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의 오컴의 면도날, 혹은 진실의 상처

'단순함'은 왜 만능키가 되었는가?

by 박 스테파노

오컴의 면도날을 들고 복잡성의 숲에 들어선 시대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진실은 단순하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수세기 동안 이 말의 마법에 사로잡혀왔다. 단순함은 명쾌했고, 명쾌함은 아름다웠다. 오컴의 면도날, 그 우아한 사유의 도구는 이렇게 탄생했다.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상정하지 말라(Entities should not be multiplied beyond necessity).” 중세 신학 논쟁에서 시작된 이 명제가, 훗날 과학적 설명의 근간이 될 줄은 그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오늘, 이 면도날은 뭉툭해졌다. 칼날이 닿지 않는 영역은 넓어졌고, 단순함은 점점 더 위험해졌다.


‘불필요한 존재자들을 가정하지 말라’는 이 금언은 이성의 맥박을 단순화하고자 한 근대적 욕망의 결정체다. 윌리엄 오컴, 한 수도사가 던진 이 문장은 중세 형이상학을 절단하고 근대의 명징한 정신으로 나아가는 도끼였다. 과학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그리고 때로는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이 도구는 예리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면도날은 늘 두 가지 얼굴을 갖는다. 하나는 쓸모를 위한 절제, 다른 하나는 쓸쓸한 상처다. 단순함은 때로 명료함을 주지만, 그 명료함은 복잡한 것들에 대한 침묵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컴의 원리가 단지 설명의 경제성을 위한 기술적 기준으로 오해될 때, 우리는 질문의 가능성들을 예리하게 베어버리는 침묵의 칼을 손에 쥐게 된다.


흔히 쓰는 '오컴의 면도날'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GOCOMICS


검약성(儉約性)이라는 말은 ‘절제와 간결함을 본성으로 삼는 성질’ 또는 ‘불필요한 것을 줄이고 본질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간명함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은 오랜 과학사 속에서 거의 본능처럼 반복되어 왔다. 뉴턴의 역학은 우주의 움직임을 간결한 수학 공식으로 환원했고, 데카르트는 세계를 해부대 위의 기하학으로 변환시켰다. 20세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의미 있는 명제’만을 남기기 위해 감정, 종교, 윤리의 언어를 일괄 삭제하는 정제 작업에 몰두했다. 그들은 오컴의 면도날을 과학적 언어의 면허증처럼 들고 다녔고, 단순함은 곧 과학적 진실의 형식 요건으로 간주되었다.



진실의 결, 날이 서지 않은 면도날


20세기에 이르러 철학자들은 오컴의 면도날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칼 포퍼는 이 칼날을 의심했다. 그는 과학 이론이 단순하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이론은 종종 그 단순함 덕에 반증을 피할 수 없는 형태로 다듬어지지만, 동시에 현실의 복잡한 국면을 누락할 가능성도 높다. 포퍼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이론이 얼마나 아름답게 잘려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취약하게 외부와 맞닿아 있는가였다. 즉, 단순함이 아니라 개방성, 우아함이 아니라 검증 가능성이 과학의 미덕이라는 선언이었다.


토머스 쿤은 포퍼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과학사를 면도날로 깔끔히 정리된 직선의 진보가 아니라, 각기 다른 ‘패러다임’ 사이의 불연속적 전환으로 보았다. 쿤에게 ‘단순성’은 절대적인 미덕이 아니라, 특정 시대의 과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취향과 기대, 훈련의 산물이었다. 즉, 검약성은 보편적 진리의 조건이 아니라, 일시적 합의의 기호라는 것이다.


'방법에 대해 반대한다' 폴 파이어아벤트. 나무위키


그러나 가장 급진적인 목소리는 폴 파이어아벤트에게서 들린다. 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Anything goes)”는 말로 요약되는 과학 방법론의 다원주의를 주장했다. 그에게 검약성이란 하나의 권력이었으며, 과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체계였다. 면도날은 더 이상 논리의 칼이 아니라, 학문 공동체가 불편한 이론들을 배제하는 도구였다. 그렇다면 오컴의 명령은 정말로 진리를 향한 길인가, 아니면 통제된 앎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가?


이 질문은 단순히 이론의 선택 기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어떤 목소리를, 어떤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지워내는가에 대한 윤리적 태도와 직결된다. ‘불필요한 존재자’를 제거한다는 명제는 너무나 쉽게 ‘불편한 존재자’를 배제하는 논리로 미끄러진다. 간명함이란 이름 아래, 복잡하고 해석 불가능한 세계는 무시되거나 조용히 사라진다.



AI 모델 선택과 검약성의 현실적 위협


오늘날 오컴의 검약성 원리는 더 이상 철학자들의 서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알고리즘 설계자의 코딩 습관 안에, 데이터 과학자의 모델 선택 기준 안에, 그리고 AI 윤리학자가 망설이며 고르는 지침 안에 이미 깊숙이 박혀 있다. 단순함은 여전히 미덕으로 간주된다. 복잡한 모델은 계산 비용이 크고, 해석이 어렵고, 결정에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우리는 빠르고, 명쾌하며, 효율적인 모델을 원한다. 곧, 오컴의 면도날을 다시 든 것이다.


예컨대 자연어처리 모델인 ChatGPT조차도 ‘최적의 아키텍처’를 찾기 위한 여정 속에서 수천만 개의 매개변수를 조율하면서도 가능한 단순한 구조를 유지하려 한다. 간명함은 학습과 추론의 속도를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는 것은, 그 단순함의 이면에서 어떤 목소리들이 소거되고 있는가다. 언어란 원래 맥락적이며, 비직선적이고, 다의적이다. 그 복잡성은 언어의 힘이며 인간성의 흔적이다. 이를 제거하는 학습은 정확함을 위장한 단절의 학습일 수 있다.


더 위험한 국면은 예측 기반의 AI가 의사결정에 직접 개입할 때다. 범죄 예측 알고리즘 PredPol은 과거 범죄 데이터를 기반으로 특정 지역과 인물의 범죄 가능성을 예측한다. 이것은 수치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의 편향된 치안 기록을 기계적으로 반복 재생산하는 일이다. 가난한 지역, 소수 인종, 젊은 남성은 데이터 속에서 더욱 위험한 존재로 편향된다. 시스템은 이들을 ‘불필요한 존재자’로 간주하고, 감시와 단속의 대상자로 선별한다. 면도날은 이제 사람을 향해 휘둘린다.


Predpol AI의 오류는 오염된 데이터 탓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스템의 최적화에 있기도 하다. 한겨레신문


IBM의 Watson은 의료 진단 분야에서 획기적인 효율성을 자랑했지만, 의학적 판단의 단순화를 요구했다. 수많은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적 변수는 ‘비표준’이라는 이유로 무시된다. 기계는 정확하고 빠르다. 그러나 생명은 복잡하고 느리며, 때로는 예외적이다. 그 예외를 포괄하지 못하는 시스템은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낮은 확률로 계산하고, 치료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면도날은 다시, 생명을 자른다.



단순함이라는 유혹, 복잡함이라는 진실


AI 시스템이 지향하는 단순화는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설계자는 말한다. “이 모델은 해석하기 쉬워야 하며, 누구나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감정, 상황의 복합성, 구조적 폭력의 맥락을 제거하겠다는 암묵적 약속이다. 단순함이란 이름의 신화 속에서, 인간성은 해석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기계 밖으로 밀려난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중립적’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기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택이며, 배제의 형식이다. 복잡함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는 종종 불편함을 제거하려는 욕망과 닮아 있다. 이 욕망은 사회적 갈등을 숨기고, 차이를 무시하며, ‘정상적인’ 것만을 남긴다. 결국 면도날은 설명되지 않는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예측은 기술이지만, 선별은 정치다.


이쯤 되면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오컴의 면도날은 현대 사회의 도구인가, 아니면 현대 사회의 은폐인가. 복잡성은 정말 제거해야 할 잡음인가, 혹은 우리가 마침내 들어야 할 노이즈인가. 단순함은 편리하다. 그러나 그 편리함이 어떤 존재를 침묵시키고, 어떤 진실을 덮는다면, 우리는 그 편리함에 어떤 윤리적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AI의 윤리적 맹점은 인간성이라는 복잡함을 제거한다. Google Sora



AI 시대에 필요한 ‘단순함 너머의 용기’


복잡성을 경시하는 검약성 원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시대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과학철학자 폴 파이어아벤트가 외친 ‘방법에 반대한다’는 선언처럼, 단일한 방법론과 단순성에 대한 맹신은 해체되어야 한다. 이는 특히 AI가 인간 삶의 결정적인 부분에 관여하는 오늘날, 더욱 긴요하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복잡함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복잡함 속에야말로 ‘진짜 세계’가 있다. 세계는 불확실하고 불균질하며, 인간의 경험과 사회적 관계는 복잡한 망을 이룬다. 단순한 모델은 이 망을 오히려 왜곡한다. 알고리즘 설계에서 ‘검약성’은 절제가 아니라 ‘포기’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세계가 가진 세밀한 차이와 다양성은 잘려나가고, 대신 표준화된 ‘단일 해석’만이 남는다.


복잡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설명 가능성’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음’을 견디는 힘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 들기보다, 이해 불가능한 부분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함과 모호함 속에서 인간성을 발견하는 용기가 요구된다. 이는 철학적 겸손이자 윤리적 책임이다. 단순함이 아니라 복잡함을 마주하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AI를 인간과 사회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효율이 아니라 다양하고 파편화된 모든 경우를 수용해야 한다. Google Sora


의료, 치안, 금융, 교육 등 인간 삶의 근본 영역에 투입되는 AI는 단순히 효율성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환자의 고유한 병력과 삶의 맥락, 사회적 약자의 현실적 고통, 불평등 구조의 작동 방식까지 아우르는 ‘다층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잡한 모델의 ‘비가시성’이 아니라, 복잡함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인간이 직접 해석하는 과정에 있다.



진실은 늘 복잡하다


AI 시스템 설계자와 사용자 모두 ‘검약성의 폭력’을 직시해야 한다. 단순함이 ‘진리’가 아니라 ‘선택’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더 다양한 목소리를 품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그 목소리들은 불완전하고 때로 모순적이며, 기술적 관점에서는 ‘잡음’일지라도, 인간 존재의 풍부함을 담고 있다.


복잡성은 결국 우리 삶의 현실이며, AI와 인간의 공존이란 이 복잡성을 끌어안는 일이다. 단순함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대신, 복잡함을 견디고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검약성의 재해석’이다. 이것은 단순한 효율성을 넘어서는 윤리적 성찰이며, 새로운 과학철학적 도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내려야 할 진정한 ‘오컴의 면도날’은 무엇을 덜어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기술과 인간, 과학과 윤리, 단순함과 복잡성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는 이 고민이야말로 오늘날 AI 시대에 던져진 근본적 과제다.


검약성은 그 자체로 도구이며, 그 도구를 쥔 손에 달렸다. 우리가 그 손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그 선택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 복잡성은 무겁고 때론 불편하지만, 그 안에 진실과 인간성이 살아 숨 쉰다. 오컴의 면도날을 내려놓고, 우리는 이제 그 복잡성을 품을 용기를 길러야 한다.


복잡성을 품을 용기가 필요하다. Google Sora


복잡함과 다채로움은 불편하다. 예술과 인문학이 불편한 이유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말로 단순함의 숏컷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는 한국인으로서 이 단순함 추종이 매우 불편하다. 문학이 소외되고 인문학이 그저 패션이 되는 이유다. 문학이란 결국 불편한 질문을 복잡한 이야기 타래 속에 품어 넣은 것이라 생각한다.


진실은 오히려 모호하고, 중첩되며,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만 실체를 드러낸다. 복잡성은 현실의 속성이며, 단순성은 해석의 전략이다. 진리는 단순성에서가 아니라, 복잡성의 정직함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드러낸 그것을 우리는 진실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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