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의 환상, 궤변의 시대

이준석과 청년 정치의 위기

by 박 스테파노

고대 아테네의 여명, 돌기둥 사이로 두 형제가 언어의 칼날을 갈며 공중에 맴돌기 시작했다. 에우티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플라톤이 <에우티데모스>에 기록한 바로 그 이름들은, 언어가 진리를 배반하고 승리만을 좇을 때 어떤 폭력이 탄생하는지를 예리하게 증언한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그대로 '트집쟁이 쌍둥이'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경 살았던 역사적 소피스트 형제들이다. 상대가 내미는 질문이나 주장의 '단어 하나'를 잡아끌어, 전혀 다른 의미로 비튼 뒤 원래 의도를 흩뜨리곤 하는 것이 이들의 주특기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우리는 무엇을 친구라 부르는가?”라고 물었지만, 에우티데모스는 사전적 정의에서부터 호메로스 시대의 우정 시편까지 끄집어내며 질문을 산산이 부순다. 이어진 디오뉘소도로스의 되묻기는 맥락을 완전히 왜곡해버리며, 질문의 본질은 사라진 채 “나는 옳다”는 허울만 남겼다. 단순한 물음에, 친구의 사전적 정의와 법률적 정의, 도덕적 정의를 긴 심리학·윤리학 구분으로 쪼개어 결국 질문 자체를 이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순간, 언어는 더 이상 상호 이해를 위한 다리가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무기로 변질되었다. 상대가 애써 쌓아 올린 논거의 맨 마지막 잎사귀 하나를 쳐서 땅에 떨구어 버리는 식으로, ‘진의를 무너뜨리는 승리’를 거두곤 했다. 이 고대의 궤변극은, 지금 우리 앞에서 되풀이되는 한국 정치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자크루이 다비드 ,1787년,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나이의 과두파 크리티아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는 공포정치를 폈던 과두파가 실각하고 민주파가 재집권한 뒤 사형당한다.AP



이준석이라는 ‘말의 병졸(語兵)’의 무지성


2025년 5월 27일 TV 토론.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인터넷에 떠돌던 문제적 댓글”을 인용한다며 젓가락을 언급했다. “여성 xx에 젓가락을 xxx는 발언이 있었다”는 그 문장은, 사실 확인도 없이 그대로 토론장의 언어 괴물로 소환되었다. 권영국 후보는 “맥락을 알 수 없다”며 당황했고, 이재명 후보 역시 “시간과 규칙을 지켜 달라”고 제지했지만, 이준석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언론 보도가 “출처 불명”이라 지적하고, 시민단체가 사퇴를 요구했으며, 그는 모욕죄·명예훼손 고발까지 당했다. 단순한 실언을 넘어선 이 발언은, 무지성의 사유가 어떻게 혐오의 상징으로 둔갑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예였다. 마치 데리다의 ‘차연(差延)’처럼, 맥락 없이 끊긴 단어 하나가 공론장의 진실을 가리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폭탄으로 재포장된 것이다.


이 사태를 여전히 촛불처럼 밝히고 있는 것은, 펨코(FMKorea)와 같은 온라인 남성 커뮤니티의 환호였다. 이곳은 '남성 피해자 담론'을 기반으로 혐오와 분노를 공유하며, 허공에 메아리치는 소란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들은 '사이다 정치'라는 가짜 약속을 입혀 익명 뒤에서 웃으며, 격렬한 언어 폭격으로 쾌감을 얻는다. 키보드 뒤에 숨어든 패배자의 언어가 주류에 편승한 또 하나의 팬데믹이 시작된다.

5월 27일 이준석 후보가 대통령 선거 토론에 임하고 있다. 연합뉴스


학급회의 부터 대학 소모임 학회, 그룹 과제, 그리고 사회에서의 각종 분업과 협업을 경험한 우리 세대에게 토론은 단순한 언쟁이 아니었다. 토론은 서로 다른 관점이 충돌하면서도 공명하여 더욱 풍부한 진실을 드러내는 창조적 행위였다. 그러나 이준석의 언어는 공론장의 신성함을 짓밟았다. 슬며시 꺼내든 비장의 무기마저 여성 혐오로 비틀어 상대를 무너뜨리는 태도는, 토론을 ‘진리의 장’이 아닌 ‘권모술수의 장’으로 왜곡했다.


쥐르겐 하버마스는 ‘합리적 담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합리적 담론에서 참가자는 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상대 주장에 논리적 근거를 요구하며, 비판과 반론을 거쳐 합의(consensus)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이준석의 궤변적 토론은 합리적 담론의 규칙을 완전히 무시했다. 객관적 근거 없이 언어적 파편 하나로 상대를 공격하며, 공론장을 ‘스펙터클(spectacle)’로 전락시킨 것이다. 그 결과, 시청자들은 냉정한 토론 대신, 무의미한 말싸움에 피로감을 느끼며 채널을 돌렸다.


이준석은 그 쾌감을 먹고 성장했다. 자신이 던진 궤변적 언설을 숨어 환호하던 지지들은 즉각 “사이다”라 외치며 소비했다. 그러나 이 환호는 정당성의 잣대가 아니라, 감정의 에코챔버일 뿐이다. 반지성적 분노가 증폭되면, 토론은 사라지고 혐오만이 살아남는다. 이준석은 그 혐오를 등에 업고, 숱한 허구적 주장 뒤에 숨어 있는 ‘비윤리적 권력 장치’로 말의 병졸이 되었다.



정치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치 혐오가 위험한 것


지금의 허무하되 서늘한 광경은, 교실 한구석에서 시작된 정치 금지라는 명령과 깊이 맞닿아 있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정치적 발언은 위험하다”는 수업이 이어지며 학생들의 토론 능력을 봉쇄했다. 교과서는 정치적 쟁점을 회피하고, 입시 위주의 암기가 전부인 현실이었다. 그 결과, 청년들은 “왜 나는 불리한가”만을 외칠 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묻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사회의 숱한 문제 앞에서 인강의 풀이와 오답노트 없이는 사유의 힘으로 불거나 해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청년 세대 스스로도 토론에 무능하다고 인정한다. 교실 안에서 정치 금지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배움의 장은 광장의 토론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립’이라는 외피 아래 “정치적 사유” 자체가 금기시되었고, 그 결과 교실 속에서 ‘질문하고 검증하는 습관’을 배우지 못한 청년들은 사회로 나와 언어의 파편만 난사한다. 그 대표적 예가 ‘서부법원 습격’ 사건이다. 청년들이 “우리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외치며 법원을 점거했으나, 이들의 정치적 주장은 희미해진 채 그저 분노의 물리적 충돌로만 결론을 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지적한 “구체적 투쟁이 구조적 투쟁을 덮어버리는 현상” 그대로였다.


정치는 시끄러워? 일러스트=허인회


이준석을 비롯한 천하람, 장예찬, 김재섭, 김용태 같은 이름들이 토론 석상에서 보여준 태도는, 교실에서 길러진 비판적 질문 능력의 부재 그 자체였다. 내부 갈등을 외부로 끌어내 당분열을 유발하며, 공허한 구절을 늘어놓았다. 모두가 토론 대신 분노의 퍼포먼스에 몰두했다. 그 주장의 끝에는 기성세대에게 빼앗긴 무엇에 대한 박탈감을 호소했다. 그러나 정작 그 박탈의 원인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리조차 한 바는 없었다.


더불어민주당에도 예외는 없다. ‘청년 정치인의 표상’처럼 등장했던 박지현은 흑역사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당내 갈등을 공론화한다는 명분 아래 아젠다 설정과 언어 선택에서 수많은 논란을 자초했다. 이뿐인가. 한국 정치권 곳곳에서 ‘청년 대변자’로 떠오른 이들—그중 상당수는 학계·사회 경력이 짧거나, 대중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입증해 본 경험 자체가 부족한 이들—이 과연 진정한 정치적 리더십을 구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의 성장은 특정 거대 기득권 세력의 후광을 입고, ‘청년 결집’이라는 구호에만 매달린 채,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유령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국 정치가 얼마나 허허벌판 위에 서 있는지를 절감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공론장은 언어와 행동을 통해 인간이 서로를 드러내고, 공동체적 진리를 탐구하는 장”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한 것은, 찬란한 공론장이 아니라 ‘분노의 전시장’이었다. 실시간 속보와 단문이 지배하는 시대에 깊은 사유는 얼어붙고, 오직 자극만이 살아남는다. 우리가 토론했던 이유는 상호 이해와 합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누가 더 상대를 망신주느냐”가 토론의 전부가 되었다. 이준석의 젓가락 발언과 펨코의 환호는, 합리적 담론이 사라진 자리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 정치’를 상징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표지 사진. 알라딘


최근 신남성연대 간부 배 씨의 마약 투약 사건은 극단적 혐오가 어떻게 범죄와 상관 관계를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반여성·반민주”를 외치며 조직을 이끌었지만, 결국 자신의 분노를 폭력과 범죄로 터뜨린 그는, 그야말로 프로이트적 구순기(口脣期)로 회귀한 인물이었다. 사회가 불안을 정치적 분노로 전환한 결과, 청년 운동은 더러운 독버섯처럼 매도되었고, 청년 세대 전체가 낙인으로 굳어졌다. 이는 울리히 벡이 지적한 ‘위험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구조적 불안이 개인의 분노로, 분노가 폭력으로 연결되는 악순환이 멈출 줄 모른다.



침묵하는 다수, 사유하는 청년의 정치 가능성


고대의 에리스티케스가 사소한 논점으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면, 현대 한국의 보수 진영 한가운데에는 이준석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전통의 뒤를 잇는다. 토론을 '진실에 다가가는 여정'이 아니라 '사소한 트집을 잡아 상대를 격하하는 유희'로 전락시켰다. 특히 “호텔 경제학 발언”은 얼핏 보면 작은 한마디에 불과했으나, 그는 이 발언 하나를 사슬처럼 엮어 내내 상대를 옥죄었다.


토론 주장이 지닌 문화적·사회적 함의와 무관하게, 오로지 상대의 언어적 실수를 ‘컷 포인트(cut point)’ 삼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이는 피상적 단어 장난에만 몰두해 토론의 참뜻을 없애버린 고대 에리스티케스의 망령을 이어받은 듯 보인다. 그는 논리의 전개 과정 대신, 상대가 내뱉은 단어 한두 개를 무한히 확대 왜곡했다. 이 과정에서 토론이 본래 품어야 할 설득과 반론의 상호작용은 사라지고, 상대를 ‘허위일탈의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궤변만이 남았다.


이준석식 토론의 위험성은 여기 있다. 첫째, 그는 토론의 본질인 ‘상대의 논리를 파훼하고 자신의 논리를 확장하는 과정’ 자체를 거부한다. 둘째, 사회·문화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언어만을 도드라지게 해석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적 쟁점을 은폐한다. 셋째, 청중에게 ‘진실을 함께 모색하자’는 호소를 던지기보다, ‘상대를 몰아붙여 승리감을 주는 퍼포먼스’를 지향한다.


결국, 이준석의 궤변적 토론 태도는 대화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훼손하며, 공론장 자체를 왜곡하는 위험한 레토릭이다. 더 큰 문제는 이준석이라는 개인만이 비난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미래 세대들은 ‘사이다 정치’라는 착시에 중독된 채, 대립과 혐오로 점철된 언어 폭풍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겐 희망의 세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Google Sora


그러나 이 파편화된 시대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청년들은 존재한다. 모든 청년이 혐오와 조롱을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밤에도 작은 모임에서 고전을 함께 읽고, 영화나 예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청년들이 있다. 그들은 “정치란 감정의 폭풍이 아니라, 삶의 파편을 직접 마주하며 만들어가는 공동체적 이야기”임을 체득한다. 책 속에서 삶의 어두움을 등불 삼아, 말은 곧 실존의 등불이 된다는 진리를 배운다. 어느 시인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를 노래했듯, 그들은 언어 너머 삶의 진실을 속삭인다.


중독성 강한 선동의 해독제는, 죽음과 같은 혐오의 소란 속에서도 ‘느림과 무지의 인정’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인간의 진리의 집”이라면, 거기에는 먼저 “나는 모른다”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벽한 진실을 전부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 질문 속에서 공감과 응답이 시작된다. 정치는 더 이상 사이다라고 불리는 폭력적 함성으로 대체될 수 없으며, 촌극이 아닌 진지한 사유와 연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오래된 등불이 다시 타오르듯, 느린 언어와 진정한 사유는 이 땅 위의 파국을 잠재울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좁고 바람 부는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서로 마주보고 “어떤 삶을 함께 구성할 것인가”를 묻는 과제를 맞이하고 있다. 언젠가 붉은 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순간처럼, 이 땅의 청년들은 삶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언어를 다시 손에 쥐고, 궤변과 혐오를 넘어설 희망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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