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상실, 이겼지만 제대로 싸우지 못한 게임

21대 대선 결과에 대한 소고

by 박 스테파노

21대 대선이 막을 내렸다. 계엄 내란의 음습한 공포를 한 걸음 물리칠 수 있었다는 점에 일단 큰 의미를 둔다. 그러나 어제 당선인 연설 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과도하게 격앙된 어조를 접했을 때부터 다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 김어준은 능청스럽게 비웃으며 마치 잔칫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떠들어댔다. 이 선거 결과를, 지금부터 뼈아프게 되짚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가려주었던 문재인 정부의 허술한 아마추어리즘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재앙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어느 때보다도 고의적 비판자가 절실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당 주최로 열린 국민개표방송 행사에 참석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0.

사전 예측 모델, 이재명의 과반은 나오지 않았다


5월 27일, 최종 공표 여론조사가 발표된 뒤 조용히 작은 나만의 작업에 몰두했다. 지난 한 달간 축적된 여론조사 결과를 시계열 분석해 최종 투표 예측값을 산출했다. 사용한 도구는 파이썬 기반의 상태공간모형(state-space model)과 베이지안 추론(Bayesian inference)이었다.


상태공간모형은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숨겨진 상태’(예: 후보자의 실제 지지율)를, 우리가 관측 가능한 데이터(예: 여론조사 수치)를 통해 추정하기에 적합한 기법이다. 베이지안 추론은 새로운 데이터가 유입될 때마다 예측을 업데이트해 신뢰도를 점진적으로 높이는 방식으로, 예측의 유연성과 정밀함을 동시에 확보해준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종종 제3후보가 등장해 복잡한 구도를 형성하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내가 구축한 예측 모델은 개별 후보를 독립적으로 추정하는 대신, 여러 후보의 지지율을 동시에 고려하는 ‘다자(多者) 후보 동시 추정 모형’을 적용했다.


또한, 조사기관 효과(House Effects)와 메뉴 효과(Menu Effects)를 반영하고, 응답을 미루는 ‘유보층’을 모델에 포함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단순히 튀는 응답이나 무응답을 제외하거나 비례적으로 배분하는 수준을 넘어서, 머신러닝 기법을 활용해 유보층이 실제로 지지할 후보를 예측해 최종 득표율에 반영했다.


그 결과, 이재명 후보는 46.5~~49.9%, 김문수 후보는 33.8~~37.2%, 이준석 후보는 8.5~~11.1%, 기타 후보 및 최종 유동층은 5.0~~8.0%로 예측되었다. 이 구간은 95% 신뢰구간을 보장하는 수치다. 모델 결과를 보면, 이재명 후보는 예측치 최상단에 가깝게 얻었고, 이준석 후보는 최하단을 밑돈 득표를 했다. 김문수 후보의 성적표는 수치로도 선전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최종 유동층의 표심 상당 부분이 김문수 후보에게 흘러들어갔다는 결론이다. 물론 실제 득표 양상은 더 복잡한 상호 교환 과정을 거쳤겠지만, 통계적 해석은 이와 같다.


시뮬레이션. 박 스테파노


1.

49.42% 이재명


결국 예측치 안에서 무난하게 최선을 수확했다. 다시 말해, 큰 실책은 없었다. 캠프의 ‘몸사리기 전략’이 목표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캠페이너들은 스스로를 성공이라 여기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넘버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 투표 직전까지 형성된 국면에서 과반을 사수하지 못했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패다. 내란 세력과 경쟁했음에도 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그들에게 40%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이 바로 각성의 지점이다.


사법 리스크니, 마타도어니 다 제쳐두고 보자면, 민주당 캠페인에는 국민들의 절실한 ‘compelling reason’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가계부채 문제는? 부동산 불안 해소는? 일자리 창출 계획은? 물가 안정 대책은? 양극화 해소 정책은?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 설계조차 없었다. 감동이 없으니, ‘그 이상’을 바라볼 동력이 사라졌다. “이겼으면 됐지, 어쩌라고?”라는 허탈감이 드는 순간, 우리는 미래를 또다시 아마추어 정치인들에게 맡겨야만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뼈아픈 반성이 필요하다.


2.

41.15% 김문수


수학적 모델로 본다면, 김문수 후보는 막바지 캠페인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그의 득표는 상대의 소극성과 실책을 그대로 반사한 이익이라 할 수 있다. 민주당의 소극적 행보는 유보층을 흡수하지 못했고, 이준석의 막판 ‘뻘짓’은 오히려 사표 방지 심리를 강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문수가 얻은 40%대 지지는 보수 진영에서 결코 가볍게 볼 성적이 아니다. 보수 기득권 세력은 언제든 다시 권력을 장악할 힘이 있다는 위기를 경계해야 한다.


이제 국정 운영의 앞길은 험난해 보인다. 김문수를 앞세운 윤석열 핵심 관계자들에게 당권 장악의 명분을 주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40%가 넘는 견고한 지지를 받은 정치 세력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이 이 지점을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당의 한계라 아니할 수 없다.


21대 대통령 선거 결과. 네이버 캡쳐


3.

8.34% 이준석


이준석은 약 290만여 표를 얻었다. 득표율 10% 미만이라는 수치에 분노하거나 비웃을 수도 있겠으나, 이 숫자는 오히려 골칫거리로 다가온다. 출구조사만으로 연령대별 득표를 확정하긴 어렵지만, 대략 200만 표가량은 20·30대 남성층에서 나왔다고 추정된다. 베이비부머 1, 2차 부모들이 낳은 이들 세대는, 앞으로 대한민국에 장기적으로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극우 위협이 아스팔트 위의 노인과 목사 세력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50·60대 가정에서 싹트고 있었다는 사실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이준석의 유일한 전략은 ‘갈라치기’였다. 그가 주장한 ‘포위론’에 스스로 갇히고 말았으나, 갈라치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순한 거짓이 복잡한 진실을 앞지르는 현상은 언제나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이제 한국은 ‘젊은 극우’라는 폭탄을 한동안 짊어지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했다. 이들을 설득하고 포섭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어른들과 소위 진보 진영의 부족함 때문이다. 어른들은 갈라치기의 벽을 세우며 자신의 밭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문제는 이준석 현상이 단기간의 ‘웃음거리’나 ‘화제성’으로 사그라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보수·진보 양쪽에서 “이준석이 없었으면 우리 지지율이 더 높았을 텐데”라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사실이, 제3지대·극우·대안 정치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방증이다. 사회 전반의 청년층, 특히 남성 청년들이 느끼는 박탈감·상실감·정치적 무력감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준석류의 정치 세력과 리더십은 계속해서 재생산될 것이다.


4.

0.98% 권영국


이 선거에서 권영국 후보가 얻은 득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미래의 기표’일지 모른다. 대한민국은 한동안 ‘진보’라는 가치를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노동자와 약자를 대변한다는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권영국의 이름이 그나마 희미한 빛처럼 반짝였지만,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은 또다시 연대의 힘을 잃었다. 존재감 확보라는 자기만족에 빠진 캠페인은 매우 위험하다.


돌이켜보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시민 후보 일정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후보는 돈도, 조직도 없었지만 진보정당 소속 청년·대학생들의 조직적 유세 지원으로 힘을 얻었다. 가장 젊고 활기찬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진부하고 식상해졌다. 진보의 언어는 더 이상 계급 해방과 구조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브랜딩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념은 탈색되었고, 남은 것은 팔리는 이야기일 뿐이다. 스피커는 발언자가 아니라 상품의 광고자가 되었다.


정치사회학적으로 이는 ‘정치적 소비자 계급의 탄생’으로 연결된다. 정치적 올바름과 윤리는 ‘정체성 자산’으로 시장화되었고, ‘진보’라는 단어는 정의를 수행하기보다 정당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 본질에 대한 성찰 없이는 반전도 불가능하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후 일시적으로 마이너스로 추락했던 보수-진보 격차는 최근 다시 7%포인트로 커졌다. 그래프=한국갤럽


5.

아직도 먼 풍경


“과반을 넘지 못한 민주당”과 “41%를 유지한 보수 세력”, 그리고 “8%대 젊은 극우의 깃발”은 단순한 숫자 대결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짊어진 세대 갈등, 경제 불안, 정치 불신, 젠더 갈등 등 다양한 구조적 병증이 선명하게 드러난 결과물이다. 이 병증을 방치한 채로 단순히 정치권력 교체만 반복한다면, 극우·극단 이념은 언제든 재등장할 것이고, 민주주의의 기반은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진짜 과제는 “어떤 권력이 집권하느냐”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내재적 갈등을 어떻게 치유하고 통합하느냐”이다. 그 풍경은 아직도 아득히 멀다.


여러 성찰 지점 중, 선거 막바지 유시민 작가의 소동을 돌아보면, 이제 ‘진보’라는 이념을 흔들며 파는 자본의 욕망을 경계해야 함이 분명해진다. 김어준, 주진우, 탁현민이 중앙정치에 손을 대는지 여부는, 이 풍경 찾기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그들은 한 시대 ‘진보의 목소리’로 기억되지만, 이제는 비판이 아닌 연출, 성찰이 아닌 감정 상품을 만들어낸다.


이들을 ‘이슈 투기자(issue entrepreneur)’로 설명할 수 있다. 특정 사회운동이나 이슈를 통해 영향력과 자본을 동시에 추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미디어 정치(media politics)의 전형적 사례로, 비판이 곧 마케팅 수단이 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한국처럼 정파성이 강한 정치 환경에서는 ‘정치적 대리 소비(political proxy consumption)’라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김어준은 진실과 음모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정치 담론을 예능화했고, 주진우는 권력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의심보다는 친화적 취재를 택했다. 탁현민은 광장의 열기를 ‘이벤트’로 연출해냈다. 촛불은 드라마가 되었고, 대통령의 하루는 세트장의 시간처럼 연출되었다. 되짚어볼 문제는 명확하다.


대표적 정치 엔터테이너 김어준. '뉴스공장'시절.한겨레뉴스


그들의 공통점은 뚜렷하다. 그들은 정치 엔터테이너다. 이념적 순수성을 말했다고 하지만, 언제나 그 말 뒤에는 거대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영향력이 숨어 있었다. 그들이 비판하는 대상과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비슷한 구조로 ‘자신’을 팔아왔다. 정치가 아닌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결국 질문은 단 하나로 수렴된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말하고 있는가?”


최근 김건희 비판 영화 <신명>을 내세웠던 정천수 역시 같은 계열에 속한다. 다만 그는 ‘영화’라는 형식을 빌려 욕망을 더 정제되고 감각적으로 포장했다. 김건희를 고발하는 이야기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의 복귀와 정당성을 구매하려는 욕망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누구보다도 ‘정치적’이지만, 누구보다도 '비윤리적'일 수 있는 욕망의 가공물이다.


이 현상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이벤트화(eventization)’로 해석될 수 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이 사라지고, 정치가 미디어적 재현으로 축소되는 사례다. 즉, 정치 참여는 실천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6.

사라진 진보의 언어를 찾아야


원래 진보는 사회 구조의 불평등을 해체하려는 윤리적 실천이었다. 그런데 지금, 진보는 하나의 스킨이나 패션처럼 여겨진다. 진영의 적을 비판하면 ‘진보적’이라 칭해지고, 반정부 콘텐츠를 만들면 ‘정의롭다’는 착각이 허용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자본주의적 성공을 이념적 정당성으로 위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정치 엔터테이너는 단지 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그 구조가 키워낸 유형(type)이다.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이념은 욕망을 가장 정교하게 위장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실은 사회적 입지와 후속 프로젝트를 위한 브랜드 구축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진실’은 자신의 복귀 서사를 위한 명분일 가능성이 크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수도권 집중유세-노동선대본 발대식'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후보가 노동당, 민주노동당, 녹색당 당원들과 함께. 오마이뉴스


진보가 위태로운 것은 보수의 공격 때문이 아니다. 진보 내부의 이념·욕망·자본이 뒤섞인 구조, 즉 진보의 언어를 통해 자기 이익을 획득하는 이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조가 반복될수록, 진보는 본래의 윤리적 힘을 잃는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믿고 싶어 한다. 정권의 부패를 고발하는 한 편의 프로그램, 누군가의 목소리에 진실을 위탁하며 거기서 희망을 건진다. 그러나 그 믿음의 자리에 자본이 들어앉아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다.


진보를 말하는 이들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자신이 누구를 위해 말하는지, 말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그 말이 정말로 구조를 바꾸었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시장을 만들었는지를 반추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진보적’이라는 말에 현혹되는 감정 소비를 멈추고, 그 감정이 누구를 이롭게 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진보는 말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바꾸는 실천의 과정이다. 그 실천이 다시 윤리를 회복하려면, 이 신명나는 자본의 굿판에 속지 않는 눈이 필요하다.


keyword
이전 10화AI시대의 오컴의 면도날, 혹은 진실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