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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Aug 22. 2022

언어의 목적

원저자는 왜 썼을까?

    사랑하는 연인과 식사를 한다. 맛부터 분위기까지 완벽하다. 세심하게 신경 써서 준비한 연인을 향해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기쁨의 연기가 내면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사랑스럽다. 그런데 연인의 시선은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다. 로맨틱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단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머릿속에 또 다른 연기가 더 크게 피어오르며 잔잔한 울림이 퍼진다. ‘매번 이런 식이지.’ 꿈결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연기는 이내 새로운 연기에 묻힌다. 새 연기는 새카맣게 산화되어 온 마음을 그을린다. 표정이 굳는다. 마음이 닫힌다. 무언가를 감지한 연인은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묻는다.


     “뭐, 또 왜 그래? 갑자기.”


    대화를 나누기 위해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러모은다. 다양한 어휘를 사용해 내면에서 피어오른 연기의 원인과 모양을 명확하게 설명해본다. 상대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피곤하다는 표정이다. 마음이 전달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며칠 뒤 같은 일이 반복된다. 손짓과 발짓, 음의 높낮이까지 활용하여 대화를 다시 시도한다. 짜증이 돌아온다. 공감과 이해를 바라고 성의껏 설명했건만, 상대는 핑계 대지 말고 더 바라는 것이 있으면 명확히 말하라고 소리친다. 진심은, 전달되지 않았다.      




    전하고 싶은 말이 툭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실상은 전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피어난다. 그대로 꺼내어 보여줄 수 있다면 편리할 테다. 그러나 내면은 각자 분리되어 존재하기에 타인에게 내보일 수가 없다. 가장 닮은 단어를 추리고 최대한 비슷한 형태로 엮어 문장으로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 나의 마음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상대방의 마음에서 똑같이 재현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어떤 마음은 너무나 복잡해서 단순한 몇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마음은 연기와도 같기에, 이를 말로 묘사하는 것은 연기를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술가는 그러한 내면의 연기를 가시적인 형태로 재구성한다. 그중 비유와 은유로 이야기를 직조하는 사람을 소설가라고 부르지 않을까 싶다. 독자가 어느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면, 그건 그 독자가 저자의 마음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에서 피어난, 혹은 피어났던 연기가 저자의 것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업으로 소설을 번역하고 있다. 문학 번역가는 끝없이 고민한다. 원문의 단어를 고수할 것인지, 독자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변형을 줄 것인지. 고전의 경우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미 돌아가신 원저자와 상의할 수도 없고, 독자의 취향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정답을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번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의 기준을 만드는 일뿐이다. 같은 작품 안에서야 당연히 일관된 기준을 사용해야 한다. 요즘처럼 한 작품을 여러 사람이 번역하는 시대라면, 일관된 기준을 자신의 모든 작품에도 적용해야 할 것이다. 작가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번역가를 보고 번역본을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기준을 잡기 위해서 언어의 본질을 생각한다. 


    언어는 내면을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수단이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은 결국 저자의 내면에 피어난 이야기를 언어라는 수단으로 묘사한 것이다. 묘사를 통해 저자는 독자의 내면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피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니 ㄱ언어를 ㅎ언어로 정확하게 변환하기보다는, ㄱ언어를 사용하던 원저자의 내면을 ㅎ언어를 사용하는 독자의 내면으로 옮겨오는데 지향점을 두기로 했다. 단어 자체의 치환을 고집하기보다는, 문맥에 맞춰 숨겨진 의미까지 충분히 옮겨오기 위해 약간의 변형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사실 이는 고전을 번역하는 사람이 성취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목표다. 세계적인 작가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겠다는 도전과 같기 때문이다. 겸손과 겸양을 미덕으로 배운 한국인으로서, 감히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완벽하게 마음에 들게 정돈된 것도 아닌 글을 공개하는 이유는, 독자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을 여러 출판사가 각기 다른 번역가를 앞세워 출간하는 시대가 왔다. 표지와 판형 이외에도, 번역가 이름 석자가 독자의 선택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는 각 번역가는 자신의 지향점을 독자들에게 명확히 밝혀야 한다. 구구절절 설명한 번역에 관한 단상이, 독자의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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