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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부건 Apr 20. 2019

의인처럼 뚜벅뚜벅

의인 윤한덕과 <걷는 사람, 하정우>

영화평론가 백 교수님이 이끄신 <어따대구> 모임. 대구 수성못의 경복궁에서 만찬과 만담 만끽했습니다.

모임이 있어 대구 가는 길. SRT 안에서 윤한덕 선생님을 새삼 떠올렸습니다. 만찬 때 제가 맡은 small talk 시간을 그의 이야기로 채워볼 생각입니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 제대로 평가된다. 장례가 끝나고 모인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야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지난 설 전날 사망한 윤한덕 선생님. 의사로 26년, 응급의학과전문의, 복지부 부이사관,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돈과 명예를 모두 가질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온 윤한덕. 순직한 그의 장례 절차 중 진실이 밝혀진다. 안양에 오래된 전세 아파트, 1억 빚, 미망인과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 자녀 두 명. 이제 아이들 등록금 걱정에 전업주부 미망인이 생계를 책임진다.



그는 2012년 중앙응급의료센터가 보건복지부에서 분리될 때 부이사관이었지만, 공무원 신분을 포기하고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 센터장으로 남아서 대한민국 응급의료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축했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헌신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센터장 업무에 전념하느라 진료수당을 받을 수 있는 권리도 포기하고 동료의사의 3분의 1에 불과한 보수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직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더니 결국에는 하나 밖에 없는 생명까지 다 바쳤다.

3년을 쏟아부으면 기술자. 전문가 되려면 7년 더 연마해야 합니다.    윤한덕 센터장님은 응급의료 시스템의 최고 전문가이셨습니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고 이 시대의 의인이다. 대한민국 응급실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간과 열정 그리고 그의 생명까지 내어주었다. 진보 과정이 쉽지 않았다. 그의 희생을 통하여 후진적인 응급의료 시스템이 혁신을 이룬 결과 20년 전에 비해 우리나라 응급의료 시스템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발전한 응급의료에 따라 생사의 기로에 있는 수많은 응급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중의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하는 사람, 의인이고 영웅이다.

윤센터장은 지난 4월 5일 보건의날 행사에서 국민훈장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 윤한덕! 그를 알면 알수록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의 삶에 대한 스토리가 펼쳐질수록 존경의 마음이 커진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인간 윤한덕’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보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 관련된 자료와 스토리를 수집하고 공유해서 널리 알려야 한다.


윤한덕 센터장님은 바라던 응급 의료 환경을 만들어낸 분입니다.

인플루엔자 A와 B가 겹쳐 자택 격리 중인 초딩 응급환자를 돌보며 <걷는 사람, 하정우>를 완독하였습니다. 에세이 말미에 담긴 그의 다짐이 윤한덕 의인의 뜻을 잇고자 하는 제 마음과 쌍둥이처럼 닮았더군요.


선암호수공원의 하조안. 독감이 뿜은 고열이 딸내미 몸을 고래처럼 휘젓고 다녔네요.
신이시여!
당신께서 예비하고 계획하시는 일,
그저 묵묵히 따라 걸어갈 수 있도록
제게 건강한 두 다리만 허락해주십시오.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만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만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아직은 척박한 응급 의료 환경에서, 한 발 더 내딛는 무모함을 이어가볼 생각입니다. 대한민국 의료가 늪에서 하루 빨리 탈출하길 줄기차게 염원하며, 의인처럼 뚜벅뚜벅.


대장부 일을 도모함에 마땅히 마음을 크고 정대히 가져 ‘내가 죽어도 한번 해 보리라.’ 하고 목숨을 생각지 말아야 할지니 작은 일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道典 8:22:2~3

동대구역 옆 신세계 백화점의 스벅에서 의기투합.

대구로 건너와서 정자영 선생과 모처럼 재회했습니다. 전공의 시절에 모교 병원 응급의료센터에서 동고동락하며 한솥밥 먹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 흘렀네요. 그 사이에 정 선생은 소방공무원이 됐고, 유부녀도 됐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강원도 산불처럼 번지는 공허함은 부단한 공부로 진압하라고, (저도 잘 지키지 않는) 처방전 남발했습니다. 승진 시험 공부에 매진하면 여러모로 유종의 미 거두겠네요. 달라진 직함으로 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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