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신기록을 연일 경신하던 극한 폭염이 꼬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낮에는 여전히 살갗이 타 버릴 듯한 강렬한 태양이 작렬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지만 그늘을 찾아가며 반바지 차림에 스포츠백을 메고 커센(커뮤니티센터의 줄임말, 이하 같음)으로 향한다.
출퇴근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자 가장 먼저 시간의 홍수가 밀려왔다. 이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직업 사회에서 이미 아웃 오브 바운드되었다는 현타의 시간을 마주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퇴직자 재능 기부 같은 아름다운 말은 최저 임금에 허드렛일을 가장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비경제활동인구로 남아, 남은 내 인생을 '창조적' 그리고 '방어적'으로 살기로 했다. 글쓰기처럼 창작을 하거나, 무언가 하고 싶은 목표를 이루어 가는 삶, 질병 같은 각종 위협 요인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삶이 그것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퇴직 후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로 건강을 꼽는다. 삶에 대한 집착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문제가 인생 최대 리스크로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몸이 아프면 본인이 힘들다. 아프면 나만 손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년의 병원비는 돈을 빨아먹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
지난해 종합건진에서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들었던지라, 이 참에 나도 리스크 헷지 차원에서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 수영장, 헬스장, 골프연습장으로 구성된 커뮤니티센터가 있다. 애당초 수영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헬스와 골프 결합상품에 등록했다.
가까우면 제일이지
이 커센의 단점은 일단 빨간 날은 다 쉰다. 시설이 낙후되어 있지만 재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렇게 쾌적하지 못하다. 관리나 청소 상태도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격이 나름 합리적이다.
월요일은 정기 휴무일이고 주말에는 나가지 않는다. 평일에 일하고 주말을 이용해 운동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깨알 배려'이다. 대신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전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에는 사람이 많아 복잡하다. 9시를 전후해서는 60대 전후의 아줌마들이 점령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운동 기구 위에 앉아서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수다를 떠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잘 먹는 것도 운동이라나? 그러다가 운동기구를 바꿀 때는 서로 맞교대한다. '누구야, 나랑 바꾸자!' 이런 식이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사이가 가장 한가하다. 나는 보통 10시쯤 커센에 도착해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골프 연습장, 웨이트 트레이닝, 트레드 밀을 뛴다음 샤워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나의 루틴이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난 지금, 5kg 정도 감량했다. 웨이트를 아주 무겁게 하지 않기 때문에 울퉁불퉁 근육은 없지만, 배가 나오지 않았으며 대근육이 살짝 갈라져 있고 부분적으로 잔 근육이 생겼다.
검은 안경테 vs. 빌런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인데도 헬스장 안은 후텁지근하다. 4인치 소형 앰프 스피커에서 귀에 익지 않은 모데라토 음악이 무한 반복 되고 있다. 대략 2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각자 운동 기구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남녀 비율은 거의 반반 인듯하고 20대 이하 두세 명, 40대 이하 네다섯 명, 그리고 나머지는 50대 이상이다. 이곳 역시 고령층이 많다.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음을 옮기는 노인 분도 계신다. 이 분이 기구를 만질 때마다 조마조마하다.
"쓰세요. 쓰면 될 것 아녜요."
헬스장 한쪽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아니, 수건을 깔아 놓고 있는 건 딴 사람 쓰지 말라는 표시 아닌가요?"
중년의 남성이었다. 숱이 없는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썼고 검은색 운동복을 입었다. 번들번들 땀이 밴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지금 계속 쓰고 있는 거예요."
빌런이다. 검은 안경테 아저씨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저 사람.
"그러면서 쓰라고요? 기구를 한 가지씩만 사용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내 맘대로 지,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여기 혼자만 사용하는 곳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없는데 왜 혼자만 그래요."
"에이, @#$%^&*!'
마음속으로 보내는 내 응원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해진 검은 안경테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과 끌끌 혀를 차는 소리를 남기고 휑하니 헬스장을 나갔다. 반면, 의기양양해진 빌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이 하던 운동을 계속했고 사람들은 그런 빌런의 모습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혹시 저들도 나처럼 검은 안경테를 응원한 것일까?
요새 같이 누가 일본도를 휘두를지 모르는 세상에 그 정도만 해도 용감했다. 검은 안경테님 우산은 가져오셨으려나? 창밖에는 시원해지기는커녕, 습도 상승을 예감케 하는 빗줄기가 한바탕 쏟아지고 있다.
그는 진정 빌런인가
큰 키에 몸집이 보통 이상인 그는 언제나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진한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뽀글뽀글 파마를 했다. 눈 밑과 볼 살이 늘어진 얼굴에는 세월이 묻어 있어 근엄한 표정이 역력하다. 늘 똑같은 회색 무지 반팔 상의와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귀에는 꼬리가 긴 블루투스 이어폰을, 손에는 권투 글로브처럼 두꺼운 손목 보호 장갑을 끼고 있다.
그는 헬스장을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폭넓게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운동 기구를 한 가지씩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동시에 쓴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덤벨 벤치프레스에 수건을 깔아 베이스캠프를 차린 다음, 레그 프레스, 케이블 크로스 오버, 벤치 프레스를 짧게 짧게 수시로 오간다.
얼핏 보면 '이 만큼은 내가 사용 중이니 접근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계선 같은 것을 쳐놓은 느낌이다. 커다란 덩치에 우락부락한 얼굴까지 오버랩되면 그의 '나와바리'에 있는 기구들을 쓰기가 망설여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에 못지않은 분들도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운동 기구에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겨 있거나, 낄낄 거리며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들은 한 가지 기구를 장시간 점유하고 있으니, 다른 이에게 주는 피해가 그나마 한정적이다. 당분간 그 기구만 사용하지 못하니까.
빌런이 운동할 때 모습을 보면 대흉근이 돋보인다. 저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니까 몸이 좋구나.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샤워장에서 옷을 벗으면 그의 반전 실체가 드러난다. 대흉근은 여유증(女乳症;여성형 유방증)이 아닌가 의심스럽고, 복부는 비만으로 늘어져 있다. 운동할 때 보이는 몸과 딴 판이다.
운동이 끝난 빌런은 운동복을 벗어 들고 샤워장에 들어간다. 옷을 바닥에 패대기쳐 놓은 다음, 샤워기를 튼다. 옷이 물을 머금으면 쪼그리고 앉아 빨래를 시작한다. 그렇게 세탁한 운동복은 탈수기에 돌려놓고 나갈 때 가지고 간다. '이곳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때를 미는 행동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내려다본다.
조연이 출현한 적도 있다. 그는 빌런과 아는 사이인 듯 서로 인사를 나누더니 벗은 빌런이 쪼그리고 앉아 빨래하는 옆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들고 온 파란색 스포츠 타월에 물을 적시더니 그걸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때리며 마사지(?)하는 게 아닌가.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철썩철썩! 그 투샷이 마치 코미디 영화 속 덤 앤 더머를 보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샤워장에서 혼자 샤워를 하고 있는데 빌런이 들어왔다. 빨래를 끝낸 그가 샤워를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지린내가 퍼졌다. 내가 뒤를 돌아보았고, 빌런과 눈이 마주쳤다. 나 아니면 그인데 나는 분명히 아니다. 그럼 누구일까? 사람들은 주로 혼자 있을 때 또는 남몰래,상상도 못 할 어이없는 행동을 한다.
샤워장을 나와 세면대와 거울이 있는 곳에 드라이어가 비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 나무 벤치가 있다. 상단에 샤워장 안에 붙어 있던 것처럼 '이곳에 옷장 안에 들어갈 물건을 놓아두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문구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무 벤치 위에는 스포츠 가방과 운동화, 양말, 화장품 가방, 옷 가지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것들의 주인 역시 빌런이다. 혹시라도 그쪽에서 드라이어를 쓰고 있노라면, 서로 살이 닿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물건 옆으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자리를 선점해 놓으려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어차피 다시 꺼내 입을 옷이니까 아예 넣지 않는다는 '효율적 사고방식'일까? 그리고 정말이지 보기 싫다.맨 위에 벌렁 뒤집어져있는 그것, 허리밴드가 늘어나 쭈글쭈글하고 보풀이 일어난 드로즈 팬티 말이다.
프라이빗 헬스장
물론 다 이상한 것은 아니다. 고맙게도 빌런은 샤워 도중에 카악카악 거리며 가래침을 뱉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비위가 약한 탓에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십리 밖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또한 빌런은 운동 기구 사용이 서툰 여성분이 보이면, 당사자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선행(?)을 가끔씩 베풀기도 한다.
자, 이쯤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과연 헬스장 빌런인가? 성격이 좋고 이해심이 바다 같은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빌런은 무슨.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그 사람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그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그럴 수도 있다. 사례를 적시하다 보니 특정인의 특정 행위만 부각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 행위를 그 사람만 하는 것도 아니니까. 또한 나의 루틴에 영향을 미치거나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적당히 피해 다니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분명히 이 구역의 빌런이다.
그렇다면 다른 곳은 어떨까. 요즘에는 1인 PT샵에 이어 1인 헬스장 또는 프라이빗 헬스장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용 요금은 시간당 5,000원에서 15,000원이라고 한다. 이런 트렌드를 보면 헬스장 빌런은이 커센에만 있는 건 아닌가 보다.
베이징 비키니
제주에 여행을 온 중국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아이들 배변을 시키는 행위나 속칭 '베이징 비키니'를 보면서,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행위가 사회 상규(社會 常規)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아무리 비난해 봐야 소용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일부사람들은 왜곡된 소신이나 몰염치 때문에자신들의 어긋난 태도를 변화시키지않으려 한다.만약 그가 빌런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 사회의 보편적가치와 객관적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계몽과 환경 조성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공정하게사유(思惟)하는 평균인이, 건전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옳다고 승인한 정상적인 행위"를 지향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소소하지만, 새로 등록을 할 때마다 협조문이나 약속문 같은 것에 서명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자신의 특정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커센측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