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총각과 무당 할머니
방학동 버스 정류장에서 도봉산 시루봉 쪽으로 걷다 보면 낮은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택 밀집 지역이 나온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폭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양옆으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뛰노는 아이들, 의자에 걸터앉아 사람 구경하는 노인들, 채소를 다듬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 아주머니들로 골목 안은 소란스럽다.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갈색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여기저기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안채 마루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대학생 총각! 이리 와봐'하고 정민을 부른다. 나이가 지긋하신 이 할머니는 집주인이며 무당이다. 할머니는 정민이 보일 때마다 불러 앉혀 놓고 과일이며 간식거리를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
할머니는 정민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한다. 할머니가 무당이 된 이야기, 간밤에 호랑이 등을 타고 태백산에 다녀온 이야기, 집에 쳐들어온 잡귀들을 물리친 이야기.....
정민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일찍 귀가하던 날이었다. 지붕 위로 높이 세워진 장대에 빨간색과 하얀색 깃발이 펄럭이고, 마당 한쪽 길쭉한 미루나무에서 매미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대학생 총각, 이리 잠깐 와봐."
할머니는 정민을 이름 대신 대학생 총각이라고 불렀다. 금세 방에 들어갔다 나온 할머니는 엽서 절반 크기의 갱지 여러 장을 스테이플러로 찍은 종이 뭉치를 불쑥 건네주셨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내가 대학생 총각 평생 사주를 좀 봤어."
"평생 사주요?"
첫 장에는 인생 전반에 걸친 총운이 적혀 있었고, 뒷장부터는 성격, 건강, 인간관계, 재물운 같은 것들이 초년지수, 중년지수, 말년지수로 나뉘어서 빼곡히 적혀있었다. 검정 볼펜 글씨였는데 강조할 내용은 빨간색으로 꾹꾹 눌러써 그 자국이 뒷장까지 남아 있었다. 언제 말씀드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민의 출생일시를 알고 계셨던 모양이다.
흐르는 세월의 어느 언저리에서 그렇게 정성스레 적어 주신 평생 사주는 아쉽게도 없어져 버렸지만, '중이 되어 팔도를 떠돈다'라든지 '암꿩이 스스로 우니 담장 밖을 내다보지 말라', '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면 그 은혜가 바다와 같다', '고목나무에 꽃이 핀다' 같은 문장 몇 개가 아직 정민의 기억에 남아있다.
중이 되지는 않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여러 지방에서 근무했고 외국에까지 가서 일했으니 얼추 비슷하다. 여성이 대부분인 직장에서 근무했으나 아내와는 지금까지 30년을 넘게 살고 있으니 담장 밖을 기웃거리지는 않은 것도 맞다. 큰 은혜까지는 아니지만 사내 강사 또는 초빙 강사로 강의할 때 즐거웠던 기억이 있으니 이 또한 넓게 해석하자면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말년지수에 적혀있던 '고목나무에 꽃이 핀다'이다. 빨간색으로 쓰셨으니 분명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고목(古木)이 되는 시점은 언제부터 일까? 65세? 70세? 꽃이 핀다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혹시 말년에 로또 복권 당첨이라도?
무속 신앙을 믿거나 운명론자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대단한 행운을 바라는 것은 얄팍한 욕심이다. 인제 와서 "죽어 있던 가지들이 만개한 꽃들로 가득해져, 꽃잎 한 장마다 전부 나, 나라고 외치는 한 그루 나무(김주혜 작가, 작은 땅의 야수들)"가 되는 반전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정민의 말년지수는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꽃처럼 향기롭게, 꽃처럼 아름답게 다시 피고 지라는 인생의 마지막 과제일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계신 안채를 지나면 정민의 형 집이 나온다. 이 집에는 형, 형수, 조카 둘과 정민이 산다. 중앙 마루에 서있는 TV에서 K○○ 드라마 '약속의 땅'이 방영되고 있다. 유지인, 김흥기, 신구, 강부자 같은 인기 스타들이 출연하는 일일 연속극이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광부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인기 드라마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식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고 있노라면 낯설고 황량했던 정민의 서울살이도, 대학생활도 어느덧 보통스럽고 평범해졌다는 안정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첫 학기 내내 빠져있던 방황의 늪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절어 사는 짓도 더는 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수업 듣는 시간 외에는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열기에 휩싸여 혼란스러웠다. 학교 안에 버젓이 사복 경찰이 상주했으며 학생들의 시위는 날마다 계속되었고 휴강과 휴교가 반복되었다. 캠퍼스에 가득한 독한 최루탄 냄새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뜨고 다닐 수조차 없었다.
군사독재 타도,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민주정부 수립을 외치며 학생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세를 이루면 스크럼을 짜고 깃발을 흔들며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교문 앞에는 이미 경찰 기동대가 중무장을 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다. 시위대가 교문 앞에 다다르면 일제히 최루탄과 '지랄탄'을 발사한다.
코 밑에 치약을 바르거나 손수건으로 겨우 코와 입을 가린 학생들의 얼굴은 이내 콧물과 눈물범벅이 된다. 흥분한 몇 명이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하면서 시위는 과격해지고 교문 주변은 포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처럼 변한다.
곧이어 하얀 헬멧에 청재킷을 입고 방독면 가방을 엑스 자로 멘 백골단이 진압봉을 움켜쥔 채 나타난다. 무술 경찰이나 특수 부대 출신으로 구성되었다는 이들을 당할 수는 없다. 공포에 질린 시위 학생들은 하나둘 달아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진압봉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거나 질질 끌려서 '닭장 차'라고 불리던 경찰 버스로 잡혀간다.
순식간에 학교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전부 사라지고, 대신 거리를 점령한 전투경찰들만이 진용을 갖추어 방패를 들고 장승처럼 서 있다. 그때 뿔뿔이 흩어진 시위대 중 몇이 정민이 공부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뛰어들어와 핸드마이크를 들고 외친다.
"학우 여러분, 지금 한가롭게 공부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학생 시위가 격해지고 휴교령이 내려지면 정민은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지금처럼 카페나 공공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집 안 역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어서 주로 조카들과 놀아 주거나 간단한 집안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 무렵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이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는데, 정민도 감동과 서사가 넘치는 그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다.
한국전쟁 휴전 30주년을 맞아 이산가족을 찾게 해 준다는 기획 의도로 시작한 이 방송은 원래 두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방송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더니 이산가족과 시청자들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거웠다. 급기야 정규 방송 편성을 취소하면서 속행된 생방송은 138일(453시간)로 단일 방송 프로그램으로 세계 최장 시간 연속 생방송의 기록을 세웠다.
이때 자료와 기록들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전 세계인들이 한국전쟁과 분단의 참상,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기억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생사조차 알지 못하던 이산가족이 서로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얼싸안고 우는 장면은 모든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덩달아 이 프로그램의 오프닝 곡으로 쓰인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잃어버린 30년’ 같은 노래가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렇게 이산가족들이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던 시간, 방송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형과 형수가 눈물을 쏟고 정민과 조카들이 느닷없이 생이별하는 일이 터졌다.
당시 형과 형수는 옷을 만들어 동대문 시장에 납품하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봉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일감이 가득 쌓였고 그만큼 수입도 괜찮은 편이었다. 주문을 받아오고, 옷감을 공급하고, 완성된 옷의 납품을 대행하며 일정한 수수료를 받아가던 중개상이 그 모든 것을 몽땅 들고 튀어버리기 전까지는.
형수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동안 형은 세상을 다 뒤질 듯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중개상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졸지에 형과 형수는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재봉틀 10여 대를 팔아 직공들 밀린 급여에 충당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으로 이사하는 형을 정민은 더는 따라가지 못하였다. 이 청천벽력 같은 사기 사건으로 인해 안정을 찾아가던 정민의 대학생활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정민에게는 당장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었다. 은행에 다니는 작은누나가 매달 자신의 월급을 쪼개서 보내주는 얼마간의 돈으로 뭘 어떻게 해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민의 큰누나는 서울시 동쪽 외곽에 있는 경기도 고성리라는 곳에 살았다. 주변에 배 밭이 많아서 봄이 되면 온 세상이 눈 내린 것처럼 하얗게 변했고, 가을이면 탐스러운 열매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렸다. 누나는 그곳에서 여러 명의 시댁 식구를 건사하고 있었다. 이미 대식구였음에도 방학동을 떠난 정민은 거기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었다.
배차 간격이 40분인 500-* 경기도 버스를 타면 학교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새벽 4시 50분 첫차를 탔고, 도서관에서 종일 생활하다가 밤 11시 막차를 탔다. 집에서는 잠만 자는 이런 생활이 매일 반복되었다. 누나의 시댁 식구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누나는 새벽에 일어나 정민의 도시락 두 개를 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도시락 두 개의 무게도 문제였지만 여름에는 반찬이 상하기 쉬웠고, 겨울에는 밥이 얼음 덩어리처럼 차가워졌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반찬 삼아서, 때로는 뜨거운 국물이 필요해서 늘 컵라면을 같이 먹었다.
다행히 도서관 건물 한쪽에 도시락 먹을 수 있는 공간과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대형 스테인리스 보온 물통에 뜨거운 물이 담겨 있었다. 물론 구내식당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기에는 남들 시선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매끼 돈을 주고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안되었다.
입맛은 없어도 먹기는 해야 했던 어느 겨울날, 이날도 뜨거운 컵라면 국물에 차디찬 밥을 말아서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을 때웠다. 오후 내내 속이 좋지 않더니 결국 저녁 무렵부터 심한 복통이 왔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들어오는 정민을 보고 누나는 자신의 탓이라며 속상해했지만 그건 누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도봉구 방학동에서 경기도 고성리까지, 정민은 긴 세월 동안 형과 누나의 신세를 지며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했다. 스스로 터득한 얹혀살기 신공을 발휘해 모나지 않게 생활하고자 노력했지만 나름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에도 동생을 끌어안아 준 형과 누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모름지기 그분들은 정민보다 몇 배의 힘든 상황들을 겪고 인내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정민은 '더 나은 환경이었더라면'하는 생각보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이라는 감사한 마음이 크다. 무당 할머니가 대학생 총각에게 적어 주신 말년지수대로 만약 '고목나무에 꽃이 핀다'면 그때는 작은 보답이라도 할 기회가 있을까?
정민은 학교를 졸업하고 경제적 독립을 한 이후로 두 번 다시 컵라면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컵라면만 보면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으면 그냥 웃으면서 얼버무린다. 정민에게 컵라면은 어렸을 때 먹던 꽁보리밥에 이어 두 번째 기피 식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