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정전 소동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캔디"
정민의 누나에게 고등학교 3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그때의 누나를 생각하면 왠지 이 노래가 떠오른다. 어른이 아닌 아직 학생이, 혼자가 아닌 더 어린 동생을 데리고, 부모 슬하가 아닌 타지에서, 공부만이 아닌 넉넉지 않은 살림까지, 누나의 그 시절은 들장미 소녀 캔디 같지 않았을까?
정민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에서는 부마항쟁이나 신군부 반란 사건 등 향후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만한 매머드급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부마항쟁은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1970년대 후반 유신체제는 억압의 강도를 더해가고 경제적 위기와 불평등은 심화하였으며 지배층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부산대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하였다. 정부는 계엄령 선포로 강제 진압하였으나, 이는 10.26 사건으로 이어져 유신체제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몸서리쳤던 12·12 군사반란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군 내부의 권력 공백과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했다. 이를 계기로 군 내부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신군부는 군의 주요 보직을 장악했다. 그 결과 신군부 세력이 군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실세로 부상했다.
이처럼 나라가 극심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무렵, 정민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원래 정민의 목표는 A고등학교였다. 서울대 진학률이 높아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는 명문고이다. 그런데 정민이 중 3이 되던 해, 느닷없이 고교 평준화라는 새로운 교육 정책이 시행되었다. 학교별로 학생을 자율적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추첨으로 무작위 배정한다는 것이었다. 일명 '뺑뺑이'였다.
어쩔 수 없이 정민은 눈을 돌렸다. '뺑뺑이' 지역 밖이고, A고등학교 못지않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시험을 쳐서 학생을 선발하는 학교를 찾아 지원했다. 남녀 공학인 그 학교에는 정민의 누나가 이미 재학 중이었다. 당연히 누나를 통해 얻은 정보가 도움 되었고, 누나가 거기에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자연스럽게 정민은 누나와 함께 자취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나와 정민의 학교생활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아직 어렸고, 집안 형편은 넉넉지 못했으며, 남매를 둘러싼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공부나 학교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먹고살아야 하기에 쌀이나 김치 같은 것을 부모님 댁에 가서 수급해 와야 했다. 하지만 둘 다 차멀미가 심해서 한 시간 넘게 시외버스를 탄다는 것 자체가 큰 고역이었다. 주말에 집에 한 번 다녀오면 온몸이 녹초가 되어 컨디션 난조에 빠지곤 하였다.
지금이야 쾌적한 고속버스에 편히 앉아서 다니지만, 그때는 버스가 다니는 길 자체가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잡도가 높고 냉난방 장치가 없었으며 차 안에 배기가스 같은 냄새가 심했다.
라면 한 개가 마치 고기 한 근 사는 것처럼 체감되었기에 뭐든 먹는 게 그리 변변치 못했다. 저 언덕 너머에는 뭔가 새로운 세상이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공부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정작 남매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문제가 아니었다.
사글셋방이 오죽하겠느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몇 차례 옮겨 다닌 자취방은 주변 소음이나 안전성, 화장실 같은 기초적인 주거 환경이 열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ㅇㅇ국립병원 뒤편에 있던 단칸방이었다.
국립병원 옆 으슥한 골목길을 따라 50미터쯤 들어가다 보면 병원 뒤편 영안실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커다란 집이 한 채 나온다. 그 집은 방이 여러 개 있는 일본식 가옥 형태와 비슷한 단층집이었다. 이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돈을 털린, 사실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어서 털렸다는 표현은 맞지 않지만, 일이 있었던 후부터 일단 병원 옆 골목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항상 부담되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작은 정원 같은 공간이 있었고, 왼쪽으로 방 두 개가 붙어 있는 별채가 있다. 정민 남매는 그중 안쪽 방에 살았다. 바깥쪽 방에는 정신 장애가 있는듯한 딸과 엄마가 살고 있었다. 가끔 벽 너머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들렸는데, 병원 영안실 찬송가나 목탁 소리와 함께 정민의 멘털을 사정없이 흩트려 놓는 주범이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펌프질을 해서 물을 써야 하는 수돗가(?)가 나온다. 이어서 주인집이 사는 안채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으로는 다닥다닥 붙은 방 대여섯 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화장실은 그 방들의 끝에서 살짝 떨어져 별도로 두 칸이 있었는데 재래식 화장실이었었다. 남매의 방에서 보면 작은 정원 건너 방향으로 가장 먼 쪽이었다.
이 집주인은 정민이 다니던 학교의 국어 선생님이었다. 이 분은 교사 이외에도 시집을 발간하였고 문단에서도 활동하였다. 그 집에는 정민 남매 말고도 여러 명의 자취생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관리는 선생님의 아내인 사모님이 맡아서 했다. 이 집에 관해 가장 정민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그 사모님이 일으킨 '강제 정전 소동' 때문이다.
정민이 3학년이었을 때 누나는 ㅇㅇ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 대신 취업을 택했다. 누나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아무래도 등록금을 해결할 방안이 보이지 않자, 먼저 취업하고 나중에 자신의 힘으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선취후공'으로 가닥을 잡은 듯하였다.
인문계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하는 것이 만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나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그것을 해냈다. 어찌 보면 정민의 형 둘이 하지 못한, 부모님께서 그토록 원하던 '은행원 되기'를 누나가 이룬 것이다. 누나의 이 선택 덕분에 집안이 특히, 정민의 생활이 전보다 훨씬 안정되었다.
당시는 많은 고3 학생들이 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4당 5락'을 금과옥조로 삼아 공부에 매진하던 시절이었다. 학교의 방침에 따라 정민의 등교 시간은 새벽 4시, 하교는 자정이었다. 등하굣길 학교 정문에는 선생님들 여럿이 몽둥이를 들고 서서 일일이 출입을 감시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학교 급식이 없었기 때문에 점심으로 도시락을 싸 오는 친구도 있었고 집에 가서 먹고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정민은 왕복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죽으라 뛰면서 오갔다. 밥 먹을 수 있는 시간이 30분도 채 안 되었기 때문에 항상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하였다. 사실 도시락을 싸려면 반찬도 그렇지만 출근을 해야 하는 누나로서는 적잖은 부담이었다.
밤 12시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누나는 먼저 잠이 들어 있었다. 본인의 숙면에 방해될 것이 분명함에도 항상 책상에 스탠드 불을 켜 놓았다. 작은 그 불빛 아래에는 새우깡, 옥수수콘 같은 과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공부하면서 먹으라고 누나가 준비해 놓은 간식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새벽 한 시가 지나면 정전이 되는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집도 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알고 보니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면서 주인집 사모님이 두꺼비집(covered knife switch, 지금의 분전반)을 내려 버린 것이다. 어차피 정민을 제외한 모두가 불을 끄고 잠든 시간이어서 이런 강제 정전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정민뿐이었다. 냉장고나 에어컨을 쓰는 것도 아니고, 고작 작은 스탠드 불 하나가 전기를 쓰면 얼마나 쓴다고.
보다 못한 정민의 누나가 나서서 항의를 해보고, 동생이 공부해야 한다며 읍소도 해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전기를 무료로 쓰는 것도 아니고 월세 이외에 전기세와 수도세를 별도로 내는데 이러는 것은 횡포를 넘어서 만행에 가까웠다. 전기를 아껴 써야 한다는 엉뚱한 '충고'만 듣고 돌아온 누나는 분을 삭이며 애써 설움을 감추는 수밖에 없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하고 하였던가. 정민과 누나, 두 남매의 고등학교 생활은 이렇듯 어떤 날은 시련을, 또 어떤 날은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정민은 고등학교 3년을 무사히 마쳤다. 결과도 좋아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 해피엔딩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같은 누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등학생 소풍이라고 뭐 특별할 거야 없었지만, 누나는 정민이 소풍 가는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주었다. 정민에게 김밥 도시락은 그게 처음이었다. 그렇게 누나는 속재료를 감싸는 김처럼 울타리가 되어 정민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만약 누나가 아니었다면 정민의 고교 시절은 can이 아닌 can not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