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장교가 되는 길
조교 임무를 수행하는 기간병은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고, 장교인 구대장 및 교관은 대위가 많았다. 이들은 후보생들의 나이가 본인들보다 서너 살이 많았고, 대부분 SKY 출신이거나 고위층 자녀인 점을 고려한 탓인지 후보생들을 비교적 조심스럽게(?) 대했다.
정민을 비롯한 사관후보생의 정식 호칭은 예사 후보생(예비역 사관후보생)이었지만, PX를 싹쓸이할 정도로 먹을 것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사병들은 후보생을 산타클로스라 부르기도 했다.
한 생활관에 이층 침대 네 개가 놓여 있어 8명이 같이 생활했다. 서투른 한국말 대신 영어로 소통하거나, 주로 같은 학교 출신끼리 어울려 다녔다. 전반적으로 여건과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교육과 생활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관후보생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엄격했고 교육 훈련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는 길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육개장(육 개월 장교)'도 예외는 없었다.
민간인 신분과는 사뭇 다른 일상, 매일 반복되는 일과를 마치면 '며칠 남았다'는 단순한 날짜 계산을 하고 그 숫자를 자신만 아는 어딘가에 표시해 놓았다. 그것은 일종의 취침 전 '의식' 같은 거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침상에 누우면 자동으로 잠에 빠져 들었는데, 어떤 날은 입교 첫날의 타는 듯한 목마름과 신체검사의 강력한 기억이 꿈속에서 재현되기도 했다.
'뒤로 돌아!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내린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다. 항○이 최대한 보일 수 있도록 상체를 숙인다.'
정민뿐 아니라 다른 후보생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얀 가운을 입고 대위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쓴 군의관이 반복해서 소리를 지르기 직전까지 그것이 바로 눈앞에 닥친 현실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정민은 3구대 소속 3○○번 후보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앞뒤 번호 후보생과 자연스럽게 절친이 되었다. 한 명은 Y대 경영학과, 또 한 명은 K대 수학과를 졸업했지만, 유학생이 아닌 국내 대학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집안 형편 또한 비슷했다.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본능적 직감이 셋을 더 친하게 만들었다.
면회가 있는 날이면 셋이 덩그러니 남는 경우가 많았다. 면회가 없는 후보생은 자유시간을 가졌는데, 셋은 생활관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거나 족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날은 아침에 햄버거 같은 간편식이 제공되는 경우가 많아서 금방 배가 고파졌다. 그런데 식당에 가면 점심으로 밥이 아닌 라면이 나왔다.
아무래도 면회온 가족들이 준비해 온 외부 음식을 먹는 후보생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라면에다가 김치만 제공하면 끝이니 학교 식당 입장에서도 이 식단이 가장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군대 라면은 대량으로 끓이기 때문에 밖에서 먹는 봉지 라면과는 맛이 다르다.
그즈음 바깥세상에서는 라면에 대한 인기가 높아져 소비량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라면 회사들이 제조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식용이 아닌 공업용 우지(牛脂)를 라면 스프나 면 제조에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검찰은 수사를 통해 ○○식품 등 5개 회사가 공업용 우지를 수입하여 라면 제조에 사용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오랜 법정 다툼 끝에 대법원은 이들 식품 회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공업용 우지가 식품 제조에 사용될 수 없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고, 인체에 유해하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어쨌든 정민은 라면을 먹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른 후보생들 역시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면회가 끝난 다음이었다. 오후 4시가 되면 여지없이 단독 군장에 연병장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사제 음식을 먹었으니 기름기를 빼야 한다'는 웃지 못할 이유였다. 면회로 느슨해진 분위기를 다시 돌려놓기 위한 정신 재무장 차원이었을 것이다.
연병장을 몇 바퀴 돌고 나면 그나마 먹었던 라면 가닥이 신물과 함께 넘어왔다. 뭔가가 억울했다. 그날 먹은 거라고는 햄버거와 라면밖에 없는데 대체 뭘 뺀다는 말인가. 어느 고위 공직자가 왔다는 둥, 별이 몇 개가 떴다는 둥, 생활관에 난무하는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민의 가족들이 딱 한 번 면회를 온 적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누나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모시고 그 먼 길을 온 것이다. 그런데 대중교통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한다. 누나는 '여관방이라도 잡아서 부모님께서 잠시라도 추위를 피하게 해드렸어야 하는데, 길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면회 시간을 기다리는 실수를 했다'며 후회했다. 이후 정민은 가족들이 혹시라도 다시 오지 않도록 아예 면회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면회장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면회장은 교내 한쪽의 완만한 경사가 있는 숲 속이었다. 면회온 사람들은 고기를 굽기 위해 휴대용 가스버너를 들고 왔는데 한 후보생 가족이 이를 잘못 다루는 바람에 부탄 가스통이 폭발한 것이다.
면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후보생과 가족들은 혼비백산했다. 불행하게도 폭발한 가스버너 바로 앞에 앉아있던 후보생에게 파편이 튀었고, 그는 얼굴에 모래가 흩뿌려져 있는 듯한 화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모든 교육에서 열외가 되었고, 교육 기간 내내 흰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마스크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마스크맨과는 다른 유형이지만 교육 열외를 받은 또 한 명의 후보생이 있었다. 이 후보생은 팔목에 깁스하고 다녔는데 폭행 사건 피해자는 아니었고, 태권도 대련 과정에서 넘어져 다친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정민이었다.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했다. 태극 8장 품새를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하고 격파와 겨루기 연습을 했다. 물론 시멘트 바닥에 정권 단련을 '가장한' 얼차려도 수없이 받았다. 어찌 보면 태권도가 가장 힘든 과목이었다. 물론 기존에 단증이 있는 몇몇 유단자 후보생은 이 시간이 개인 정비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말이 개인 정비이지 그냥 쉬는 거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후보생의 부러움을 샀다.
승단 심사의 하이라이트는 대련이었다. 장소가 군대이니만큼 대련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는 전투력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전쟁터에서 적군을 만났을 때 어떻게 제압할 것인지를 묻는 시험이었다. 당연히 시작과 동시에 피차 사생결단을 내고자 달려들었다.
정민의 대련 상대는 운이 없게도 자신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정민의 발차기에 맞아 넘어졌고, 그 순간 팔을 잘못짚어 왼쪽 손목에 금이 간 것이다. 정민 역시 치열한 대련 상황에서 가슴을 맞아 갈비뼈에 모종의 충격을 입었지만 그냥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저녁마다 제대로 눕지 못할 정도의 통증으로 한동안 고생을 했다.
결과적으로 대련 상대였던 두 명 다 합격을 했지만 이후 정민은 팔에 깁스를 한 그 후보생의 총을 대신 메고 다녀야 했다. 하나도 무겁고 귀찮기 짝이 없는 총을 두 자루씩 메고 다니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민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끝까지 그 일을 자처했다. 그 와중에 본인의 가슴 통증은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총 두 자루의 멍에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태권도에서 발생한 부상의 여파는 사격으로 이어졌다. 정민은 25m 권총 사격 10발 중 9발, K2 소총 주간사격 20발 중 19발을 맞춰 무사히 통과했다. 전진 무의탁 자세로 대기하다 '멀(250m)가(100m)중(200m), 멀가중, 멀중가중' 순으로 전방에 표적이 올라오면 2보 앞으로 나가 엎드려 쏘는 사격이었다. 훗날 비효율성이 제기되어 이 FM(field manual)들은 모두 폐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격을 잘하는 정민이 이상하게 야간사격 측정에서 계속 탈락했다. 10발 중 8발 이상이면 합격이었는데 5발 이상을 맞추지 못했다. 게다가 갑자기 평가 기준이 9발 이상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탈주범 총기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그 유탄이 엉뚱하게도 그곳까지 날아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강도죄로 복역 중이던 지강○은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호송 교도관을 흉기로 위협하고 권총을 빼앗아 집단 탈주했다. 탈주 후 이들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금품을 훔치고 인질극을 벌이는 등 대담한 행각을 이어갔다.
특히 지강○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드러내었고, 당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도 했다. 이 희대의 탈주극은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었고,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다. 결국, 탈주 8일 만에 서대문구의 한 주택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지강○을 포함한 일부는 자살하거나 사살되었고, 나머지 탈주범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사격장은 학교에서 약 15km 떨어져 있었다. 야간 사격이므로 당연히 어두운 산길을 두 시간 이상 걸어가야 했다. 이미 합격한 다른 후보생들이 꿀맛 같은 휴식을 하는 주말 시간에 재측정을 받기 위해 그 길을 걷노라면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정민과 태권도 대련에서 손목 부상을 입은 후보생 역시 야간사격 불합격자였다. 오른손은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사격 시험은 봐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총은 또다시 정민의 차지가 되었다. 왕복 30km의 야간 산길을 총 한 자루를 더 메고 걸었다. 총을 머리 위로 세워 들고 사격장을 오리걸음으로 걷는 얼차려를 받고 난 뒤에, 불합격의 불명예까지 지고 돌아오는 삼중고는 내내 정민을 힘들게 했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달빛 하나 없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야간 사격은 안전을 위해 참호에 들어가서 거치대에 소총을 올려놓고 25m 전방의 표적에 사격하는데 각 호마다 조교가 한 명씩 들어가 있었다. 그날 정민이 들어간 참호는 3번 사로였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어렴풋이 드러나 있는 산등성이의 경계선과 특정한 나무의 모양을 기준으로 표적의 위치를 대략 가늠한 다음,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였다.
옆에 서 있던 조교가 다가오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표적 확인 다시 하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애초 정민이 잡았던 기준점과 정말 '바늘만큼' 조준선 정렬에 차이가 있었다. 조교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숨을 멈춘 다음, 힘을 빼고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3사로 명중이다. 그대로 쏴라!"
지휘통제탑의 사격 지휘관이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마 그도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정민은 조준이 움직이지 않도록 유지하면서 나머지 9발을 당겼다. 결과는 10발 중 9발 명중, 합격이다. 무려 3번의 재측정 끝에 겨우 합격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손목 부상 친구도 같은 날 합격했다. 이로써 야간 사격이, 아니 총 두 자루를 메고 하는 주말 야간 산악 행군이 끝난 것이다.
각개전투, 유격, 화생방 훈련.... 그 모든 교육 과정의 피날레는 육군답게 행군이었다. 공격 목표인 고지를 탈환하고 부대로 복귀하는 훈련으로 4박 5일 동안 200km를 완전군장으로 걷는 대장정이었다.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가? 국방부의 시계는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고 했던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행군 마지막 날, 군악대가 연주하는 팡파르를 들으며 마침내 학교 연병장에 들어섰다.
그 순간, 발가락 여기저기 잡히고 터졌던 물집의 통증도, A 텐트를 기어 나와 부은 발을 억지로 전투화에 욱여넣던 고통도, 배급받은 전투 식량과 우유가 얼지 않도록 품 안에 넣고 다니던 애틋함도, 앞사람 발꿈치를 놓치지 않으려 졸린 눈을 부릅뜨며 걷던 절박함도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거짓말처럼,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