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서 인연으로
김성철 교수는 S대 대학원에서 행정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법대 학장과 행정법 학회장을 역임했으며 많은 연구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자이다. 집은 여의도이지만 화곡동에 별도의 연구실 겸 서재가 있다.
크지 않은 키에 통통한 편이고 반쯤 벗어진 머리에 도수 높은 안경을 쓴 둥근형의 얼굴이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릿발같이 차가운 표정을 드러낸다. 규칙적이고 온전히 바른생활을 지향하며 뭐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으로 오탈자 하나라도 있으면 화를 내는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부인의 취미생활이 도자기여서 집안 곳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진열되어 있다. 제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는 뷔페처럼 커다란 그릇에 몇 가지 음식을 장만해 각자 덜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슬하에 딸이 하나 있는데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해 겨울은 10월 말에 최저 기온이 영하를 기록할 정도로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때 이른 찬바람을 맞고 바닥을 뒹구는 낙엽 위로 찬 서리가 쌓이고, 아직 다하지 못한 지난 계절의 여운이 켜켜이 쌓여 맴돌고 있었다.
2학년 2학기를 마치자 정민의 친구들은 입대할 것인지 사법시험 준비를 계속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2학년까지 군사훈련 학점을 이수하면 3개월간의 군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남학생은 이때 입대를 했다. 군대는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가야 한다는 선배들의 충고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27개월의 공백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메울 것인가?' 하는 이 결정은 그들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갈림길이 될 것이다. 정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고민의 양상이 남들과 좀 달랐다. 늦어도 대학원 마칠 때까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애당초 미리 군대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정민의 계획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행정법 김성철 교수가 정민을 연구실로 불렀다. 그동안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개별적으로 대면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이례적인 호출이었다. '답안지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단답형 또는 약술형(略述型) 문제가 출제되는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법학 과목 시험은 'ㅇㅇㅇ에 대해 서술하시오' 또는 'ㅇㅇㅇ에 관해 논하시오' 같은 형태였다.
교수나 조교가 들어와 칠판에 문제를 적으면 이를 보고 8절 크기의 백지 앞뒷면에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적어 넣는 방식이었다. 교수의 성향에 따라 어떤 분은 답안지 장수가 많으면 후한 점수를 주었고, 또 어떤 분은 핵심 내용을 간략하게 적은 답안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지난 기말고사에서 출제된 문제는 '행정법상 신뢰보호원칙'이었다. 나중에 정민의 학위 논문 주제가 될 정도로 관심이 있던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소신 있게 답안을 작성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되짚어 봐도 신경이 쓰일 만한 오류는 없었다.
어쩌면 정민의 답안 작성에 큰 잘못이 있었고, 그 때문에 다음 학기 장학금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득 안고 교수연구실로 향했다. 그런데 연구실 안에는 교수 외에도 여럿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정민이 당황해 하자 그중 한 분이 어서 들어 오라며 자신들은 박사 과정 선배라고 소개했다.
다섯 명 모두 처음 보는 분들이었는데, 학생이라기보다는 어느 기업에 재직하는 높은 사람 정도로 보였다. 정민은 재빠르게 눈치를 살펴보았으나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교수와 선배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정민은 그제야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학할 때 장학금 지급 조건이 평균 B학점 이상이었기 때문에 정민에게 성적은 장학금과 직결되는 크리티컬한 문제였다.
"자네 내 방에 들어와서 공부해보지 않겠나?"
정민이 한쪽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김성철 교수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정민을 보고 선배 중 한 명이 나서서 부연 설명했다. '선생님께서 자네의 기말고사 답안지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셨다. 선배들도 같은 생각이다. 선생님 연구실에 들어와 공부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선배들은 김성철 교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정민은 입학하고 나서 곧바로 교내 고시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1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지만, 2학년부터는 마음을 다잡고 도서관 붙박이로 사는 중이었다. 그동안 6법(헌법,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교과서를 두 바퀴 정도 훑었다. 한자가 70~80%인 700~800페이지의 두꺼운 책들이고,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지는 과목도 있어 합치면 10여 권이 넘는 분량이다. 이미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정민은 흔들렸다. 지금까지 자신에 관해 누군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제안을 해 준 적이 있었던가. 더군다나 이분들이 누구인가. 어쩐지 이들의 말은 모두 옳을 것 같았다. 어차피 대학원 등록금은 이미 해결되어 있다는 '장학금 논리'도 여지없이 다시 작동했다.
정민이 느닷없이 맞닥뜨린 이 상황은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석사과정을 마친 다음, 박사 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것인지 묻고 있었다. 정민은 고민에 빠졌다. 한 번 흔들린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입대라는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제외되었지만, 어느 쪽이든 결정을 해야 했다.
도서관 열람실 바로 옆자리에 날마다 나란히 앉아 공부하면서 친해진 김민상 선배가 있었다. 가정대학에 다니는 여자친구와 학교 근처에 살면서 사법고시 준비를 4년째 하고 있었다. 정민이 털어놓은 고민을 들은 선배는 진로 변경에 반대하였다.
불확실성과 기회비용이 훨씬 크다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의 말보다는 오직 자신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는 충고를 덧붙였다. 평소 김민상 선배에 많이 의지했던 터라 정민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 사이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고 김성철 교수와 면담이 한 번 더 있었다. 그리고 결국 '만약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면'이라는 조건부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법시험이 아닌 학문의 길을 택한 것이다. 누구도, 본인조차도 예상치 못한 방향의 급선회였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 격려를 동시에 받으며 정민은 새로운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 여정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연구실에 출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통치에 맞서 반독재를 외치며 연일 시위에 나섰고 경찰이 이를 강제 진압하는 일이 일상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 속에서도 중간고사 일정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시험 감독을 하던 정민은 뭔가 평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이 폭풍전야 같은 느낌은 뭘까? 학교 중앙 광장에는 평소의 몇 배쯤 되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법학개론은 법대가 아닌 학생들이 교양과목으로 수강할 수 있어서 평소 수강 인원이 적지 않은 편이었는데, 이날은 시험에 지각한 학생들도 많았고 결시율도 높았다.
시험이 종료되고 시험 도중 부정행위 혐의가 있는 한 여학생을 교학과로 데리고 갔다. 이 학생은 짧은 치마 속에 커닝 페이퍼를 숨겨두고 틈틈이 꺼내 보다가 정민에게 발각되었다. 교학과 여자 조교에게 부탁하여 확인한 결과, 치마 속 허벅지에 고무줄로 커닝페이퍼를 묶어 놓고 이것을 잡아당겨서 보다가 놓으면 다시 치마 속으로 원위치되는 기발한 장치(?)를 달고 있었다.
이 학생 답안을 무효 처리하는 등 후속 조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여기저기 들리는 고함,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소리, 구호 외치는 소리에 간간이 섞인 비명... 법대 건물은 캠퍼스 안에서도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그날은 정민의 학교에 전국의 대학교 학생들이 모여 '○○○○○○○○○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고,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하는 출정식을 했다. 그런데 행사 도중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갑자기 교내로 들이닥쳤다. 이에 놀란 학생들은 학교 본관 등 여러 건물로 피신하여 점거 농성에 돌입했다.
경찰은 헬기와 소방차,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학교를 포위하고, 단수·단전 조치를 하며 학생들을 압박하더니 마침내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쳐 천 명이 넘는 학생을 연행했다.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의 구속자 수를 기록한 이 사건이 벌어진 후,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정민은 휴교령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무엇보다 논문 원고들과 정민이 공부하던 책들이 무사할지 걱정되었다. 점거 농성이 시작되던 날, 시위 학생들이 경찰에 쫓겨 학교 건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정민은 눈에 보이는 서류와 자료 몇 개를 챙겨 김성철 교수를 모시고 겨우 건물을 빠져나왔다. 경찰에 포위되어 출입이 막히기 직전이었다.
출입이 통제되었던 법대 건물은 아직 원상 복구가 되지 않아 처참한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계단에는 바리케이드로 사용한 집기들이 널브러져 어수선했다. 벽에는 각종 대자보와 현수막이 일부가 찢긴 채 너덜거리고, 복도 바닥에는 학생들의 물건이 뒹굴고 최루탄가루의 흔적이 곳곳에 선명했다.
교수연구실 문을 여는 순간 정민은 고개를 돌리고 코를 막아야 했다. 순식간에 눈이 따끔거려 뜰 수가 없었고 폐 속에 불이 들어간 듯 숨이 뜨거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 창문을 깨고 날아 들어온 최루탄 때문에 온통 난장판이었다. 운이 없게도 하필이면 김성철 교수와 바로 옆 형법 교수 연구실이 직접적이 피해를 보았다.
학교는 물론, 교수연구실이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고 정상화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민은 시위할 때 못지않게 최루탄가루를 뒤집어썼고, 쓸고 닦고 정리하며 며칠을 눈물과 콧물로 보내야 했다.
김성철 교수는 정민을 '박군아!'라고 불렀다. 무슨 일을 시킬 때면 으레 말꼬리가 긴 그 호출 사인이 먼저 들려왔다. 아마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적어도 2천 번은 들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자다가 그 소리가 들려 느닷없이 잠에서 깬 적도 있었다.
눈물과 콧물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정민의 연구실 생활은 이후에는 무탈하게 흘러가는듯했다. 아울러 시험 답안지라는 우연으로 시작된 선배들 그리고 교수님과 정민의 인연은 날로 깊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그 술자리가 시작되기 이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