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선에서 사라진 '돌봄'
우리는 숫자 하나에 갇혀 사고가 경직되는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간병비 급여화를 둘러싼 ‘15조 원’이라는 단어가 선거를 휘감고, 마치 그 주장이 세상의 전부인 양 공기를 채운다. 그 숫자를 들은 순간, 사람들은 숨이 막힐 듯 긴장에 빠지며 재정 악화, 포퓰리즘, 퍼주기 복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들어 그 숫자의 바깥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숫자가 가리키는 저 건너편에는 돌봄의 현장이 있고, 우리가 잊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서 있다. 그 얼굴 속에는 나와 내 가족이 있을 수도 있다.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50525/131676862/1
23일 열린 두 번째 TV토론에서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간병비 급여화에 연간 15조 원이 필요한데, 재원 마련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15조 원은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이 추산한 금액으로, 환자 중증도를 5단계로 나눴을 때 중증도가 높은 1~3단계 환자에게 건강보험을 적용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기사 본문 중-
‘15조 원’이라는 허상 뒤에 가려진 진실
건강보험연구원이 요양병원 중증 환자를 대상으로 ‘간병비 전액 건강보험 지원’을 가정해 산출한 15조라는 금액은 어디까지나 최댓값에 가까운 추정치다. 아무런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수요 총합에 단위 비용을 곱한 허술한 연구다. 시민단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범위를 다르게 잡아 연간 3조 6천억 원으로 계산했고, 실제로도 대상 질환 단계와 지원 수준, 서비스 제공 방식에 따라 이 숫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보수 정치권은 15조라는 단 하나의 숫자를 고정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난다”는 목소리를 반복한다. 사람들의 불안감을 키우기에 이보다 좋은 전략이 또 있을까 싶다. 특히 새로운 세대의 기수를 자처하는 이준석 후보는 마치 이 급여화로 젊은 세대의 부담이 가중된다는 근거 미약한 감정의 호소를 반복하고 있다. 박탈과 도태의 두려움을 자기 정치 세력화하는 아주 나쁜 정치행위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이미 사적으로 지출되고 있는 간병비가 2018년 6조 9천억 원에서 2023년 10조 원을 넘겼다는 사실이 숨어 있다. 가정마다 돌봄을 위해 쏟아붓는 비용은 ‘보이지 않는 세금’이나 다름없다. 만약 이 돈을 공적 재정으로 일부 전환한다면, 가정의 무게는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사적 부담의 영역을 공공의 연대적 지원으로 치환하는 것이 복지의 기본이다. 예컨대 연간 10조 원 규모의 지출을 공공에서 분담한다면, 대다수 가정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가량의 돌봄 비용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는 경제학적 이론 논리로 보자면 남는 장사다.
간병비 급여화가 가져올 경제적 편익은 이뿐만이 아니다. 고령화가 심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돌봄 산업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고용 창출 분야로 떠오르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의 간호·간병통합서비스 시범사업은 이미 간병 인력 수요를 급증시켜, 일자리 창출 효과를 보여주었다. 통합 서비스 시행 전후를 비교한 결과, 간호사 한 명당 담당 환자 수가 14명에서 9.9명으로 감소하며, 병원은 간병 인력을 추가 고용했다. 이에 따라 간병·요양 분야에 연간 수만 명의 신규 일자리가 발생했으며, 가계 소득이 증대되는 효과도 확인되었다
돌봄이 사라진 일상, 그 무게를 누구의 몫으로 돌릴 것인가
돌봄의 현장에는 부모님의 손을 놓지 못해 업무를 중단한 자식들이 있고, 밤새 깨어 음식을 삼키지 못하며 울음을 삼키는 이들이 있다. 병원 침대 곁을 지키느라 삶의 끝자락을 버티는 이들도 있다. 간병비가 아닌 ‘삶의 무게’를 떠올릴 때, 돌봄은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문제다. 돌봄을 가족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릴 때, 정부가 외면하는 그 빈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지막이 부서진다. 그 부서진 틈을 우리는 메워야 한다. 이 틈도 사회적 비용의 손실이며 후퇴의 빌미가 된다.
간병비를 공적 재정으로 일부 전환하면, 가족 돌보미는 경제활동에 복귀할 수 있다. 여의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간병비 급여화가 시행되면 돌봄으로 인한 노동 시장 이탈이 크게 줄어들어, 연간 수조 원대의 세수 증가 효과가 기대된다. 또, 요양병원 내 질 높은 간병 서비스는 낙상이나 욕창, 감염 등 합병증을 줄여 재입원율을 낮추고, 장기적으로 의료비 지출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보인다. 이 같은 장기적 절감 효과를 고려하면, 간병비 급여화는 단순한 재정 지출이 아니라, 장기적 건강보험 재정 절감의 선제 투자다
가까운 일본 사례를 살펴보면, 급여화된 간병 서비스가 입원기간을 평균 10% 단축시키고 재원율을 5% 포인트 낮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간병비 급여화는 단순한 재정 지출이 아니라 장기적 건강보험 재정 절감의 선제 투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그저 사회보험의 재원을 갉아먹는 시혜성 정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더불어 정신적·정서적 안정 효과도 주목해야 한다. 간병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우울증·가족 갈등·이혼·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급여화된 간병 서비스는, 돌봄에 압도된 가족에게 숨 쉴 틈을 제공한다. 그들이 삶의 균형을 되찾으면, 가족 내 폭력이나 극단적 선택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다. 이 같은 심리적·사회적 편익은 계량화하기 어렵지만, 결코 작지 않다.
선거의 시간에 이와 같은 면밀한 숙의와 검토 없는 속 빈 강정 같은 정책들이 의미 미약한 글자로만 만들어지고 있다. 간병인 급여화에 대한 논의는 그 일부의 증거일 뿐이다. 가장 많은 재정 지출과 사회보험이 관여된 보건 복지의 정책에서 눈에 띄는 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어느 진영이든 마찬가지다. 그나마 민주노동당으로 이름을 선명히 하고 나온 진보 정당만 그 강조점이 보일 뿐이다.
의료 소비자의 목소리가 사라진 공론화
여야 후보들은 ‘의료개혁 공론화위원회’를 만들겠다, ‘보건부 독립’을 이루겠다, ‘의사협회와 협의하겠다’ 등의 구호를 내세운다. 그러나 공론화위원회에 환자단체를 포함하겠다는 민주당의 약속도, 구체적 일정이나 예산, 참여 방식을 명시하지 않으면 공허한 선언에 불과하다. 국민의 힘과 개혁신당은 오로지 의료계 전문가와의 협의만 강조할 뿐, 환자·의료소비자 단체와의 협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한국환자단체연합회의 요구안을 공약에 담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정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정책의 최종 수혜자는 의료 소비자, 즉 환자와 그 가족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빠진 의료 정책은 ‘공론화’라는 그럴싸한 외피를 쓰고도 실질적 효과 없이 흘러갈 위기에 있다. 공론화라는 단어가 상징적일 뿐, 그 속에 담긴 구체적 절차와 예산, 운영 구조가 공백으로 남으면, 실제로는 의료 소비자 권리가 배제된 채 기득권 담론만 강화된다.
지난 정권에서 중증 환자들은 매일 외줄 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부의 터무니없는 의대정원 증원 계획과 그에 반대하는 원초적 이기 이익 집단인 의사단체의 대결 국면으로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과 가족, 잠재적 환자들에게 부담 지워졌다. 의료개혁의 중심은 공급자 중심의 개혁이 아닌 의료 소비자 중심의 정책입안이 되어야 함에도, 의료 소비 행태의 연구나 그 개혁안은 찾기 힘들다. 심지어 환자 단체들을 만나 숙의하는 퍼포먼스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목소리 큰 이익집단인 의사들 비위 맞추기 급급하다.
이는 이번 대선에서 '성장'의 담론이 모든 것을 덮은 탓이 크다. 지난 정권의 실정으로 후퇴한 국가 경쟁력의 회복이 가장 큰 과제로 도출되었다. 지난 실정, 그 이전의 코로나 팬데믹의 시간은 분명 '후퇴의 시간'이었다. 포스트 팬데믹과 내란 이후의 과제가 빼앗긴 위상의 회복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구호로 뒤덮인 시간을 경계해야 한다. 후퇴의 시간에 가장 힘겨웠던 이들의 복구와 회복의 담론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성장이라는 말 뒤에 가려진 돌봄의 부재
한국 대선 국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경쟁력 강화’와 ‘경제 성장’이다. GDP 상승, 수출 증가, 일자리 창출 같은 키워드는 듣기만 해도 익숙하고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돌봄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갈수록 점점 더 고립된다. 성장의 과실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그 과실조차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그들은 언제나 묻기만 하고 있다.
어느 기업 총수가 직원 출산 장려금을 1억 원 지급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출생아 1명당 1억 원 지원이 수십억 원의 GDP 상승효과를 낳는다는 연구도 있지만, 또 다른 연구는 “지자체의 출산지원금 효과가 1~2년 내 반짝 효과에 그쳤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재정 투입만으로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교육·주거·돌봄 인프라를 함께 개선해야 한다는 기초적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간병비 급여화에도 단순 비용 계산을 넘어선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 안에서 존재하며, 돌봄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지시하거나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윤리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돌봄의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의 떨리는 눈빛, 가족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선거 무대는 이 느리고 고통스러운 현장을 외면한 채, 숫자와 지표로만 가득 차 있다. 그 지표마저 선거의 득표에 유리한 가공된 숫자들로 채운 체로 말이다.
돌봄의 윤리가 살아날 때 비로소 정치가 완성된다
‘정치란 공동의 삶을 설계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선 구도는 돌봄의 존재를 말살한 채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가속만을 좇는다. 돌봄이 빠진 정치에는 사람의 얼굴이 사라지고, 기다림과 배려가 깃들지 못한다. 지방 곳곳에서 간병 비용을 감당 못한 채 고통받는 노인들, 병상 밖 복도에서 밤을 지새우는 가족들, 반복되는 재입원에 절망하는 환자들은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그들의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에는 존엄이 없고, 연대도 없다.
간병비를 ‘15조라는 세상이 멸망할 숫자’로 전락시키기 전에, 우리는 돌봄의 무게를 한 사람의 삶으로 느껴야 한다. 돌봄의 가치가 계량불가능하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돌봄 산업이 활성화되면 ‘의료 서비스 질 향상→병원 재원율 감소→건강보험 재정 절감’이라는 선순환이 펼쳐지고, 돌봄 노동이 정당하게 보상받으며 자립할 수 있다. 나아가 돌봄에 짓눌린 가족들이 경제활동으로 돌아와 세수와 소비를 늘리면, 그 효과는 곧 GDP로도 반영된다.
인정에 호소하거나 인기에 영합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성장 담론의 기본적 전제는 소속 구성원 모두의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 제일 앞선 무리를 끌어올려 그럴듯한 진일보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간단한 산수만 해 보더라도, 다수의 뒤쳐진 무리들을 조금씩 밀어 올려주는 것이 전체의 성장에 훨씬 효능을 안겨 준다. 이런 의미에서 퍼준다는 정치적 레토릭은 책임도 근거도 대안도 없는 무지의 주장일 뿐이다.
오늘도 병실 한구석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누군가가 있다. 그 고통이 숫자로 환원되지 않고, 한 사람의 얼굴로 드러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과 돌봄’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가시적 경쟁과 단기적 효율만이 지배하는 담론 너머, 돌봄의 윤리를 되살려야 할 때다. 사람을 잃어버린 정치에는 결국 아무 미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