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틈으로 여명이 새어 든다. 벼린 칼날처럼 곧게 뻗은 빛은 아직 어슴푸레한 방안의 어둠을 몇 조각으로 갈라놓는다. 이 나라의 새벽빛은 강렬하다. 부신 눈을 살며시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될까?
"너 하나로 충분해
긴 말 안 해도 눈빛으로 다 아니깐
한 송이의 꽃이 피고 지는
모든 날, 모든 순간 함께해."
폴킴이 부르는 '모든 날, 모든 순간'이 흘러나온다. 알람 소리이다.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는 시간은 5시 30분이다. 대부분은 그보다 조금 일찍 깨어 있다가 이 노랫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다. 대신 저녁에는 '밥숟가락만 놓으면' 잔다. 옛날 부모님께서 초저녁부터 졸고 계신 걸 흉보곤 했는데 지금은 그게 내 모습이 되었다.
베트남에 와서는 저녁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술자리를 피하기 위해 업무상 꼭 필요한 미팅 외에는 가급적 사적인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술 마시면 다음 날 많이 힘들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마셔도 소주 한두 잔인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 소주는 알코올이 날아가 싱겁기 그지없고 마셔도 잘 취하지도 않는다. 병뚜껑에 비닐을 덮어 씌워 별도 포장을 더 했는데도 그렇다.
침대에서 나오면 먼저 밤새 수고한 에어컨을 끈 다음 모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방에 있는 에어컨을 켜고 자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기 때문에 거실 에어컨을 켜두고 방문을 다 열어 놓고 잔다. 어차피 혼자 밖에 없기 때문에 딴 사람 신경 쓸 거 없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실내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후텁지근해지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져 환기시키지 않으면 두통이 온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자면 땀띠가 날 정도로 덥다. 선풍기를 쓰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살갗에 와닿는 선풍기 바람의 싸늘한 느낌이 싫어서 쓰지 않는다.
침대를 정리한 다음 반바지에 반팔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반드시 기능성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서 불편하다. 햇빛 차단용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팔토시를 하고, 메쉬 소재로 된 러닝화를 신고, 이어폰을 끼면 완전 무장 끝이다. 이렇게 채비를 마치면 6시가 된다.
베트남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출근 시간이 8시인 회사도 있지만 많은 한국 기업들은 한국처럼 9시에 일을 시작한다. 8시만 돼도 해가 중천에 올라 날이 뜨거워지기 때문에 그나마 쾌적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5시 반부터 6시 반 정도이다. 밖에서 운동할 수 있는 축복받은 시간이다.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주로 뛰는데 쓴다. 출근하면 대부분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외근 나갈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아침에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려 운동하면 평소 부족한 운동량도 채우고, 간밤의 잠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찌꺼기 같은 스트레스까지 전부 날려 버릴 수 있다. 피트니스나 테니스, 골프 연습장은 늘 북적대고 사람들과 부대껴야 해서 잘 이용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1층은 주차장과 큰 도로로 이어지고 2층에는 아파트 여러 동을 관통하는 단지 내 길이 조성되어 있다. 대략 500m 정도의 직선 보행로인데 중앙에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길 양쪽에는 상가들이 쭉 이어져 있다. 차들이 다니지 않는 안전하고 쾌적한 길이다.
이 아파트에는 다수의 한국 사람과 소수의 다른 외국 사람들이 산다. 베트남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여기서 살 정도면 베트남에서 중산층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 사람 비중이 늘어난다는 것은 점점 베트남 부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층 출입문을 나서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이분들을 본다. 길 옆 대리석 벤치에 앉아서 서로 등을 두드려주며 마사지를 해주는 나이가 지긋하신 백발노인 분들이다. 친구 사이일까? 형제? 그렇게 서로의 등을 교대로 두드려주고 주물러 주며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진정한 인생 동반자 같다. 볼 때마다 마음이 찡해진다. 웬만큼 금슬 좋은 부부도 등 두드려 달라면 십 리 밖으로 도망가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어쩌면 그렇게 서로에게 다정하고 정성스러운지 새벽마다 보는 아름다운 황혼이다.
이 단짝 노인분들을 지나 길 끝까지 걸으면서 준비 운동과 숨 고르기를 한다. 길 끝에서 계단을 내려서면 수변 공원을 따라 가로수가 조성되어 있어 햇빛을 가려주는 한적한 산책로가 나온다. 이 코스를 크게 한 바퀴 돌고 나면 1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이 시간대에 움직이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나처럼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인데, 각각의 캐릭터도 다양하고 나름 콘셉트도 분명하다.
모시 저고리와 꽃무늬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으신 한 무리의 할머니들, 다들 특이하게도 토트백을 팔에 걸고 있다. 패션의 완성은 운동할 때도 양보할 수 없는 모양이다. 빨간색 반팔 티셔츠를 맞춰 입은, 딱 봐도 한국인인 이 부부는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몸매가 멸치 같다. 뛰지도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나란히 보폭을 맞추는 게 평소에도 찰떡 호흡일 것 같다. 너무 비대한 몸에 숨쉬기조차 거북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도 있다. 이 사람은 잘 다려진 밝은 카키색 작업복을 입고 있다. 바지에 넣어 입은 상의가 항상 절반쯤 땀으로 얼룩져 있다.
타이트한 민소매 상의와 화려한 레깅스를 차려입은 몸매갑 여자는 아침에도 보고 저녁에도 가끔 목격한다. 걸크러쉬를 뿜어내며 사람들하고 계속해서 인사를 나누는 게 이 구역의 '인기갑녀'임에 틀림이 없다. 실크 소재 슬립으로 보이는 짙은 자주색 속옷 차림의 중년 여성은 항상 벤치에 앉아있는 남편인듯한 사람을 바라보며 춤을 춘다. 어설픈 몸짓으로 빙글빙글 도는 동작을 주로 한다. 아무래도 속옷 차림이라 좀 아슬아슬해 보인다. 이 나라 여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잠옷을 입고 밖에 돌아다니기도 한다. 민망한 건 보는 사람의 몫이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작고 예쁘게 생긴 딸을 데리고 무술 연습을 하는 젊은 아주머니는 웬만한 남자보다 단단한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다. 펄럭펄럭하는 소리를 내며 오른손으로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가 무기인듯하다. 어떤 때는 수강생이 두세 명으로 늘기도 하는데 중도에 그만두는지 대부분은 딸하고 둘이다. 눈매는 아주 선해 보이는 반면 내공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혹시 그녀의 남편은 집에서 아내와 딸이 운동이 끝나고 먹을 음식을 요리하고 있지 않을까?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반려 동물 사랑은 이 나라도 한국 못지않다. 그런데 집중하지 않으면 아침부터 개ㅇ을 밟는 불쾌함을 겪을 수 있다. 송아지만 한 개들인데도 입마개는 물론 목줄을 안 한 경우도 눈에 띈다. 아마 이분들도 '우리 개는 안 물어요'라고 주장할 것이다. 압권은 가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무시무시한 개 두 마리이다. 개들의 주인은 젊은 서양인 부부이다. 엘리베이터 내부에 'sorry NO dog!'이라고 노란 바탕에 검은색 굵은 글씨의 안내문이 붙어 있지만 이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나저나 그렇게 큰 개 두 마리를 집에서 기르다니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반려 동물을 키우는 많은 분들이 나를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웃집 멍멍이가 외로워 죽겠다고 하루 종일 짓어대는 것을 외출한 주인은 알까? 간 밤에 다른 사람 눈을 피해 슬쩍 방치하고 도망간 멍멍이 ㅇ을 다음 날 자신의 눈으로 다시 목격했을 때 그 도망자는 무슨 생각이 들까? 왜 길을 가다 찔끔찔끔 실례하는 것은 멍멍이가 하면 영역 표시이고 사람이 하면 노상 방뇨가 되는 걸까? 깊은 밤 온 아파트를 흔들어 깨우는 길 고양이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화단에 집까지 만들어 주는 고양이 사랑꾼들은 들어본 적이 있을까?
찬성 반대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취향과 생각, 가치관을 존중한다. 다만, 다른 사람은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늘 조심하고 배려한다면 반려인도, 반려 동물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사람 구경도 하면서 1시간 30분가량 운동을 마치고 나면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숨은 가쁘지만 몸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마음도 상쾌해진다. 숨 고르기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 씻고 출근 준비를 마치면 8시 20분이다. 회사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여서 8시 30분에는 하루의 업무가 시작된다.
내가 5시 30분에 일어나는 덕분에 누리는, 빼놓을 수 없는 호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일출을 보는 재미이다. 거실 창문이 북쪽을 향해 나 있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동쪽, 왼쪽으로 돌리면 서쪽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5시 30분이면 막 해가 뜨는 시간이라서 커튼을 열면 동이 트는 하늘이 보인다. 일주일에 비 오는 날 하루 이틀 정도를 빼고 나머지 거의 매일이다. 주말 저녁에는 노을도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일출이나 일몰을 보며 잠시나마 '해멍'을 즐기는 시간은 언제나 옳다.
이 나라는 하늘과 바다가 참 예쁜 나라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일출과 하늘빛은 나에게 매번 선물 같다. 다만,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 아름다운 것들은 원래 그런 것일까? 나에게 내일이,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내일 아침 5시 30분, 이 마법 같은 시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