라에 후크를 채우게 되어 있어 목이 항상 갑갑했다. 이 후크를 채웠는지 여부가 모범생과 불량학생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침 좀 뱉는' 친구들은 영화에서처럼 후크와 단추 한두 개를 풀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정민은 중학생이 되면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실 국민학교 때는 산으로 들로 아이들과 놀러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중학교에 처음 입학해서는 적응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2학년에 올라가 김해영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나면서 학교생활에 안정을 찾았다.
김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서는 선생님의 모습은 단번에 정민을 눈길을 사로잡았다. 작은 키에 마른 체형이었고 끝이 찰랑거리는 굵은 웨이브의 긴 머리를 하고 다녔다. 얼굴빛은 맑고 투명해 보였으며 선생님에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무릎 위까지 올라가는 짧은 치마에 타이트한 느낌의 정장 스타일 재킷을 즐겨 입었다.
국민학교 때 좋아하던 여선생님께서 화장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다시는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그새 생각이 바뀌었다. 선생님께서 숙제 검사를 하느라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공책에 도장을 찍고 있을 때, 선생님의 뒷모습을 힐끗거리며 킥킥대는 녀석들을 보면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선생님은 첫날 교실에 들어오셔서 정민을 반장으로 지목하였다. 그리고는 '반대하는 사람 없지?' 하는 한마디로 결정해 버렸다. 당시에는 반장이 '선출직'이 아니었기에 아마도 1학년 성적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정민은 그렇게 얼떨결에 반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민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언제나 반장 또는 부반장을 했다.
물론 반장이라고 해봐야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많았다. 그래도 국민학교 때에는 반장이 급식 책임자였기 때문에 반장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반장은 플라스틱 양동이에 옥수수빵을 받아와서 청소 당번인 분단에 나누어 주는 '중요한' 일을 했다. 그리고 반장은 청소 당번이 아니어도 날마다 그 손바닥만 한 옥수수빵을 먹었다. 어린이날이면 나누어 주던 단팥빵과 더불어 급식으로 먹던 옥수수빵은 정민과 아이들에게 최고의 간식이었다.
반장은 선생님 전달 사항을 칠판에 적어 공지하거나, 수업 시작과 끝날 때 차려 경례하는 구령을 붙이거나, 선생님 대신 청소 검사를 했다. 하지만 이런 일 말고 정민에게는 보다 특별한 다른 임무가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선생님은 정민을 교무실로 불렀다. 선생님 옆에 의자를 놓고 앉힌 다음, 빨간 색연필을 쥐여주며 답안지 채점을 맡겼다. 선생님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가끔 정민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잘하고 있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날이면 정민은 온종일 몸이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정민의 집은 농사일로 늘 바빴다. 방과 후나 학교가 노는 날이면 정민도 예외 없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특히, 들에 나가 토끼에게 먹일 풀을 뜯어 오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집에서 소를 키우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잔심부름에 불과하지만, 내내 일에 매달려야 했고, 그렇게 저녁 시간이 되면 밥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너무 없었다. 부득이 정민은 특단의 조치를 감행하기로 했다.
기말시험을 앞둔 일요일 아침, 다른 식구들이 일하러 나갈 준비로 부산한 틈에 정민은 책가방을 들고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학교로 향했다. 운동장에 사람들 몇몇이 보일 뿐, 교실이 있는 건물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정민은 조심스럽게 복도 반대편 작은 운동장을 향해 난 창문으로 다가섰다. 출입구를 아예 잠가 놓기 때문에 복도를 통해서는 교실에 들어갈 수가 없다.
자신의 키보다 조금 높은 창문을 잠시 올려다보던 정민은 호흡을 크게 한 번 가다듬고 손을 뻗어 창문을 연 다음 창틀을 넘었다. 어제 청소 당번 친구들이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오면서 복도 반대편 가장 뒤쪽 창문의 잠금 고리를 일부러 풀어놓았었다.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교실은 정민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적막했다. 친구들로 시끌벅적하던 교실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지만,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분위기라서 마음에 들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정민은 일요일마다 교실에 몰래 들어가 공부를 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다시 창문을 넘어야 하므로 소변이 마려워도 최대한 참았다. 갈증이 나면 화장실 갈 때 수돗가에 들러서 물을 한꺼번에 잔뜩 마셔 두었다. 그러다 해가 기울 무렵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께서 점심도 안 먹고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지만, 정민이 들고 있는 책가방을 힐끗 보고는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창문을 넘어 교실에 들어가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복도를 따라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교실 문이 드르륵하고 거칠게 열렸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기름기로 번들거렸고, 술을 마신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흰 수염이 드문드문 턱밑에 솟아 있는 남자가 불쑥 들어왔다.
평소 가끔 보던 경비 아저씨였다. 정민은 놀랄 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저씨는 내 앞으로 몇 걸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오른쪽 뺨을 갈겼다. 눈에서 불이 일었고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어서 왼쪽 뺨을 비슷한 세기와 속도로 한 대 더 때렸다.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었구나. 반장이라는 놈이 이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 옛날 어머니 지갑에 손을 댔다가 형에게 얻어맞은 이후, 처음 당해보는 폭력이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겨우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서 벗어났다. 정민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찬물로 세수하면서 소리 나지 않게 울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항변이라도 할 걸 그랬다는 후회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다음날, 경비 아저씨는 분명히 선생님께 일러바쳤을 것이고 선생님께 야단을 맞을 생각을 하니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날 아침에도, 종례가 끝날 때까지도 선생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청소 검사를 마치고 하교 인사를 하는 정민을 바라보며, 그날따라 유난히 오랫동안 정민의 거칠거칠한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이후 정민은 농사일 잔심부름과 토끼 먹일 풀 뜯는 일에 다시 복귀(?)했다. 공부하러 도망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민의 학교 성적은 단 한 번도 전교 3등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보상은 즉각적이고 매우 컸다.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1등 박정민!'하고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면 전속력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2등, 3등 학생과 나란히 단상에 올라가면 교장 선생님께서 상장과 함께 얇은 황토색 봉투를 주셨다. 그 안에는 빳빳한 천 원짜리 세 장, 3,000원이 들어 있었다.
부모님께 말씀은 드렸지만 누구도 이 돈을 가져가지는 않았고, 그 용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민이 중학생이 되면서 이른바 전과 시대가 열렸다. 이름이 필승 전과 그리고 동아 전과였다. 학기별로 발간되는 과목별 전과와 수련장은 심화학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가격이 한 과목당 250원이었으니까 3,000원이면 전 과목을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정민은 주요 과목의 전과와 수련장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는 공책과 학용품을 샀다.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민은 알지 못하였다. 그저 공부를 잘해야 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전과와 수련장도 필요했고, 그래서 더 공부했다. 1등을 하지 않으면 3,000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민은 상금, 장학금, 어떤 방식으로든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스스로 등록금을 해결했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당연히 죽으라 공부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공부에 지치거나 가슴이 답답한 순간에 맞닥뜨리면 그때마다 '두 개의 손'을 떠올렸다. 정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김해영 선생님의 따뜻한 손,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 보다도 작은 얼굴을 가차 없이 후려치던 경비아저씨의 투박하고 거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