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자네한테 일을 맡기겠나

술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

by 화문화답

김성철 교수는 특별한 외부 일정이 없으면 아침 8시에 연구실에 나와서 저녁 6시에, 야간 강의가 있는 날은 밤 10시에 퇴근했다. 불필요한 농담이나 한가하게 보내는 시간을 싫어해서 늘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읽거나 썼다.


가끔은 둥근 테 안경을 이마 위에 걸쳐 놓고 연구실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였다. 같은 방 안에 종일 있으면서도 정민에게 '사적인'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가끔은 그런 분위기에 숨이 막혔지만, 워낙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정민의 성격상 그리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정민을 데리고 교직원 식당에 갔다. 연구실을 나서면서 식권을 사라며 가죽으로 된 검은색 동전 지갑을 열어 정민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하나둘 세어 주었다. 정민보다 한두 걸음 앞서 걷는 발걸음이 얼마나 느렸는지 정민은 가끔 마이클 잭슨처럼 문워크를 해야 했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대학원생 제자들과 함께 도봉산이나 북한산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정민에게는 딱히 즐겁지는 않았다. 가장 막내인 정민의 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주름이 잡혀있어 물을 담으면 그 부피와 무게가 몇 배 늘어나는 플라스틱 물통은 매번 골칫거리였다.


다행히(?) 정상까지 가지는 않았다. 중간쯤 올라가다 계곡이 나오면 그곳에서 준비해 간 재료로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막걸리를 한두 잔씩 마셨다. 그때는 계곡에서 취사가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주로 법학 이론과 판례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는데, 귀동냥이었지만 정민에게 꽤 유익한 내용이었다. 내려올 때는 물통 대신 다른 짐이 정민의 두 손을 차지했고, 그 무게가 올라갈 때 못지않았다.




박사과정 선배들은 모두 5명이었는데, 은행에 재직 중인 분이 두 명, 공공기관 연구원이 두 명, 현직 검사가 한 명이었다. 다들 당대를 '주름잡는' 중산층이고 엘리트였다. 한 번은 '왜 굳이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고생하느냐'라고 물었더니, 어떤 분은 '학문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또 다른 분은 '직업을 바꾸어 보려고'라고 대답했다.


진짜 꿈을 향한 노력? 아니면 평안 감사도 제가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쨌든 충분히 좋아 보이는 그런 자리를 두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애쓰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선배 중에는 정민과 성격은 정반대였으나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 선배가 있었다. ○○개발연구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붙임성 좋은 그분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자주 '번개'를 소집했다. 어떤 날은 김성철 교수가 참석했고, 또 어떤 날은 정민이 불려 나갈 때도 있었다.


하루는 그렇게 갑자기 소집된 선배들과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려는 정민의 손목을 동명이인 선배가 잡아끌었다. 선배의 집에 가서 형수에게 인사도 하고 같이 술을 한 잔 더 하자는 것이었다. 친근감의 표시이고 정민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기에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이 경기도 부○이었다. 전철을 타고 한참을 간 후에 마침내 그 집에 도착했다. 밤늦은 시간에 쳐들어온 정민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형수는 막상 술자리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유쾌하게 잔을 돌렸고 셋은 그렇게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다음 날 눈을 뜬 정민은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곗바늘은 이미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날 밤 새벽 3시가 다 되어서 잠들었던 기억이 났다. 선배는 출근했고, 형수의 말에 의하면 정민을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아 그냥 자게 두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날 오전까지 ○법연구소에 전달해야 하는 교수님 원고였다. 전문지에 실릴 중요한 논문으로 마감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혹시라도 늦을까 봐 전날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정민은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뛰고 또 뛰었다. 지독한 숙취에 괴로워할 틈이 없었다.


그 시간 김성철 교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정민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전날의 히스토리를 전부 파악하였고 정민에 대한 실망감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꺼칠해진 얼굴로 살금살금 연구실에 들어서는 정민을 보며 김성철 교수는 그 모든 사태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누가 자네를 믿고 일을 맡기겠나?"


정민은 연구실 출입을 금지당하였다. 몇 차례에 걸쳐 용서를 구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때마침 스승의 날이 다가왔고 정민은 카네이션을 사 들고 선배들 틈에 섞여 여의도에 갔다. 김성철 교수는 선배들과 함께 온 정민을 발견하였지만 더는 다른 말 없이 다시 예전처럼 정민을 대해주었다.




칸막이 너머로 '박군아!'하고 정민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교수 책상 쪽으로 건너가자 불쑥 메모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대법원 199○. 4. 17. 선고 96도 33○○ 전원합의체 판결-○○○○○○ 사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법원 판례를 찾아오라는 지시이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컴퓨터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대법원 판례를 구하려면 국회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 가서 일일이 뒤져야 했다. 그 길로 뛰다시피 신촌으로 향했다. 판례 관련 자료는 ○○여대 도서관에 가장 잘 정리가 되어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판례를 찾아오라는 심부름은 언제나 그곳으로 향했다.


방문 목적에 관해 입증하고 출입증을 받아 목에 건 다음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초행길도 아닌데 아무래도 여자 대학교이다 보니 올 때마다 이유 없이 긴장하게 된다. 게다가 그날은 날씨가 초여름답지 않게 무척 더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서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학교 안에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캠퍼스가 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신촌 로터리를 지날 때도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북적거렸을 거리가 한산했다. 그제야 문득 학교 이곳저곳에 붙어있던 대자보가 떠올랐다.




그날 서울역 광장에는 수십만의 시민과 학생이 모였다.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등 군부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이었다. 그들은 서슬 퍼런 군사 정권의 위압에도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쳤다.


그날 이후 계속되는 시민의 거센 저항에 굴복한 전두환 정권과 여당인 민정당 노태우 총재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선거권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1인 1표를 행사하여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군사독재 정권의 일부였던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6.10 민주 항쟁은 빛이 바래고 말았다. 비전이나 리더십이 부족했던 탓에 절반의 성공에 그친 것이다. 이때 주역들은 이제 장노년층이 되었고 386이 아닌 586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일부는 이 경험을 자산으로 30년을 넘게 또 하나의 세력이 되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복사한 판례를 들고 헐레벌떡 연구실로 들어갔다. 점심도 못 먹고 거의 반나절을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김성철 교수는 이미 찾아오라던 판례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늦는 거 같아서 다른 선배에게 시켰는데, 그 선배가 판례는 물론, 내용을 요약정리까지 해서 자료를 보냈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과연 김성철 교수가 정민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판례를 입수하는 방법?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스피드? 요약정리까지 더하는 능동적 자기 주도성? 그날은 교수도, 멋모르고 정민과 겹치는 심부름을 한 선배도 보기가 싫었다. 정민은 다음 날까지 끝내라는 논문 원고 교정을 일부러 이틀이나 지연시키는 깨알 복수를 했다.




정민은 아주 가끔 김성철 교수가 자신을 진정 제자로 생각하는지, 교수가 되기까지 자신을 키워줄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혹시 그냥 '무급 연구실 조교'로 적절히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 밀려오면,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다. 지금은 열심히 배우며 교수님의 이런저런 테스트를 통과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라고 자신을 달랬다. 무협 영화에서 보면 무공을 전수하기 전에 막일부터 시키지 않던가. 그러나 처음 연구실 입실을 제안할 때 말고는 정민의 미래나 진로에 대해 한 번도 직접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런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대학원 3학기부터는 교수 심부름도 중요하지만 당장 정민의 코가 석 자가 되었다. 곧이어 닥칠 졸업시험, 석사학위 논문 준비에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병역 문제가 남아있다. 그때는 '대학원생 등의 병역특례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른 석사장교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정민은 군대고시라고 불리던 이 시험도 준비하고 있었다.


달력에 나열된 숫자들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하루하루가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만 '일 타 쓰리 피'의 효과를 기대하며 책을 한꺼번에 세 개를 펴놓는 정신 나간 짓을 하기도 했다. 조급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 보려는 것이었다.


여전히 학생이면서 조금은 사회인처럼 선배들 사이에서 처신해야 했고, 무엇보다 김성철 교수의 한도 무한대 기대감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감이 컸다. 거기에 코앞에 닥친 본인 과제까지 오롯이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국제법 특수 연구, 일반 국법 연구, 민사소송법 연구, 자연법 일반 이론, 재산법 연구, 공법 일반 이론, 행정법 일반 이론, 사법 일반 이론...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이 과목들을 네 학기에 걸쳐 수강하여 평점 4.5점 만점에 4.5점,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면 100점이라는 성적을 받았다. 외국어 시험과 논문 심사를 통과하였고, 정민은 마침내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촌뜨기 신입생으로 캠퍼스에 첫발을 디딘 지 6년 만이었고 정민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석사학위를 받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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