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천안고속도로 정안 IC를 나와 43번 국도의 시작점까지 약 20km를 더 가면 세종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000 공원이 나온다. 하늘을 찌를듯한 거목이나 낙락장송은 없어도 아기자기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즈넉한 곳이다.
입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장례식장과 화장장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자연장과 수목장 지역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달님의 집이라는 이름처럼 둥근 모양의 건물이 눈에 띄는데 이곳이 봉안당이다.
부모님 기일을 앞둔 주말, 아들 부부와 함께 부모님이 계신 봉안당에 다녀왔다. 1층에 있는 제례실을 이용해 아내와 함께 준비한 간단한 제수(祭需)를 올려놓고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신가요? 저희들 왔어요.
종교적 관점이나 유교적 관습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들에게 혼이 날지도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기일 또는 제사의 의미는 메모리 즉, 추억과 기억이다. 이렇게 자손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며 그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는 자리이다.
개장(改葬)할 결심
부모님께서 전에 계시던 곳은 낮은 산 중턱에 위치한 가족 묘지였다. 그곳에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작은 아버지 부부가 같이 계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그곳에 모셨고 그때 어머니 옆에 당신의 자리까지 미리 준비해 두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묘지 관리 책임은 내가 물려받았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하시던 만큼 산속에 있는 묘지 관리에 헌신적이거나 희생적이지 못했다. 또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핑계로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 벌초할 때 가서 살펴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밤나무며 철쭉이며 심어놓으셨건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마음속에는항상 부담감이 있었다. 그 지역에 폭우가 쏟아졌다는 뉴스라도 보는 날이면 개울가에 무덤을 만든 청개구리처럼 노심초사하며 그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 이제 나 자신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개장(改葬)을 하기로 결심했다. 현재 집안의 가장 어른이신 분을 설득하여 윤년, 윤달, 손없는 날이라는 까다로운 조건부 동의를 얻어냈고 나는 바로 실행에 착수했다.
첫 번째 난관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이 개장이라는 것도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봉안당에 모시려면 우선은 화장 예약을 해야 하는데 윤달, 손 없는 날 등의 조건에 맞추려니까 날짜가 극히 한정적이었고, 그 특정일에 수요가 몰리다 보니 예약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지난 해인 2023년의 경우 윤년은 아니지만 3월 22일부터 4월 19일까지 윤달이 있었다. 그중 손 없는 날을 정해서 예약을 시도해 보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예약 시스템이 오픈되는 화장 희망일 15일 전, e하늘장사정보시스템에 접속해 보았지만 오전 0시에 시스템이 오픈되자마자 예약이 끝나 버렸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 이게 이런 거였어?
올해는 2월 29일 있는 윤년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윤달은 없다. 따라서 언 땅이 녹을 만한 3월 중에서 손 없는 날을 잡았다. 절치부심하며 이번에는 철저하게 대비했다. 부모님 산소에서 가까운 화장장 두 곳을 정해 1순위와 2순위로 나누었다. 사전에 입력해야 하는 사항들을 숙지하고, 기억하기 어려운 내용은 메모해서 바로 옆에 준비해 두었다. 몇 차례 시뮬레이션도 마쳤다.
밤 11시 30분부터 휴대폰과 노트북을 열어 e하늘장사정보시스템에 접속한 후 0시가 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5분 전,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호흡이 가빠졌다. 이번만은 반드시 예약에 성공해야 했다. 3분 전, 1분 전... 그리고 0시 정각.
새로고침을 누른 후 1순위 화장장을 클릭했고 빛의 속도로 미리 학습해 둔 내용들을 입력한 다음 신청하기 버튼을 눌렀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식은땀을 닦으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모든 화장장 예약이 마감되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예약 현황을 몇 번 더 확인했다. 확실한 성공이었다. 동시에 시도한 매형은 실패했다. 간발의 차이였을 것이다. 이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다.
아, 믿고 하는 거쥬
개장 대행업체 선정은 현재 묘지가 있는 곳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업체들을 대상으로 했다. 세 개 업체를 리스트 업한 후 검색을 통해 평판이 좋거나 체계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곳을 찾았다. 부모님 산소를 옮기는 일인데 한치도 소홀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대부분이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업체였다. 먼저 견적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더니 어떤 사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견적은 왜유? 아, 서로 믿고 하는거쥬.'
실체를 알지도 모르는 대행업체에 수백만 원의 돈을 송금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그런데 그중 A업체는 접근 방식이 달랐다. 산(山) 일은 현장을 먼저 보아야 한다며 본인들이 현장에 가보고 나서 견적을 보내겠다고 묘지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3일 후 현장 방문 사진과 함께 서툴지만 견적서를 보내왔다. 이런 기동성과 적극성은 이 업체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사장님과 몇 차례 통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정성을 다해 모실테니 안심하라며 내가 우려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그런데 협의 과정에서 한 가지가 걸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났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아버지는 10년 정도가 지나서 아직 탈골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경우 화장장으로 이동할 때 운구차와 별도의 관을 준비해야 했다. 탈골이 완전히 되었다면 작은 크기의 이장관에 모셔서 내 차로 이송하면 되는 일이었다.
일단은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대비해서 준비를 하고 현장에서 확인된 결과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비용은 그에 따라 추가로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혹시라도 서로 소통이나 이해가 부족할까봐 수차례 확인하고 일부러 글로 정리하여 문자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결국 이 부분이 모두를 곤경에 빠뜨릴 줄은 짐작도 하지 못하였다.
도착순이라구요?
부모님을 모실 봉안당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사전 답사를 해 두었다.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가깝고 생전에 사시던 곳에서도 멀지 않다. 인근의 다른 봉안당에 비해 환경이나 관리 상태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한 칸에 유골함 두 개가 같이 들어가는 부부관으로 정했다. 안장 기간은 일단 15년으로 계약한 후, 1회에 한해서 15년 재계약이 된다고 했다. 30년 후에는 나도 이 세상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 이후 절차는 손자인 아들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위치를 임의로 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화장 유골 도착순이었다. 좋은 위치를 둘러싼 부정과 청탁을 방지하기 위한 규정인 듯했다. 만약 가장 윗단이나 가장 아랫단에 배정을 받는다면 아무래도 후손의 입장에서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돈을 더 지불하고라도 지정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그야말로 운에 맡기는 수밖에. 다행히 최근 진행 추세나 현재 비어있는 자리등을 감안하여 추정하여 볼 때 비교적 괜찮은 자리가 배정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일기예보에 비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점점 구름이 많아지더니 급기야 새벽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돌아가시던 날도 그렇게 비가 오더니. 출근을 서두르는 차들이 빠르게 늘어가는 서울을 빠져나와 부모님 묘지가 있는 부여군으로 향했다.
나는 운전을 할 때 가급적 라디오나 음악을 틀어 놓지 않는다. 운전에 집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광고로 도배된 라디오 방송이나 심지어 찬송가 같은 것을 크게 틀어 놓은 차를 타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교통체증이 시작되기 전의 한산한 고속도로, 쥐 죽은 듯 조용한 차 안, 비가 내려 축축한 데다가 어스름한 새벽빛이 어우러져 분위기가 스산했다. 문득 한 달 전쯤에 개봉한 '파묘'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이 출현하는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영화였다. 때가 때이니 만큼 나도 관람을 했다. 부모님 개장을 앞두고 어떤 정보나 교훈이 될만한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한국과 일본의 무속인 대결로 이어지는 흥미 위주의 영화였고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포클레인 같은 장비와 함께 대행업체 분들께서 벌써 와 있었다. 혹시라도 화장 시간에 늦을까 봐 서둘러 주실 것을 당부했던 것이 무색했다. 역시 시골 분들은 부지런하다. 작업 내용을 서로 확인하고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막상 부모님 산소를 연다고 생각하니 새삼 죄송한 마음과 걱정이 앞섰다. 나 편하자고 편히 잠들어 계신 분들을 깨우는 것이 아닐까? 살아 계실 때도 제대로 못하더니 돌아가셔서 까지 불효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회한이 머릿속에 맴돌자 어느새 눈물이 차 올랐다. 부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봉분이 열리고 나서 보니 아버지께서 생전에 조경수로 심어 놓았던 인근의 향나무 뿌리가 안쪽으로 뻗어 들어오고 있었다. 일하시는 분들께서 빨리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어머니 유골 수습은 무사히 끝나서 이장관에 모셨고 이어서 아버지 관을 열었다. 우려와는 달리 탈골이 다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행업체 사장님께서 당황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장관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경우를 다 대비해 달라는 내 말 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탈골이 되지 않았을 한 가지 상황만 고려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운구차를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장관이었다. 원래 크기의 오동나무관만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그 관으로 모시면 운구에서부터 화장까지 여러 가지가 복잡해진다. 그렇게 반복 확인을 했건만, 가급적 비용이 많이 나오는 선택지를 일부러 택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부모님 개장을 하는 날인데 모든 일을 좋게 마무리해야 했다. 매형께서 가까운 읍내의 장례식장에 연락을 취해본 결과 다행히 한 군데에 이장관이 있다고 했다. 누나와 매형이 급히 출발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비닐로 아버지 유골을 임시로 덮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가려드렸다. 나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지만 초조한 마음 탓인지,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한 게 죄송해서인지 추운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일각이 여삼추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이장관이 도착하였다. 서둘러 아버지 유골을 담아 내 차에 모셨다. 부모님 유골함과 함께 화장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긴장감으로 뻗뻗해진 몸과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예정 시간인 2시보다 일찍 화장이 완료되었다. 000 공원으로 이동하여 관리사무소에 화장확인서 등 필요 서류를 제출하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비용을 입금한 다음 봉안당으로 향했다.
자리는 어디쯤이 될까? 접수하는 직원이 힌트를 주기는 했지만 가는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제발!
앞장서서 가던 직원 분께서 마침내 한 곳에 멈추어 섰다. 저곳이다. 괜찮았다. 상하로도 죄우로도 비교적 중앙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끝났다! 개장이란 말 그대로 다시 장사 지내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을 다시 장사 지내는 어마무시한 일이 무사히 끝난 것이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 길로 서울까지 가는 것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는 나와는 달리 자꾸 봉안당을 뒤돌아 보는 누나와 매형의 발걸음은 더디었다. 만약 이 두 분이 안 계셨다면 언감생심 나 혼자는 절대 하지 못할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내 편이 되어 주세요
한국장례문화진흥원이 실시한 '2023년도 장례문화 대국민인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본인의 장사(葬事) 방법으로 매장(4.5%), 봉안(35.3%)보다 자연장(60.2%)을 선호하는 비율이 우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2025년부터는 해양장까지 허용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묘지 관리에 대한 부담과 그 부담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큰 것 같다. 사실 요즘에는 명절에 성묘를 가거나 차례를 지내지 않고 해외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쉽게 볼 수 있다. 성묘나 제사, 장사에 대한 전통적 관습에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불효가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과 심리적인 저항감을 해소하기 위해 디지털 추모 공간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직접 추모관을 만들고 고인의 영정 사진을 등록하여 차례 지내기, 헌화 등 추모를 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을 SNS를 통해 친지들과 공유한다고 한다. 나도 부모님 온라인 추모관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옛 어른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겠지만 그만큼 시대의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나의 부모님께서도 이런 변화에 대해 잘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언제나, 무슨 일이 있었어도 '그래, 알았다. 너희들이 편한 대로 하라.'며 자식들 편을 들어주시던 분들이다.
인연으로 기억으로
부모님께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함께하는 삶을 사셨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 한국전쟁과 피난 생활을 겪으셨고 평생을 농사지으며 흙 속에 묻혀 지내셨다. 그 시절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랬듯이 자식들 굶기지 않고 학교 졸업 시키는데 온 힘을 다하셨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향년 66세에, 아버지는 96세까지 사시다가 떠나셨다.
부모님 유골함 앞 위패는하지 않는 것이 깔끔하다고 의견을 모았었다. 하지만 자꾸 보니까 뭔지 허전했다. 앨범을 뒤져 부모님께서 같이 찍으신 사진들을 골라 보고 있다. 이곳에 잠들어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을 모를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해놓아야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는 묘비명(墓碑銘)처럼 글을 하나 써넣을 것이다. 두 분께서는 이곳에 찾아온 자손들에게 어떤 '뻔하고, 흔한 말'을 들려주고 싶을까? 혹시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