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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술꾼 Mar 31. 2023

42번의 봄과 위스키, 설렘에 관하여

마흔두 번째 봄을 맞았다.

벚꽃이 비처럼 내리고 꼬냑 향기 같은 온갖 꽃내음이 피부에 와닿는다.


봄이 왔다. 

오래된 창틀에서 새어 들어오던 찬바람이 이제는 기분 좋게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푸근해졌다. 아직 긴 외투가 필요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팔로도 해결되지 않을 더위가 덮쳐 올 것만 같다.


봄이 왔다.

그런데 설레지가 않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면 마음 설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감정이 올라오지 않는다.

따스한 햇살과 만개한 벚꽃 사이에서 한동안 멈추어 서서 봄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랑했는데 무덤덤하게 봄을 보내고 있다. 이런 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일까? 마흔두 번째 봄이라고는 하지만 십 대 때는 봄의 소중함을 몰랐고 이십 대에는 봄이 빛나는 만큼 나의 젊음도 빛났다.

삼십 대가 되어서는 봄을 충분히 즐기게 됐다. 겨우내 움츠려있던 세상이 피어오르는 생동감이 너무 좋았다. 봄이 되면 괜스레 차를 타고 다니며 따스한 햇살을 만끽했다. 결혼 전 지금의 아내와 손을 잡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가슴이 터질 듯 봄을 온몸으로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런 감정이 사라져 가고 있다. 꽃은 그냥 꽃이고 봄은 그냥 봄이다. 겨우 마흔두 번째 봄 만에 이럴 수가 있다니.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 설레는 일이 조금씩 사라진다.

아쉽다. 하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한편으로는 안정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호르몬에 지배를 당하듯 세상의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감정에 충실했던 젊은 날의 나는 이제 세월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아직 웹툰과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고 윤하의 음악을 좋아한다. 마음에 드는 영화나 드라마를 발견하면 밤잠을 줄여가며 즐긴다. 설렘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정은 남았다. 그리고 삶의 안정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딸은 내 손을 잡을때 주먹을 꼭 쥔다.

봄 꽃을 보며 설레지는 않지만 일상의 소중함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을 딸의 손을 잡고 함께 걸을 때 기분이 참 이상하다. 조그마하던 손이 언제 이리 컸는지. 나를 닮다 못해 단점까지도 닮아버린, 나와 똑같은 딸과 함께 꽃길을 걸을 때면 젊은 날 느꼈던 설렘은 아니지만 삶이 주는 무게와 그 무게로 인한 안정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위스키는 오크통에서 길고 긴 잠을 잔다

내 손안에 담긴 딸의 손의 무게가 커갈수록 내가 더 성장하듯이 위스키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어내며 숙성된다. 세월의 무게를 얹고 살아간다는 점이 위스키가 가진 매력이라 생각한다. 위스키는 세월의 무게감으로 태어난 술이다. 오크통에서 길고 긴 잠을 자다 세상에 나온 위스키는 세월의 무게와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술이다. 그런 세월을 마시며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위스키가 참 좋다.

아름답지 않은가.


세월의 무게감을 안고 있는 위스키는 중후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저숙성의 위스키들은 도전적이고 거칠다. 인생과도 닮아있다. 젊은 날에는 넘치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어 무엇이든 해보려 노력하고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고민하고 도전했다. 의미가 없는 일이어도 상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했다. 도전은 어리석은 행동일지라도 청년의 특권이자 권리이다.

하지만 중년에 접어든 내 가족의 일상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기에 나의 행동과 결정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내 삶의 중심을 잡고 있지 않다면 내 삶은 흔들릴 것이고 그 여파는 가족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그렇기에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가족을 생각하며 참아내야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이고, 이 선택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것이 어른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한 잔 따라보자.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고 내일을 버텨나가 보자.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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