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라는 착각>을 읽고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이름의 기만
선거철의 공약의 핵심은 '성장에 대한 약속'으로 굳어진지 오래다. 큰 의심없이 성장에 대한 로드맵이 국가 지도자의 주요한 자질이라 여기며 평가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대전제, 성장에 대한 보장이 지속가능한 진실인가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못한다. 과연 성장은 지속 가능하게 무한 동력을 얻어 우상향하는 그래프를 만들까? 우주와 만물의 이치를 보면 그럴리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까닫는다. 저 하늘에 빛나는 별들도 생애주기를 보내고 언젠가는 소멸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안호기의 <성장이라는 착각>은 ‘성장 중심’이라는 사고의 허구와 경계를 꺼내 보이며,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단어에 스며든 이중적 역할을 해체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속 가능성'은 성장을 위한 말이 아니라, 성장이라는 가면의 기득을 좀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한 포장이다. 성장이라는 단어가 정치·경제·윤리의 이름으로 당연시되어 온 시간 동안, 그 뒤편에서는 행복과 존엄이 뒷걸음질쳤다. 그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이라는 가스라이팅으로 한정적 재화는 한 쪽으로 쏠리는 비탈길을 만들었다.
성장은 언제부터 인간 삶의 주된 목표였던가? GDP가 올라간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통계와 사례로 그 허망한 관계를 고발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말은 사실상 기득권의 ‘염원’이다. 염원(Aspirational)은 조직의 욕망을 꾸미고, 정책의 구호가 되며, 사회적 실패를 정당화하는 도구다. 결국 ‘지속 가능한 성장’은 이룰 수 없는 약속이며, 오래된 기만이다. 지속 가능한 삶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이윤을 위한 구조적 설계라는 점에서 이 단어의 은폐성은 더욱 교묘하다.
이 은폐는 정책 언어에도 스며든다. 저성장 시대에 청년 창업을 권유하는 국가의 언설, 노인을 위한 일자리라는 이름의 감정노동 재배치, 중소기업에 지원된다는 명목으로 대기업에 환원되는 보조금 체계. 성장은 삶의 동반자가 아니라 착취의 명분으로 동원된다. 이 책은 바로 그 말을 해준다. 성장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이며, 감춰진 욕망이다.
성장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왔는가
책은 단지 이론적 비판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 이 사회의 궤적을 짚는다. 우울증, 자살률, 고립, 돌봄의 붕괴, 관계의 상실… 성장의 이름으로 반복된 무언가가 사람들을 부서뜨리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고독사가 아니다. 책은 절망사(death of despair)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공동체의 붕괴는 개별자의 선택이 아니라, 체계의 선택이다. 삶의 구조가 사람을 병들게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책임을 묻는 사회의 무책임을 책은 조목조목 비판한다.
특히 ‘3요’—“제가요? 이걸요? 왜요?”—로 대변되는 MZ세대의 반응은, 조직 사회와 성장 신화에 대한 정서적 저항으로 읽힌다. 이들은 성장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받지 못한 채, ‘성공’을 내면화하라는 압박만을 받는다. 그들에게 공정은 가까운 개념일 수 있지만, 기후정의나 차별 해소는 멀게 느껴진다. 이는 성장을 박탈당한 세대가 탈성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성장의 과실을 당연한 자기 것으로 여기어 박탈을 느낀다. 원래 없었던 것에 대한 박탈은 그간 기성 세대의 성장 담론이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통이다. 그래서 탈성장은 유예된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당장의 생존과 연결된 실천이 되어야만 한다.
기후 위기와 환경 문제도 더 이상 거대한 이상으로만 말할 수 없다. 전기차의 확산, ESG 경영, 탄소배출권 거래... 이 모든 담론이 어느 순간부터 자본의 면죄부가 되어버렸다. 그린워싱은 단순한 허위가 아니라, 구조화된 착각이다. 저자는 이 허상을 비판하며 'E'만 강조되는 ESG의 편향성에 주목한다. 환경을 위한 전략이 아니라, 환경을 무기로 삼은 전략. 이는 성장의 연장선에서 생겨난 착시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길을 잃는다.
예수는 탈성장주의자였다
책을 읽으며 문득, 신앙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예수는 탈성장주의자였다. “두 벌 옷을 가진 자는 하나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가진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가진 것과 잃는 것, 덜 갖는 것이 진리였던 그 가르침은, 오늘날 자본주의에 결합된 거대 종교의 시스템 속에서 거의 무력화됐다. 성장을 욕망하는 종교, 부동산을 투자하는 성직자, 영혼보다 브랜드가 더 많은 교회. 성장주의는 신앙까지 집어삼킨다. 저자는 종교를 직접 다루지 않지만, 이 책은 그런 교차점에서 독자의 생각을 열어젖힌다. 탈성장은 신앙의 회복이자 해방의 언어일 수도 있다.
탈성장의 담론은 후퇴나 퇴행의 의미가 아니다. 이미 세상의 속도는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고, 재화는 넘치다 못해 버리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이 세상이 물질적 재화는 70억 인구가 다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이다. 다만 그것이 10%, 아니 1%에게 편중되어 있을 뿐이다. 일론 머스크는 하루에 백만 달러를 소비해도 500년 가까이 걸리는 부를 홀로 독점하고 있다. 스스로 캐내거나 경작하거나 만든 것이 아닌 자신의 새로운 디지털 봉건 영지에서 거둔 소작료와 노동, 조공으로 만든 자본의 제국이다.
그렇기에 탈성장은 단지 경제 패러다임의 교체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감각의 전환이다.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언, 더 적은 것이 더 깊은 삶이라는 인식, 그리고 소유하지 않아도 함께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는 곧 영성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성장하라’는 강요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은 문장이다. 다만 실제 삶에서 욕망에 밀려 앞장서지 못할 뿐이다.
플랫폼은 봉건 영지다
책의 약한 부분은 다소 급한 결말과 주변핡기 식의 담론에 있다. 특히 검증보다 소개에 가까운 보고서와 증례를 예시 삼는다. 예를 들어 ‘공유경제’에 대한 낙관적 기대다. 에어비앤비나 우버, 혹은 플랫폼 기반의 서비스들은 더 이상 ‘공유’의 가치를 품지 않는다. 그것은 자산 없는 자들에게 리스크를 전가하는 ‘렌털 자본주의’이며, 플랫폼은 새로운 영지다. 공유하는 플랫폼에서 사용자 계급의 모두는 미세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리게 된다. 공유 경제에 공유가 사라진지 오래다.
반면에 이 예시와 상충하게도 플랫폼 봉건주의를 경고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 플랫폼을 살펴 보면 그 경고가 쉬이 이해된다. 글을 쓰는 사람의 미세한 노동은 데이터로 변환되어 플랫폼의 자산이 되고, 창작자는 알고리즘의 지대로 밀려난다. 다시 사용자들은 응원하기, 구독하기를 통해 플랫폼이라는 영지를 사용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그곳에 잔존할 수 있게 된다. 브런치스토리의 작가 멤버십처럼, 창작자는 서비스를 쓰는 동시에 데이터를 헌납하는 소작농이 된다.
플랫폼 자본주의는 물리적 토지 없이도 봉건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데이터, 알고리즘, 이용약관. 이 추상적 통치 수단들이 디지털 시민의 삶을 제한한다. 공유경제는 이제 나눔이 아니라 동의 없는 추출이 되었고, 탈성장의 요구는 기술의 민주화를 향한 요구와 맞닿는다. 성장의 명분으로 무분별한 혁신을 좇는 지금, 우리는 기술의 목적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은 관성적 발전에만 몰두하지 그 외에 벌어지는 모든 사태에 불감하기 마련이다. 기능적으로 더 우수하고 기술적 시각에서 더 나이스한 것이 중요하다. 이 나라 AI 수석이 엔지니어라는 점은 큰 우려가 되는 이유다.
삶의 속도를 바꾸는 상상력
<성장이라는 착각>은 유럽 도시의 정책 실험들—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프라이부르크 등—을 예로 들며 ‘덜 쓰고도 더 행복한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전환은 노동시간의 단축, 기본소득의 논의, 지역화폐와 공유자산의 재구성, 돌봄의 재분배 같은 구체적 삶의 실천으로 연결된다. 문제는 그 길이 멀고 불편하다는 데 있다. 기존 체계를 유지하던 이들의 저항, '익숙함'이라는 관성, 그리고 '풍요'에 길들여진 감각을 거스르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가진 것도 없는 보수주의자들은 그저 있지도 않은 무엇의 박탈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탈성장은 퇴보가 아니라 삶의 속도를 다시 조정하는 일이라고. 더 많이 갖고, 더 멀리 가고, 더 빨리 이루는 삶이 아니라, 덜 갖고, 가까이 있으며, 천천히 사는 삶. 바로 그 전환의 감각이 지금, 필요하다고. 성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상상은 불편하지만, 그것 없이는 내일이 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 징후 속에 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퇴사를 말하고, 도시를 벗어나고, 나눔과 돌봄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책이 말하는 탈성장은 바로 이 작은 흐름들의 모자이크다. 지금 여기의 탈성장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강속구 투수가 저속의 커브를 던지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해지면 최고의 무기가 된다. 150km/h의 속도에 길들여진 타자는 100km/h 내외의 저속 커브에 무기력해진다. 천천히라는 것은 말보다 어럽고 힘든 일이다.
질문을 만드는 책
이 책은 비판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따뜻하다. 어느 페이지에서도 세상을 살아 가는 독자를 가르치려 들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향해 함께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책은 대안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을 묻는다.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된다. 그 멈춤이 시작이라면, 이 책은 길을 잃은 시대에 놓여진 하나의 이정표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기자 출신 언론인이 가지는 제네랄리스트의 한계를 너무나도 많은 스페셜리스트의 따옴표로 채웠다. 인용 각주도 많지만 그렇다고 폭넓은 연구의 깊이는 가지지 못했다. 특히 사례에 대한 것은 시대에 뒤쳐진 것들의 나열이 제법이다. 그리고 대선 시기를 겨냥한 출판으로 비문 교정이나 오탈자도 제법이다. '2022년에 한국에서 월드컵을 치르었다'는 식의 간단한 검증도 건너간 듯 급해 보인 마무리다. 특히 책의 구성이 담론을 형성하는 점진적 논리가 부족하고 그저 사실의 나열이 주를 이룬다.
서평의 부탁이 있는, 그리고 책을 제공하고 서평 모집을 하는 이유는 이 책에 대한 환호와 갈채를 유도함일테다. 그러나 그 반대의 의견, 미진함과 개선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이야 말로 저자와 출판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대문자 'T'의 생각을 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금의 시대에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당연시 여기는 성장과 자본의 담론을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해준다. 특히 도입부에 루이블랑이 말한 “자본주의란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자본을 전유하는 체제”라는 문장은, 1851년에 쓰였지만, 지금 빅테크 기업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에 조금도 낡지 않았다.
<성장이라는 착각>은 읽는 이를 변혁의 선동가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 안의 조용한 질문가로 돌아가게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온 단어들, 익숙하게 쓰던 언어들—그 모든 것이 낡고 위험하다는 자각은, 변화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 걸음을 멈추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책과 같은 질문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반복해서 주고 받아야 한다. 글과 말이 코딩과 알고리즘보다 유용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