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강박
"공부가 안돼서 일찍 왔구나. 누나는 목욕탕에 다녀올게. 공부하고 있어."
토요일 오후 늦게 퇴근한 누나가 학교에 있어야 할 정민이 평소와 다르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목욕탕에 갈 준비를 마친 누나는 '잠깐만'하면서 정민이 앉아있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어? 정민아, 여기 서랍 속에 편지 봉투 못 봤어? 분명 여기 뒀는데?"
"봉투? 왜? 거기 뭐가 들어 있었는데?"
"돈 봉투를 여기에 넣어 두었는데 안 보이네?"
순간 정민에게 어떤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까 불타던 것 중에 언뜻 돈처럼 보이는 게 있었는데 진짜 돈이었나? 그게 지금 누나가 찾는 돈이라는 말인가? 설마 아니겠지? 갑자기 머리가 띵하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급히 집 앞 공터로 뛰어나가 잿더미 속을 뒤적여 보았지만 정민이 불태운 것들은 이미 시커먼 재만 남기고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정민의 학교에서 가장 악명(?) 높은 선생님을 뽑으라면 단연코 따발총과 개코였다. 따발총은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길이 30cm, 지름 5cm 정도의 나무 막대기로 손바닥을 때렸다. 타격 강도가 세지는 않았지만 마치 따발총을 쏘는 것처럼 100대를 맞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이지만 그때는 '참교육'이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발총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사람은 개코이다. '냄새'를 잘 맡아서 붙은 별명이다. 개코는 생활부장인데, 교내 규율 단속은 물론, 불시에 학생들 하숙방이나 자취방을 급습했다. 적발 대상 품목은 술, 담배, 선데이 서울, 연애편지 같은 것이다.
개코는 주말이면 주로 상가가 밀집해 있는 거리와 극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본교 학생이 눈에 띄면 단순히 거리를 '배회'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적을 받았다. 영화 포스터에 노출 수위가 높다 싶은 남녀가 등장하는 영화는 어김없이 단속 대상이었다.
그런데 개코는 혼자 다니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항상 각 학급의 반장들을 교대로 불러서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바퀴 도는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에 지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날은 불행히도 정민이 당번이었다. 금요일 저녁, 거리가 어둑해질 무렵 개코의 자전거 뒤에 타고 거리를 돌다가 시내에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보통은 당번이 두세 달에 한 번꼴로 돌아왔는데 이달에는 벌써 두 번째였다. 무슨 일인지 그즈음에는 개코뿐만 아니라 다른 생활지도 선생님들도 거리 순찰을 자주 나갔다. 그러다 보니 반장들이 불려 가는 횟수도 늘어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무렵 학교가 있는 곳에서 약 170km 떨어진, 불과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주시는 다른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었지만, 학교 측의 예비적 조치로 교사에 의한 '거리 현장 지도'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개코와 함께 도착한 중앙극장에서는 얼마 전에 개봉된 '병태와 영자'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하길종 감독의 이 영화는 바보들의 행진 속편으로, 197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가난과 성(性), 도덕, 계급 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루며 큰 화제를 일으켰다. 손정환 배우와 이영옥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당시에는 영화 상영 등급제가 없었고 상영 전 정부의 검열과 허가를 받아야 했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전 검열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 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97년 영화진흥법이 개정되고 19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출범함으로써 검열 대신 연령별 등급을 매기는 등급 분류제가 본격 도입되었다.
따라서 '병태와 영자'가 성인물이 아닌 이상 고등학생이 본다고 해서 위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적 관념이나 윤리적 기준에 따라 학교 교사가 판단할 때 학생이 이 영화를 보면 단속 대상이 되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학생 출입을 암묵적으로 허용해 놓고, 이런 유형의 현장 단속을 막지 않는 극장 측의 이율배반적인 처사였다. 하긴 그런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 보면 그 시간에 극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문제 학생이라는 전제가 깔렸는지도 모른다.
상영관 안에 들어서자 드물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뒷모습이 막 시작한 영화의 화면에 겹쳐 보였다. 정민을 입구 쪽에 세워두고 개코는 중앙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컴컴한 극장 내부를 훑기 시작했다. 만약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밖으로 데리고 나와 그 여부를 확인할 것이다. 그때였다. 중간쯤 내려가던 개코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중앙열 우측 끝쪽 좌석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던 학생 한 명이 여지없이 개코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밖에 나와 얼굴을 보니 그는 정민도 아는 같은 반 친구였다. 위설량, 매우 독특한 성과 이름을 가진 이 친구는 이제 이 일로 인해 오늘 이후 매우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선례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어쩌면 정학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왠지 정민을 보는 위설량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눈빛은 명백히 개코 보다 정민을 더 원망하는 눈초리였다.
전날 저녁 '단속 보조(?) 활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이후 정민은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장이라는 이유로 생활지도 선생님에게 억지로 끌려다니며 다른 학생을 막아서는 것도 그랬지만, 위설량처럼 단지 특정 영화 한 편 봤다는 이유로 단속을 강행하고 일방적으로 처벌하는 처사는 과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교실에 앉아 있어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위설량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그 친구가 개코에게 잡힌 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양 신경이 쓰였다. 일제 강점기 부역하던 조선인 순사가 된 느낌이었다. 머리가 아파지고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뭔가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정민은 두통을 핑계로 조퇴 신청을 했다. 이미 방과 시간이 지난 토요일 오후였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조퇴도 아니다.
담임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교문에 다다르자 정성진 선생님께서 서 계셨다.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하고 본인 키만큼 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자칭 만능 지시봉이었다. 끈이 떨어져 발가락이 걸릴지 말지 위태로워 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수업 시간에도 항상 그 신발을 끌고 다녔다. 정성진 선생님은 다행히 정민을 예뻐하는 분이었다. 물론, 정민도 이 선생님의 국어 수업을 좋아했다. 어떤 형태의 시험이든지 단 한 개도 틀린 적이 없었다.
무단으로 교문을 출입하는 학생들을 막느라 경계 근무를 서던 선생님은 두통이 심해 조퇴한다는 정민의 말에 이마를 만져보면서 양호실에는 다녀왔는지, 몸살 기운은 없는지를 물었고 얼른 집에 가서 쉬라고 등을 떠밀어 주었다. 아마도 다른 학생이었으면 꾀병 아니냐며 긴 시간 동안 붙잡혀 있었을 것이다.
집에 온 정민은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 마음을 다잡기 위해 주변 정리를 먼저 하기로 했다. 방이나 옷장, 부엌 청소는 누나가 하므로 자신이 공부하는 영역인 책상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정민은 평소에도 뭐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도무지 집중을 못하는 성격이다. 이런 성향은 언제부터인가 주변의 물건을 완벽히 정리해야 마음이 안정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좀 무겁게 해석하면 불안이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강박적 사고 또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심각한 수준의 정신적 트러블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불안과 강박은 이후에도 정민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세상 일과 사람에 대한 부정적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뭐든 잘 믿지 않는 편이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늘 걱정을 앞세우는 성격이 되었다.
책상 위와 책꽂이 주변의 어지러운 것들을 말끔히 정리한 다음, 서랍을 열어 안에 든 잡동사니를 전부 끄집어내었다. 서랍 수가 많지 않았으나 이삿짐을 꺼내고 보면 짐이 트럭에 가득 차는 것처럼 막상 꺼내놓으니 그 양이 꽤 많았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정리를 마치고 하던 공부를 마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일일이 확인하고 버릴 것과 남겨둘 것을 구분하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보이는 대로 대강 아는 것들은 두고 못 보던 것들은 버리는 방식으로 정리를 마무리했다.
지금 같으면 분리 수거함에 모아 두었다가 배출 날짜에 분리수거 장소에 내다 놓으면 되지만, 우리나라에 분리수거가 시작된 것은 1995년 1월부터이다. 즉, 이때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개인정보나 프라이버시가 걱정되면 태워 버려야 했다.
정민과 누나의 자췻집 대문 앞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다. 여기저기 잡초들이 솟아나 있고 작은 쓰레기나 나뭇가지가 굴러다녔다. 한복판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쓰레기 태우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무언가를 태운 재들이 늘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정민도 모아 온 쓰레기를 잿더미 옆에 모아놓고 신문지를 불쏘시개 삼아 불을 붙였다.
화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다 탈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그 사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타고 있는 것들을 이리저리 뒤집고 있는데, '삼청교육대', '모스크바 올림픽' 같은 큰 타이틀 글씨가 보였다.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오직 앞만 바라보며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정민은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였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이므로 알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검색창에 몇 글자만 찍으면 내용을 훤히 알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런데 종이들이 거의 다 타들어 갈 무렵이었다. 문득 정민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만 원짜리 지폐처럼 보였다. 아닐 거야. 설마 돈이 저기에 왜 있겠어. 정민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애써 부인했다. 그러는 사이 돈으로 보이는 그 추정 물체는 완전히 타버려 사실을 확인할 방법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잔불을 정리하고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확인한 다음 방으로 돌아왔지만, 왠지 꺼림칙한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누나가 서랍 속에 넣어둔 돈을 찾는 상황에 따르면, 불과 몇 시간 전 쓰레기를 태울 때 긴가민가했던 그것이 진짜 돈이었다는 말이다. 같은 반 친구 위설량이 극장에서 적발당한 일부터 시작된 정체 모를 불안한 느낌이, 난데없이 정리 정돈한다고 유난을 떨다가 돈까지 태워버리는 작금의 사태에 이른 것이다.
누나는 매달 월급을 받으면 생활비 할 것을 떼어서 그렇게 서랍 속에 두고 꺼내 쓰곤 하였다. 그 시절은 현금 거래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걸 알지 못했던 정민이 책상 정리를 하는 도중에 버릴 것에 쓸려 들어갔고, 급기야 이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당시 은행원인 누나의 월급이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1980년 기준으로 추정해 보면 신입 행원 연봉이 약 240만 원이었다고 가정하면 월급이 약 20만 원이었을 것이다. 라면 한 개가 100원, 서울 시내 버스비가 100원 정도였으니까 만 원짜리 몇 장은 큰돈이었다
돈을 왜 그런 데다가 넣어 두느냐고 엉뚱한 타박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봉투에 들었던 돈이 얼마였느냐고 물었지만, 누나는 끝내 모른다며 대답하지 않았다. 누나는 잠시 허무한 표정으로 멍하고 있더니 이내 괜찮다며 오히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정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정작 누나의 속은 타버린 돈처럼 재가 되었을 것이다.
정민은 눈앞에 벌어진 이 어이없는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애쓴 누나의 시간과 노력을 어이없이 날려버린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 모든 것이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민은 예를 들면, 등만 대면 어디서든 잠이 드는 사람을 가장 부러워한다. 본인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격은 항상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