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아래에서, 조르바는 춤을 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여름 입구에서 다시 펼치고

by 박 스테파노

두 갈래 길, 그리고 조르바의 웃음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봉우리에 이를 수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 <그리스인 조르바> 중-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불확실성을 몸으로 살아낸 한 인물에 대한 찬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철학을 글로 쓰기보다는, 육체를 던져 살아내야 한다고 믿은 작가다. 그의 문학에는 언제나 육체와 영혼, 고통과 환희, 죽음과 삶이 격렬하게 부딪힌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바로 그 사유의 생생한 형상화다.


소설 속 조르바는 철학적 사유의 언어를 쓰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육화된 철학적 인간이다. 그는 책상 앞이 아니라 광산의 흙먼지 속에서,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살과 피와 감정의 결로 삶을 이해한다.


인용된 이 문장은 그의 어떤 삶의 장면보다도, 조르바가 우리에게 던지는 사유의 심연을 압축한다. 삶과 죽음, 혹은 그 사이의 감각과 무감각에 대한 통찰. 조르바는 그 중간 지점을 살아낸다. 그는 죽음을 피하지도, 끌어안지도 않는다. 그는 죽음을 기억하되, 그것에 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매일의 불확실함 속에서 춤을 추듯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잔차키스가 말한 ‘살아 있는 인간’이다.


결국 그곳에 다다른다. 오른다면. Sora


두 갈래 길. 그것은 흔히 선택의 은유로 읽히지만, 여기서의 길은 방향이 아니라 상태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삶’과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삶’—상반된 이 두 상태는 역설적으로 같은 내상을 공유한다.


살아 있으되 살아 있지 않은 상태, 혹은 죽음을 너무 가까이 끌어안은 탓에 정작 삶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 조르바는 이 양 극단의 길 모두를 살아봤고, 그 끝이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이다. 그는 묻는다. 우리는 정말 살아 있는가?



미세 존재의 감각 상실


오늘의 우리는 전례 없이 건강하고, 전례 없이 오래 산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은 점점 퇴화하고 있다. 시스템은 우리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되, ‘살아 있음의 감각’을 허락하진 않는다. 반복되는 일정, 관리되는 수면, 조절 가능한 감정, 예측 가능한 경로. 현대의 생은 확률과 표준편차로 측정되는 안정된 그래프일 수는 있어도, 파열과 진폭으로 울리는 고유한 심장은 점점 사라진다.


조르바는 이 시스템의 언저리에조차 들지 못한 자였다. 그는 메타데이터가 없는 인간이었다. 불안정하고, 즉흥적이며, 감정과 육체의 진동으로 존재하는 사람. 오늘날 우리가 ‘미세 존재’가 되어가는 이유는, 삶이 아니라 생존을 관리받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바의 말은 그 미세한 존재의 흐려진 경계, 삶과 죽음 사이의 감각 소실을 환기시킨다.


죽음이 없는 듯한 삶이란, 고요한 심장소리를 측정 불가능한 수준으로 낮춘 삶이다. 반대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의 삶은 모든 감각이 과잉되다 못해 마비되는 상태다. 결과는 같다. 하나는 삶의 감각을 잃고, 다른 하나는 삶의 방향을 잃는다. 두 길은 결국 ‘살지 못하는’ 하나의 길이다.


카잔차키스가 그토록 경멸한 것은 이런 ‘무감각한 상태’였다. 그는 <신에 대한 보고서>에서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자유는 무책임이 아니라, 어떤 시스템도 자신의 삶과 죽음을 대신 정의할 수 없다는 실존의 자기결정권이다. 조르바는 그 자유를, 이데올로기가 아닌 리듬으로 살아낸다. 시장에서 춤을 추고, 광산에서 노래를 부르고, 상실 앞에서 아우성을 토해내는 방식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 Explorer Ride


오늘날 우리는 삶의 토양을 스스로 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시스템은 매일 우리에게 적절한 산도와 영양분을 제공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자기 색을 상실한 채 무채색으로 살아간다. 죽음을 지운 삶. 죽음을 과잉 감각하는 삶. 어느 쪽이든, 우리는 삶의 본래 색을 잃어간다.



수국, 존재의 색을 바꾸는 꽃


여름의 수국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식물이다. 수국의 꽃말이 ‘변덕’, ‘변화’로 읽히는 이유는 단 하나. 토양의 산도(pH)에 따라 꽃잎의 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산성에서는 푸른빛, 중성에서는 보라, 알칼리성에서는 붉은빛. 한 뿌리에서 시작된 생명이지만, 그 뿌리가 박힌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빛으로 피어난다.


수국은 여름의 가장 불안한 식물이다. 한 송이 안에 푸른빛과 붉은빛이 공존하고, 토양의 산도에 따라 그 빛깔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수국의 색은 정체성이 아니라, 감응이다. 어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생명이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수국은 자신의 뿌리가 박힌 환경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충실하게 피어냄으로써 응답한다. 어떤 빛이 ‘진짜’인지 묻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지금 여기, 이 흙과 빗물과 햇빛이 준 색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이런 점에서 수국은 실존의 꽃이다. 수국은 고정된 자아를 꿈꾸지 않는다. 대신 살아가는 조건 속에서 매 순간 스스로를 갱신한다. 조건을 바꾸려 하지 않고, 조건을 ‘감각’하여 자기 존재를 매번 새롭게 물들인다. 그 변화는 흔들림이지만, 불안이 아니라 응답이며, 살아 있음의 증거다.


수국은 실존의 꽃이다. Sora


조르바의 존재도 이와 닮았다. 그는 본질을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살아내는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물들고, 피어나는 존재로 이해한다. 삶은 추상적 신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토양이 무엇인지 감각하는 능력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조르바는 철저히 수국의 인간이다. 삶의 산도는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그는 거기에 저항하기보다 물들며 존재한다. 그러나 그 물듦은 무력한 수동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적인 감각의 개방이다. 삶이 산성이라면 파랗게, 고통이 깊으면 그만큼 더 선명하게 자신을 피워낸다. 그에게 ‘사는 것’은 그저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라, 매일의 땅에 물드는 예술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내면을 고정된 정체성이나 이상적 자아로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수국처럼 끊임없이 색을 바꾸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고통의 날에는 푸르게, 분노의 날에는 붉게, 회복의 날에는 보랏빛으로. 그 색의 변화는 흔들리는 삶의 증상인 동시에, 살아 있는 감각의 표현이다.


수국의 색은 선택이 아니라 반응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체념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다. 조르바는 바로 이 수국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는 매일 변화하는 생의 토양에 스스로를 던지고, 그 안에서 자신의 온 감각을 동원해 살아낸다. 고통에도, 실연에도, 죽음 앞에도 그는 물들고, 그 물듦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수국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색은 무엇이냐고. 지금 당신이 딛고 있는 토양은 어떤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느냐고. 그리고 당신은 그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고. 삶이 정체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수국은 그 감각의 언어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래에서 조르바를 떠올릴 수 있다. 그도 삶의 산도를 숨기지 않았고, 날마다 그것에 춤으로 답했다.


삶은 결코 한 가지 색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단 하나의 색만을 고집할 때, 우리는 감각을 잃고 존재의 무채색 상태로 빠져든다.


출처 : 강진 문화관광 (강진수국길축제의 풍경)



메멘토 모리, 기억되기를 기다리는 그림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고대의 이 라틴어 문장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실존적 초대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죽음에 얽매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감각을 되찾기 위한 근원적 시선의 회복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메멘토 모리는 왜곡되거나 삭제되었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완전히 지운 시스템적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불멸의 존재처럼 소비하고 쌓고 경쟁하며 산다. 다른 한편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과잉 내면화하며, ‘오늘’에 진입하지 못한 채 ‘내일의 불안’에 머무른다.


말은 오늘날 너무도 낭만화되었거나, 반대로 기피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조르바는 메멘토 모리를 이념이나 교훈이 아닌, 살아 있는 몸의 기억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아침이면 손톱에 낀 흙을 보며 오늘이 살아 있는 날임을 확인하고, 밤이면 실연한 여인에게 마늘과 생선국을 끓여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의 메멘토 모리는 거창한 묘비명이 아니라, 삶의 구체성 속에 스며 있는 죽음의 기억이다. 그것은 슬픔에 젖은 수국 한 송이처럼, 삶의 색을 바꾸지만 꽃을 지우지 않는다. 카잔차키스는 죽음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영혼의 진통’을 강조한다. 고통을 통과한 영혼만이 새로운 빛깔을 피워낼 수 있으며, 그것은 죽음으로 삶을 증명하는 꽃잎의 변화와도 같다.


<글을 쓰는 성자 제롬 (St. Jerome Writing)>은 메멘토 모리의 대표작품. 카라바조. 1605 , oil on canvas,112 cm X 157 cm


조르바는 둘 뿐이라는 기묘한 양자택일을 모두를 우회한다. 그는 매일 죽음을 기억하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슬픔을 피하지 않지만, 그 슬픔이 자신을 삼키게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메멘토 모리는 어떤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그날 밤의 춤이고, 그날의 대화이며,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감각의 드문 흔들림이다.



파국 없는 춤


조르바의 존재는 어떤 제도도, 규칙도, 해석도 완전히 가두지 못한다. 그는 노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실연을 하면서 요리를 한다. 그는 좌절 앞에서 무너지고, 무너짐 속에서도 춤을 춘다. 그의 삶은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기이하게도 일관된 리듬을 가진다. 그것은 ‘살아 있음’ 그 자체의 리듬이다.


조르바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춤춘다. 그 춤은 해답이 아니라 존재의 감각이다. 그는 죽음을 이기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산다. 그는 수국처럼 매일 색을 바꾸며 피어난다. 어제는 파란 슬픔, 오늘은 붉은 분노, 내일은 보랏빛 환희.


그에 비해 우리는 끝없이 파국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마감일, 정년, 질병, 실패, 단절, 죽음. 이 모든 것이 파국의 형태로 우리 삶을 위협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조르바는 그 파국들을 삶의 일부로 껴안는다.


그래서 그는 말할 수 있다.


“그 길이나 저 길이나,
결국 봉우리에 이를 수 있다.”


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걷는 태도가 중요하다. 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의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춤은 해답이 아니라 존재의 감각이다. 1964년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장면을 그려 본다. Sora


죽음의 유무가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태도가 죽음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를 결정한다. 그것이 조르바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문학적인 철학이며, 철학적인 문학이다.



존재의 감각을 회복하기 위하여


결국 조르바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제, 우리는 어느 토양 위에 서 있는가?
우리의 삶은 산성인가, 알칼리성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에 따라 색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죽음 없이 사는가,
아니면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며 사는가?
그리고 어느 쪽이든,
당신은 지금 진정 ‘살고’ 있는가?


오늘의 시스템은 존재를 관리하지만, 존재의 감각을 회복시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점점 더 효율적으로 살되, 점점 더 실존적으로 소외된다. 조르바는 이 모든 정교한 관리의 외곽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땀이 배어 있는 손으로 춤을 추자고 말한다. 살아 있는 동안만 가능한 유일한 행위—불완전하고, 엇박이고, 기이한, 그러나 절대적인 몸짓으로서의 삶.


그리고 그 춤은, 죽음 너머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를 위해 흔들리는 몸의 은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멀리하는 것도, 붙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죽음을 기억한 채, 오늘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감각이다. 그 감각이야말로 조르바가 끝내 가르쳐주지 못한, 그러나 온 존재로 보여준 문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감각이다. 삶의 산도를 인식하고, 죽음의 그림자를 기억하며, 지금 피어날 색을 선택하는 감각. 그 감각만이, 시스템 안의 무채색 인간을 넘어, 진정한 ‘살아 있음’으로 이끌 것이다.


조르바는 끝내 우리에게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말 대신 춤을 남겼고, 그 춤 아래 수국은 조용히 색을 바꾸었다.


살아 있음이야말로, 우리가 매일 새롭게 피워내야 할 유일한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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