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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서울로

인생은 선택이다

by 화문화답

정민의 '고3'은 제5공화국과 함께 시작되었다. 제5공화국은 2005년 M○○에서 방송되어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같은 제목 드라마의 영향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의 귀에 익은 정치 체제이다. 1980년 전두환이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서 당선된 후, 10월 27일에 공포된 제8차 헌법에 따라 1981년 3월 3일에 출범했다.


그 해에는 연초부터 대형 참사가 터졌다. 1981년 5월 경상북도 경산군 고모역 부근 매호 건널목에서 부산발 동대구행 보통 급행열차가 부산발 서울행 특급열차를 추돌했다. 앞서 가던 열차가 건널목 위의 오토바이를 보고 급정거 후 후진하다가 뒤따라오던 열차와 추돌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고로 사망 55명, 부상 233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또한 교육 정책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과도한 사교육을 억제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는 명분으로 대학별 본고사가 폐지되었고, 1981학년도부터 대입 학력고사가 시행되었다.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전환될 때까지 13년간 존속한 이 제도는 사교육 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대한민국의 교육 체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인문계였던 정민의 경우 국어I(한문I 포함), 수학I, 외국어(영어), 국사, 국민윤리, 정치경제, 사회문화, 세계사, 국토지리, 인문지리, 기술, 상업, 지구과학 등 무려 14개 과목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정민의 학교 학생들은 대입 학력고사를 치르기 위해 전세 버스를 타고 대도시인 대성으로 가야 했다. 약 250명이 여러 대의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가량 소요되는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대성 시내에 있는 허름한 여관에서 합숙한 후, 다음 날 시험을 보고 학교로 복귀하는 일정이다.


당시에는 개인 차량이나 대중교통이 불비하여, 시험 시작 시간에 맞춰 시험 장소에 도착하는 '당일치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수험생 컨디션 관리나 지각 사태 등 발생 가능한 돌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리스크 관리의 목적도 있었다.


숙박 업소에서는 한 방에 서너 명씩 잠을 잤는데 시험 보러 온 건지 놀러 온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좁은 구역 안에 많은 수의 사람이 밀집하다 보니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어떤 친구들은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들떠있기도 했다.


중요한 시험을 치르기 전날 마땅히 만들어져야 할 환경과 정반대였다. 그래도 공부 꽤 한다는 친구들인데 이 정도라면, 좀 노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의 숙소는 오죽하겠는가 싶었다. 특히, 정민처럼 민감한 성격에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학교에서 출발하기 전에는 사전 교육이 있었는데 시험을 치르는 데 있어서 주의 사항 같은 것이 아니라, 주로 협박이나 폭력 사태 예방에 관한 내용이었다. 강주 시내에는 여러 개의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정민이 다니던 학교와는 학력 차이가 크게 났다. 따라서 타교 학생들이 커닝(cunning)을 목적으로 협박하거나 이에 응하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모자를 벗고 갈 것, 배지와 명찰을 제거할 것 등 구체적인 행동 지침도 받았다. 한마디로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불량 학생 코스프레'를 하라는 것이었다. 정민은 수험장에서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품었지만, 신변의 위협이 된다는 충고에 수긍하고 지침에 따랐다. 물론 시험이 끝날 때까지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민은 무슨 정신으로 시험을 치렀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험장 분위기나 여건, 긴장감 등 모든 면에서 모의고사와는 차원이 달랐지만, 집중력을 확보하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다행히 시간이 부족하거나 OMR 카드 마킹을 밀려서 하는 등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 않고 시험을 마쳤다.


돌아오는 버스 안, 녹초가 된 친구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다들 눈을 감고 있어 절간처럼 조용했다. 차창 밖으로 어둑어둑해지는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위로 정민의 고등학교 3년이 파노라마처럼 오버랩되었다. 오직 오늘을 위해 갈아 넣은 날들이었다.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인제 와서 돌이켜 보면 어쩌면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편안했던' 시절이었다. 단순하게 공부만 하면 되는, 오직 나하고의 싸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디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정민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동안 못 잔 잠을 다 채운 듯 개운한 느낌으로 깨었을 때 버스는 학교 운동장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비몽사몽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이 집이 아닌 교실을 향해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인솔 교사들이 '집으로!'를 외쳤다. 비로소 시험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학력고사가 끝난 이후에는 대부분 오전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정민은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고,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해서 이틀에 한 번은 오후 시간에 테니스를 배웠다. 하루 20시간을 넘게 오직 책과 사투를 벌이던 일상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봐도 매일 시간이 넘쳐났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 잡념도 덩달아 많아졌다.


어떤 생각으로 시작하든 수렴하는 지점은 같았다. 과연 몇 점일까? 이런 고민이 쌓이고 묵다 보니 자꾸 안 좋은 느낌으로 변질하였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하였고 증폭되었다. 혹시 이대로 망하면 어떡하지? 재수할 여건이 되기는 하는 것일까?


그날도 심한 두통이 와서 일찍 도서관을 나왔다. 가장 친한 친구 성철이와 그의 하숙집으로 향했다. 물론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순히 '킬링 타임'과 '동병상련'의 차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했는지 옷을 갈아입고 나간 성철이 소주 두 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사 왔다. 이제부터 그 둘은 지금까지 인생의 최대 일탈을 시도해 볼 작정이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마시는 거지? 정민이 소주 한잔을 목에 넘겼을 때 드는 생각이었다. 이래서는 더 마실 수 없을 것 같아 큰 컵에 가득 따라 한 번에 삼켰다. 그리고 새우깡을 한주먹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참혹했다. 더 심해진 두통과 속 메스꺼움으로 꼬박 하루를 고생했다.




초조한 마음에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드디어 발표일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정민을 불렀다. 바로 느낌이 왔다. 잔뜩 긴장한 채 교무실에 들어섰다. 정민을 본 선생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민의 어깨를 툭 치며 말씀하셨다. 잘했다! 정민은 아무런 대답도, 질문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결과 통지서를 돌리기 전이라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점수를 듣지는 못했다.


결과는 그동안 우려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았다. 그해 대입학력고사 시험을 친 학생 수가 재수생을 포함하여 약 60만 명 정도였고 정민은 그중에서 상위 2%에 속했다. 그 정도 성적이면 인 서울(in seoul)은 물론이고 상위권 대학에 지원할 수 있는 점수였다.


그러나 점수만 나온다고 전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등록금은? 생활비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연이어 부닥쳤다. 문제는 다시 '돈'이었다. 고민해 봐야 뚜렷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정민의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이 들어왔다. 강주사대에서 4년 동안 등록금은 물론 월 20만 원의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는 것이었다. 큰돈이다.


정민으로서는 이 제안을 거절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거의 그쪽으로 결심이 굳어갈 무렵, 정민의 고민을 듣던 어떤 분이 '그래도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오래된 속담을 농담처럼 툭 던졌다. 지나가는 말로 한 이 한마디가 정민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꼭 사대에 진학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니었다. 정민은 법대에 진학해서 사법고시를 보는 것이 일관된 목표였다. 정민이 국민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경찰서에 불려다니는 아버지의 억울한 모습을 보면서 처음 먹었던 마음이다.


아버지는 마을의 이장을 지내셨다.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마을 일을 앞장서서 돌보셨다. 어머니까지 덩달아 마을 행사 때마다 사람들을 불러 밥을 해 먹이며 아버지를 도왔다. 순수한 희생과 봉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장인 아버지는 당시 전국 농촌의 이슈이던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마을 회관 신축을 추진했다. 정부 지원이 결정되어 구체적인 부지 선정과 공사가 시작되었다. 정민의 집 마당에는 시멘트 포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정부의 현물 지원품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그 일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반대 세력이 상존하기 마련이다. 아버지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장이 정부 지원 물품인 시멘트를 횡령했다고 고발을 했다. 이 건으로 아버지는 수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다. 결국, 무혐의로 종결되기는 했지만 늦은 밤까지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온 식구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지금처럼 학교 또는 학원에서 제공하는 전문적인 입시 전략이나 정보는커녕 진학 상담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특히, 지방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진로에 관한 조언을 들을 만한 경로가 없었다. 오직 서울대 진학! 이런 단순한 목표 의식 하나에 매달려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다가 막상 서울대 이외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니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정민은 강주사대의 제안을 사양하고 서울행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대학원까지 6년간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했다. 당연히 법대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과정에서 정민은 자신의 인생에서 첫 번째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두고두고 이 선택을 후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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