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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의 꿈

자기 선택과 자기 연민

by 화문화답

"사냥꾼이 독수리 새끼를 집에 데려가 닭장 속에 가두었다. 독수리는 닭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날갯짓을 해 보았지만, 닭들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너도 결국 우리처럼 땅에서만 사는 거야. 이게 현실이야. 시간이 흘러 독수리는 점차 닭처럼 변해 갔다. 어느 날, 지나가던 노인이 물었다. 아니, 왜 독수리가 이곳에 있는 거요? 그냥 닭처럼 살아요. 날지도 못하고. 사냥꾼의 말을 들은 노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독수리가 날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닭장 속에 갇힌 독수리에 관한 우화(寓話)이다. 애초에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자, 혼란에 빠진 정민은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신입생 시절을 보냈다. 그게 현실이고 어쩔 수 없었다고 애써 위안으로 삼아보았지만, 시시때때로 후회와 자괴감이 밀려왔다. 과연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정민은 스크랩한 신문 광고를 들고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이 지원할 대학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입시 철이 되면 모든 일간 신문에 대학별 신입생 모집 공고가 실렸다. 그것이 정민이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보였다.


학교에서는 이렇다 할 진학 상담이 없었고, 지금처럼 입시 학원의 고급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다. 그때는 전두환 정부가 강력한 사교육 통제를 추진하던 시기로, 1980년 7월에 발표된 과외 금지 조치가 시행되던 때였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주변에 대입이나 대학생활에 관한 조언을 해줄 만한 마땅한 멘토가 없었다. 1980년도 고등학교 졸업자의 대학 진학률이 약 27.2%(국가 통계 포털 자료)에 그쳐 2023년 기준 72.8%에 비하면 기본적으로 대학 생활을 경험한 사람 자체가 적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일단 입학하고 나면 교비 장학금, 동창회 장학금, 공공 장학금, 민간 기업이나 재단 장학금 등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 있다든지, 그래도 안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등록금을 마련하는 방법이 있다든지 하는 경험담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만약 대학이나 대학 생활 그리고 대학의 선택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사전에 알았다면 정민의 선택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민은 바깥세상을 알지 못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정민에게 대학을 결정하는 것은 그동안 해 온 공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일이다. 선택에는 위험이 따르고 오롯이 자신이 그 결과에 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누구도 내 인생의 리스크를 대신 짊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는 결국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으므로 선택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외로움이 따른다.


정민이 우선 고려한 기준은 장학금이었다. 대학별 신문 광고를 오려놓고 조건이 가장 좋은 한 곳을 결정했다. 4년간 등록금 면제와 대학원에 진학할 경우 총 6년간 등록금 면제였다. 당연히 기준 이상의 대입 학력고사 성적을 전제로 하였고, 입학해서도 일정 수준의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정민이 지원한 대학은 계열별 모집이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법학과, 행정학과, 정치외교학과로 분리되는 구조였다. 당연히 특정 학과에 지원자가 몰리면 성적순으로 결정했다. 원서 접수 결과 143명 모집에 257명이 지원해서 1.8대 1이었다.


정민이 가고 싶었던 S대 법학과는 364명 모집에 859명이 지원해 2.4대 1, K대 법학과는 390명 모집에 708명이 지원해 1.8대 1, Y 대는 208명 모집에 362명이 지원해 1.7대 1의 경쟁률이었다. 당시에는 이과보다는 문과를 선호했고 계층 사다리가 될 가능성이 높은 법학과나 경영학과 지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면접이 있는 날, 정민은 처음으로 대학 캠퍼스를 밟아 보았다. 차가운 날씨에도 많은 대학생이 넓은 캠퍼스를 자유롭게 오고 갔다. 담쟁이덩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물들은 오랜 역사를 품은 듯 신비감마저 감돌았다. 여기저기 잔디밭과 벤치에는 남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박정민 학생은 본인의 점수가 낮다고 생각하나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후 면접관 교수님의 첫 질문이었다.


"아닙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런데 왜 우리 학교를 지원했나요?"


도대체 이게 무슨 질문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학금 지급 조건이 가장 좋은 대학을 선택했습니다."

"..............."


면접관 교수님들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이어서 정민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박정민 학생, 입학하고 나면 나를 한 번 찾아오도록 해요. 할 수 있죠?"


면접관 세 명 중에서 가운데에 앉아 있는 교수님이었다. 작은 얼굴 대부분을 도수가 높아 보이는 검정 뿔테 안경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민은 그 교수님 앞에 놓여있는 명패에 정치외교학과 ㅇㅇㅇ교수라고 적혀있는 걸 유심히 쳐다보았다. 법학과를 원하는 정민은 정치과 교수님이 자신과 무슨 연관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망설임 없이 바로 교수님을 찾아갔을 것이다.




정민이 장학금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한 것은 입학 등록을 할 때였다. 온라인 뱅킹이나 은행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등록금을 대강당에 임시로 설치된 출장 은행 창구에서 납부했다. 한 학기 등록금 50만 원을 현금으로 들고서 말이다. 장학생인 정민은 입학금과 등록금이 면제되었으나 학도호국단비 5천 원을 내기 위해서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납부 고지서를 들고 줄을 섰다.


학도호국단은 박정희 정권 시절 학생들을 군사적으로 통제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졌다. 1980년대 들어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제한하고 학생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이를 계승하였고 이후 1988년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회가 부활할 때까지 이어졌다.


'50만 원 대 5천 원'이라는 우월감에 정민은 납부 도장이 찍힌 고지서를 자랑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진정 등록금 면제라는 장학금의 위력이며, 자신의 선택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세상에 다 좋은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은 채 눈앞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다.




신입생 친구들은 대학생 가방이라 불리는 덮개 부분이 둥글고 얼핏 보면 의사 왕진 가방과 비슷해 보이는 합피 재질의 묵직한 검은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옷은 주로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었는데, 지금 중고생들이 활동성과 편의성을 위해 체육복을 입고 등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어쩌면 옷 사 입을 돈이 없거나, 그만큼 패션 감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치 교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교련복 바지를 끔찍이 사랑했다.


교련은 3학점이었는데 이수하지 않으면 강제 징집을 당하였다. 특히, 여름방학에는 병영 입소 훈련을 가야 했다. 옆구리에 '환영! 학생 병영 체험 입소'라고 적힌 현수막이 달린 버스를 타고 떠났는데 실제 군대 가는 날 못지않게 여자 친구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문무대로 불리는 학생중앙군사학교에 도착하면 유격, 총검술, 화생방 같은 훈련을 받았다.


교련 과목 이수와 문무대 훈련의 대가는 3개월의 군 복무 기간 단축이었다. 30개월이던 복무 기간을 27개월이면 마칠 수 있었다. 이 혜택을 받고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은 예비역이라 불리며 다시는 교련복을 입지 않았다.




정민을 비롯한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겉부터 속까지 촌티를 벗지 못하였다. 지독한 지방 사투리에 얼굴과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거칠었으며 차림새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숙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친척 집에 얹혀살거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했다. 겨우 잠만 자는 허름한 방이었다. 끼니는 주로 학생식당에서 250원짜리 식사로 해결했다.


이런 가난한 대학생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바깥세상은 온통 사기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와 그의 남편이자 전직 중앙정보부 차장 이철희가 대규모 어음 사기 사건을 저질렀다. 그들이 기업들로부터 받아낸 어음 액면가 총액은 약 7,000억 원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유통한 어음 액면가는 약 1,400억 원 정도로 알려졌다. 주머니 속에 버스 회수권과 학생식당 식권이 전부였던 정민에게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숫자였다.




정민의 친구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정민의 삶에서 절대선(絶對善)이었던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하지 않았다. 때로는 뭔지 모를 이질감이 들기도 했지만,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그들과 어울려 놀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잔디밭에서 시작한 술타령은 학교 앞 고갈비 집으로 이어졌고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같은 운동가를 목청껏 불렀다.


그러다 늦은 밤이 되면 대중교통은 끊겼고 택시 탈 돈도 없으니 친구의 자취방에 몰려가 쪽잠을 잤다. 그마저도 여의치 못할 때는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 새벽이슬을 맞으며 아침을 기다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민의 대학생활 시작과 함께 야간 통행금지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이 금지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적발되면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밤새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범칙금을 내고 풀려났기 때문에 통금 시간이 임박하면 귀가 전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36년이나 계속되던 야간 통행금지가 정민이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전격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왜곡된 자유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일탈이었을까? 노는 날이 이어지는 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흐르는 시간은 쏜살같았다. 정민의 대학교 첫 학기는 그렇게 방황과 술타령에 실려 지나갔다.


재학 중 사법고시 패스라는 목표가 있었던 정민에게 반년의 허송세월은 적잖은 타격이었다. 순식간에 많은 것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당시 학교에서는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준비하는 학생 전용 기숙사였다. 그런데 뭐에 정신이 팔렸었는지 정민은 입사(入舍) 정보를 놓쳤다. 입학 성적순이었으므로 들어갈 자격이 충분했음에도 그 기회를 날려 보냈다.


오직 장학금만 보고 학교를 선택한 인생의 첫 번째 오류와 그에 기인한 방황, 그리고 입학하자마자 고시원에 들어가 사법시험공부를 시작하지 않은 실수는 정민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 '독수리를 닭장 속에 가두어 둔 탓'이라는 자기 연민에 빠져 헛되이 보낸 그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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