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멤버십은 글을 쓰는가, 노출을 가공하는가

플랫폼 시대의 글쓰기와 그 하향 평준화에 대하여

by 박 스테파노

노출이 가리키는 곳 - 자본의 욕망 버튼


‘브런치스토리 작가 멤버십’이 새롭게 도입되었다. 작가에게 선택적 유료화의 기회를 주는 듯 보이지만, 실은 플랫폼의 수익 모델을 정교화하려는 또 다른 회로다. ‘응원하기’라는 이름의 후원 버튼이 글의 순위를 결정짓고, 이 순위가 노출을 결정하며, 그 노출이 다시 플랫폼의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 모든 것이 깔끔하고 계산 가능하게 배치되어 있다. 인앱 결제사와 플랫폼은 30~40%의 수수료를 가져간다. 응원하기로 브런치 스토리 플랫폼 10%라는 수수료를 수확하는 구조다. 작가들의 은밀한 미세 노동으로 손쉬운 수익을 확보하는 자본 욕망의 버튼이다.


브런치스토리의 ‘작가 멤버십’은 단순한 기능의 도입이 아니다. 이 구조는 플랫폼이 수익 창출의 책임을 작가와 나누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노출 알고리즘을 통해 ‘기여하는 작가’와 ‘소외된 글’을 선별하는 작동 체계다. 글 위에 달린 ‘응원하기’ 버튼은 마치 독자의 자발적 지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플랫폼이 정해둔 순환 회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응원이 많을수록 더 많이 노출되고, 더 많이 노출된 글은 다시 응원을 얻는다. 이 선형 반복 속에서 ‘글의 의미’는 뒷순위로 밀리고, 글쓰기는 점점 더 반응을 가공하는 기술로 변질된다.


브런치스토리 작가멤버십이 시범 베타 운영 후 정식 오픈을 예고 했다. 브런치스토리 캡쳐


남는 의문은 하나다.


이 구조 안에서 글은 무엇이 되고,
글쓰기는 어디로 가는가?


요즘 글쓰기 플랫폼, 블로그의 상위 글들을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돈 버는 법’, ‘마케팅 전략’, ‘퇴사 후 자유로운 삶’. 눈에 띄는 제목들, 익숙한 서사. 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차이는 문장의 길이와 썸네일 정도다. 실험이나 사유는 없다. 반문도 없다. 있는 것은 구조를 복제하는 글쓰기뿐이다. 무엇이 쓰여야 하는가 보다, 무엇이 클릭되는가가 기준이 된다. 감정의 소비를 유도하는 짧은 감상문들이 타임라인을 채운다. 실험은 리스크고, 긴 호흡의 사유는 시장성이 없다. 그렇게 글은 반복되고, 문장은 익숙해지고, 독자는 피로해진다. 글쓰기의 고유한 리듬과 밀도는 노출의 형식 속에서 희석된다. 플랫폼은 묻지 않는다. 무엇을 쓰려 하는가. 대신, 이것을 쓰라고 말한다. '응원받는 글-금전으로'.


응원 수가 많을수록 더 많이 노출되고, 더 많이 노출된 글은 더 많은 응원을 받는다. 이것은 창작의 생태계가 아니라, 판매 가능성의 유동 시장이다. 그 안에서 글쓰기란 어떤 내면의 호소도 없이, 반응을 예측하며 고안된 ‘서술 알고리즘’으로 기능한다.


글을 쓰는 자들은 그렇게 점점 ‘의미’보다 ‘반응’을 좇게 된다. 그리고 반응이 의미보다 중요해지는 순간, 글쓰기는 더 이상 내밀한 행위가 아니게 된다.


이미지는 교보문고에서 다운로드



하향 평준화의 알고리즘


글쓰기 플랫폼이 수익화로 전환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방향성과 기준이다. 자극적이거나 실용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인문학과 철학, 역사와 문학의 이야기는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글의 품질은 ‘깊이’가 아니라 ‘도달 범위’로 환산된다. 이것은 수익화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글쓰기의 풍경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예다.


그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은 언제나 의심받아야 한다. ‘응원 수’나 ‘읽힌 시간’으로 품질을 측정한다면, 품질은 더 이상 깊이나 맥락의 문제가 아니다. 글은 리듬을 잃고, 주제는 예측 가능해지며, 문장은 기능적 화법으로 수렴된다. 철학과 문학, 역사와 내면의 탐구 같은 ‘느린 글쓰기’는 시장에서 밀려나고, 빠르고 명쾌한 해결책만이 환영받는다. 이것은 단지 글의 문제만이 아니다. 생각하는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변형되는 일이다.


이는 단지 한 플랫폼의 정책 변화가 아니다. 콘텐츠 시장 전반에서 동일한 현상이 반복된다. 테크 기반 글쓰기 플랫폼 미디엄(Medium)은 유료 구독 시스템 전환 이후 ‘읽힌 시간’을 기준으로 수익을 배분하며 대중 취향의 글만 살아남는 구조를 만들었다. 자기계발형 콘텐츠가 대세가 되었고, 기술 비평과 인문적 성찰은 점점 사라졌다. 서브스택(Substack)은 뉴스레터 중심의 수익화가 오히려 작가를 좁은 팬덤의 마케팅 글쓰기로 몰아가고 있다. 구독자 충성도에 따라 글의 노출이 결정되면서, 작가들은 특정 독자층에 ‘맞춰 쓰는 글’을 택하게 되었다. 수익화는 작가의 생존을 돕지만, 동시에 작가의 내면을 가장 빠르게 변형시킨다.


미디엄과 서브스택. MEDIUM, Substack


‘질문하는 글쓰기’, ‘불편한 글쓰기’, ‘의미를 탐색하는 글쓰기’는 이렇게 변두리로 밀려난다. 결국 수익화 구조가 글의 시장을 왜곡시키고, 출판 생태계 전반에 교란을 일으킬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구조의 진짜 문제는 ‘글쓰기’라는 행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킨다는 데 있다.



글쓰기의 본질, 또는 은폐된 진리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대상을 자원으로 변환하는 것’이라 말했다. 플랫폼 시대의 글쓰기 역시 그렇다. 텍스트는 ‘진리’의 언어가 아니라, ‘노출’의 언어로 환원된다. 의미의 여백은 삭제되고, 텍스트는 ‘상품’으로 전시된다. 알고리즘은 읽히는 것만을 제시하고, 드러난 것만을 사실로 구성한다. 이 구조 안에서 ‘내면’은 시스템 밖의 언어가 된다. 플랫폼 안에서 글은 하나의 자원이다. 응원 수, 조회 수, 후원금으로 환산 가능한 단위. 텍스트는 진리를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라, 반응을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게 글은 존재의 언어에서 벗어나 상품의 언어로 전환된다.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이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모든 콘텐츠는 동일화되고, 소비자는 ‘다양성 속의 단일성’에 길들여진다. 브런치스토리의 멤버십 정책은 글을 다양화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의 수익 창출에 기여하는 글만을 선별적으로 띄워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플랫폼은 ‘문화의 민주화’가 아니라 ‘가공된 반응의 독점화’를 수행한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이 인간의 사유 능력을 동일화된 양식으로 마비시킨다고 보았다. 브런치스토리의 수익화 모델은 그 연장선에 있다. 플랫폼은 다양성 대신 일관된 형식을 유도하고, 작가들은 점점 더 알고리즘에 맞춘 글을 쓴다. 알고리즘은 예측 가능성을 보상하고, 예측 불가능성은 소외된다. 결국 쓰는 이의 개성, 질문, 실험은 플랫폼의 기준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플랫폼은 묻지 않는다. 그 글이 정말로 필요했는지.


독일 사회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 나무위키



우리는 다시 무엇을 써야 하는가


글을 쓰는 일은 본디 고독하고, 느리며, 은밀한 작업이다. 그것은 내면의 대화이고, 세계에 대한 응시이며, 어떤 침묵을 끝내기 위한 손끝의 저항이다. 내면의 진동을 따라 문장을 세우고, 의미를 갈무리한 침묵 속에서 다시 문장을 썼다. 그러나 플랫폼은 이 시간과 방식마저 조절하려 한다. 플랫폼은 이 모든 것에 타이머를 단다. 3분 안에 읽히는 글, 5줄 안에 결론이 나는 서사, 30초 안에 후원이 발생하는 구조. 고요한 사유, 멈추어 있는 문장, 맥락을 요구하는 질문은 부적합하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글을 쓰는가?
아니면, 노출되기 위한 언어를 가공하는가?


고흐는 한 편지에서 동생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고통 속에서 붓을 들어야 했고, 침묵 속에서 물감을 섞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쓰는 일도 그렇다. 고통 속에서 시작되고, 침묵 속에서 다듬어진다. 그것은 생산성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기 세계와 대면하는 방식이며, 말이 닿지 않는 존재를 향한 응시다. 쓰는 이의 내면이란 그런 것이다. 수익이나 반응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 그러나 글을 쓰는 존재가 스스로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이유.


카프카는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만이 글을 쓸 자격이 있다고 했고,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썼다. 오늘날 그 방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대에 단 하루도 유명하지 않았지만, 단 한 문장으로 시대를 꿰뚫었다. 그들의 글쓰기 시간은 누군가의 타이머에 측정되지 않았다. 자기만의 사유를 허락하는 비노출의 시간. 글을 쓰기 위한 ‘시선’이 플랫폼 밖에서 유지될 수 있는 시간.



또 다른 구조를 상상하는 일


수익화가 글쓰기의 미래를 전부 결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글을 쓰는 이유를 되묻고, 플랫폼 밖의 리듬을 회복할 수 있다. 수익과 노출이 아닌, 의미와 밀도를 기준으로 작동하는 글쓰기 공동체. 알고리즘이 아닌 손으로 고른 글을 편집하는 공간. 그런 대안적 생태계를 상상하는 일은 사치가 아니라, 윤리다.


이 글을 보고 상당수는 '고상 떤다'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다수의 불편한 마음 뒤에는 늘 소수의 수혜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스템이라는 폭주는 이처럼 갈라치며 인간을 길들인다. 글을 쓰면서도 양가적 고민이 든다. 시스템에 순응하는 척 경험하다가 어느 순간의 틈을 파고드는 감내를 선택할까? 아니면 준비된 여력으로 과감히 반기를 들고 문제를 따지며 공론화하여 전복할 것인가? 그러나 미미한 존재의 선택은 절이 싫어 떠난 중처럼 회피의 결단뿐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는 것은. Sora


글을 쓴다는 것은 여전히,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다. 그것이 읽히지 않더라도, 수익이 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써야 할 문장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계속 써야 한다. 작게, 느리게, 그러나 끈질기게. 플랫폼이 방향을 잃을수록, 글은 방향이 되어야 한다.


플랫폼이 자본을 향해 길을 트는 동안, 우리는 그 바깥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수 있지 않을까? 플랫폼은 공공성을 포기할 수 있지만, 글쓰기는 모두의 모든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증언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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