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서사의 위기>를 읽고
이야기라는 이름의 혼란, 혹은 서사의 실종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한병철 <서사의 위기> 중-
우리는 매일 ‘이야기’를 말하고, 듣고, 소비한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보고듣는 드라마 속 서사, SNS 알고리즘이 골라준 짧은 감정의 스냅숏, 어느 강연자가 강조하는 브랜드 스토리.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삶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존재의 맥락인가, 아니면 휘발성 감정의 조각인가.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겪는 정체성의 붕괴, 공동체의 해체, 기억의 표피화를 ‘서사의 상실’로 진단한다. 그는 말한다. 이야기가 더는 삶을 조직하지 못한다고. 이 말은 단지 문학의 쇠락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의 고통과 구원을 의미화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도발적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를 포함한, 가슴에 콕콕 박히는 거부감을 느낀다. 이 가슴 저리는 거부감에는 서사를 저버리고 손 쉬운 스토리 콘텐츠를 쫓는다는 단발의 비평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 한국어 안에서 ‘story’와 ‘narrative’는 모두 ‘이야기’라는 동일한 얼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언어적으로 이미 서사의 감각을 더 잃어버리고 있는 것 아닐까.
한국어의 ‘이야기’는 설화, 전설, 구비문학, 개인 체험담, 소설,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서술된 내용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개념이라, 'story'든 'narrative'든 다 그냥 ‘이야기’로 뭉뚱그려 번역되는 일이 많다. ‘줄거리가 좋아’라는 평가는 어쩌면 ‘삶을 해석하는 힘’이 아니라 ‘감정 몰입의 강도’를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서사를 스토리로 오해하고, 이야기의 무게를 점점 가볍게 만든다.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 속에서 서사는 스토리의 그림자처럼 퇴색되고 있다.
‘서사’라는 단어의 전문화된 쓰임으로 호출된다. 원래는 ‘이야기 구조’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뜻으로, 문학이론이나 서사학에서 사용되던 ‘narrative’ 번역어다. 그런데 점점 ‘이야기의 뼈대’라는 뜻으로 일반화되면서, 많은 이들이 ‘서사=스토리’라고 이해해버리는 혼동이 생겼다. ‘스토리’가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되면서 역설로 확장되었다. 드라마, 영화, 광고, 유튜브 영상 등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스토리’라는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다 보니, ‘이야기=스토리’라는 감각적 반응이 먼저 일어나고, 서사는 오히려 ‘무거운 이론어’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서사란 무엇이며, 왜 그것은 사라졌는가
서사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고통과 죽음, 사랑과 구원을 어떤 시간적 맥락 안에서 의미화하려는 시도다. 한병철은 ‘서사’를 상징과 의미의 질서 속에 있는 구조적 이야기로 정의한다. 서사는 삶을 꿰뚫고 가는 하나의 줄기로서, 단절된 순간들을 하나의 길 위에 배열하는 장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줄기를 잃었다. 서사는 더 이상 ‘의미’를 생성하지 않는다. 서사는 전승적 지식을 말한다. 여기에서 지식은 정보와 쉽게 혼동되는데, 참된 지식은 코 앞의 답안이 아니라 먼 데서 오는 질문이다. 이를 지식의 원격성이라고 하며, 이는 지식의 본질이라고 한병철은 말한다.
폴 리쾨르에 따르면, 인간은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이야기한다. 그는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이 누구인가는 자신이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때 서사는 단순히 일어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기억과 망각, 기대와 회고가 엮인 하나의 해석 구조다. 다시 말해, 서사란 나의 삶을 전체로서 조망하게 하는 자기 이해의 틀이다. 서사는 나만의 이야기 즉 삶의 그 자체다. 그러기에 먼 데서 오는 서사는 방향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내안의 나에게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세상 밖에서 나에게 온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다수의 이야기, 즉 ‘스토리’는 리쾨르가 말한 서사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들의 의미망을 구축하기보다는, 감정을 즉시 자극하고 곧바로 소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극적인 시리즈, 쇼츠 영상, SNS의 감정 스냅샷들은 구조화되지 않은 감정의 잔여물만을 남긴다. 이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에서 중독적 반복을 생산하며, 어떤 삶도 하나의 줄기로 엮지 못한다. 그 이유는 스토리는 정보의 점들이 모인 플롯이기 때문이다. 정보는 새로움이 깃들 때만 가치가 있다. 그 새로운 순간에만 생명을 지닌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 20세기 초에 이러한 조짐을 감지했다. 그는 『이야기꾼(Der Erzähler)』에서 ‘경험의 공유’로서의 이야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죽음, 노동, 기다림, 실패처럼 구체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타인에게 전승하며 의미화하는 존재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전쟁과 속도의 시대에 사람들은 경험을 나눌 수 없게 되었고, 이야기의 전통은 끊겼다. 벤야민의 통찰은 한병철의 진단과 수렴한다. 더 이상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경청은 사라졌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내면의 말을 쫓을 뿐이다.
한병철에게 오늘날의 위기는 ‘스토리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서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들이 소비되고 넘쳐나지만, 그 어디에도 존재를 조직하고 해석하는 힘은 없다. 이제 이야기는 더 이상 의미를 만들지 않고, 정체성을 생산하지도 않는다. 스토리는 스스로를 반복하고 변형할 뿐이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빠르지만 얕고, 감각적이지만 비가역적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는다. 서사는 사라지고, 우리는 ‘플롯 없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스토리셀링이 되었는가
이제 사람들은 ‘이야기’를 쓴다기보다, ‘팔리는 이야기’를 만든다. 마케팅과 브랜딩, 자기계발의 언어로 포장된 ‘나만의 서사’는 대개 서사가 아니라, 판매 가능한 스토리 플롯의 배열에 불과하다. 슬로건은 말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팔아라.” “자기만의 스토리로 경쟁하라.” 이것은 삶의 기억이 아니라, 상품의 경쟁력이 된다. 이때 ‘스토리텔링’은 더 이상 느리게 성장하는 내면의 구조가 아니라,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감정적 수단이 된다.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오늘날의 이야기가 더 이상 삶을 조직하거나 구조화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그는 서사를 삶의 깊이와 원근을 구성하는 의미의 방식으로 보며, 그것이 인간에게 방향성과 시간의 연속성을 부여한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 스토리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팔리고, 소비되고, 잊히기 위해 만들어진다.
서사는 느리고, 멀리서 온다. 그것은 종종 설명할 수 없는 채로 다가오며, 의미란 그런 설명 불가능한 것의 잔여에서 형성된다. 반면 스토리는 즉각적 의미와 즉각적 반응을 요구한다. 지금 이해되지 않으면 쓸모없고, 지금 반응하지 않으면 실패한 콘텐츠가 된다. 한병철의 사유를 빌리자면 “가까움의 폭력”이라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이야기는 멀리 있는 것으로부터의 ‘초대’가 아니라, 지금 코앞에 있는 ‘요구’로 변했다.
스토리는 언제나 다음을 향한다. 다음 장면, 다음 회차, 다음 구매. 그에게 있어서 플롯은 곧 목적이 되고, 목적은 곧 상품화 가능성이다. 이처럼 스토리는 내면을 탐색하는 길이 아니라, 감각적 점프의 연쇄로 구성된다. 따라서 스토리는 자기로부터의 이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서사가 먼 곳에서 오는 목소리라면, 스토리는 언제나 자신이 이미 아는 말만 반복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라이팅 열풍은 사실상 대부분 ‘스토리 플롯의 포장’에 가깝다. 구직을 위한 자기소개서, SNS에서의 감정 노출, ‘나를 브랜딩하는 글쓰기’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보다, 삶을 판매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로 훈련된다. 의미의 중심은 감춰진 깊이가 아니라, 외부의 반응이다. 한병철이 지적하듯, 근대화는 ‘원격성’을 해체했고, 그에 따라 삶의 내면을 타자화하는 능력도 약해졌다. 더 이상 느린 고백은 기다려지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은 제거되거나, 데이터로 환원된다. 우리는 이제 느리고 무거운 이야기를 견디지 못하며, 대신 짧고 선명한 에피소드들을 나열한다. 그 속엔 어떤 운명도, 어떤 구원도 깃들 틈이 없다.
설명할 수 없음의 자리, 의미가 태어나는 틈
서사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껴안는다. 그것은 말해지지 않는 고통, 도달할 수 없는 과거, 이해되지 않는 운명을 향해 침묵으로 답한다. 한병철은 서사는 설명 불가능한 것의 외곽을 돌며, 그 침묵 안에 머문다고 말한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머물고, 그 침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간이 만들어진다. 서사는 그러한 ‘머묾'의 기술이다.
반면 스토리는 설명되지 않는 것을 결핍이나 실패로 간주한다. ‘이야기가 안 된다’는 말은 종종 플롯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런 구조는 곧 ‘상품성 없음’으로 해석된다. 감정은 명확해야 하고, 갈등은 빠르게 해소되어야 하며, 독자는 이입하고 만족해야 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개입될 자리는 없다.
이런 구조는 실존적 고통의 이야기들을 밀어낸다. 예컨대 상실, 죽음, 병, 무력감, 기다림, 실패, 그리고 그 어떤 구원도 약속되지 않는 불확실성은 오늘의 스토리 구조에서 너무 무겁거나 너무 느리기 때문에 삭제된다. 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자가치유, 빠른 극복, 감정의 표피적 회복이다. 한병철 식으로 말하자면, 서사가 쇠퇴할수록 인간은 자기로부터 도망친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내면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플롯의 소비자로 위치 지워지기 때문이다. 이때 서사의 깊이는 정보의 빠른 전달로 대체되고, 의미는 곧 ‘쓸모’로 환원된다. 요약하자면, 오늘날의 스토리는 “의미가 아니라 기능을 가진 이야기”다.
한병철이 가장 깊이 우려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기능적 설명뿐이며, 그 설명은 더 이상 인간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인간이 고통과 죽음을 서사 안에서 견뎌왔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러한 고통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취급한다. 이는 곧 의미의 실종이기도 하다. 설명이 불가능한 것을 해석하지 않고 쓸모없다며 버리는 사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야기 없는 시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사 없는 이야기들만이 떠도는 시대다. 빠르고 명쾌하지만, 그 어떤 삶도 깊이 있게 조직하지 못하는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늘 ‘다음’을 준비하지만,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는다.
서사의 위기,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 문화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헤로도토스를 인류 최초의 ‘최고의 서사가’로 평가하며, 그의 역사 서술이 단순한 사건 기록을 넘어서는 서사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특히 페르시아 전쟁을 다루면서 전하는 샤메니투스 왕의 이야기는 서사의 심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샤메니투스 왕은 전쟁의 패배로 포로가 되었고,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그럼에도 왕은 겉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 어떤 참담한 상황에도 그가 오열하지 않은 까닭은, 아직 ‘말할 수 없는 것’이 그의 내부에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함께 늙어가던 노예 한 사람이 다시 포로로 잡혀 오자, 그는 참지 못하고 오열한다. 이 오열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과의 대면이다.
말할 수 없기에 오히려 그 부재가 더욱 선명해지고, 침묵과 언어의 경계에서 서사는 탄생한다. 한병철은 이 일화를 통해 서사가 ‘설명 불가능성’을 품으며, ‘멀리서 오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사는 즉각적으로 파악 가능한 스토리와 달리,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두고 서서히 드러나는 깊이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는 ‘이야기’를 무수히 만들어내고 소비한다. SNS의 ‘나만의 이야기’부터 브랜딩을 위한 개인 스토리텔링, 대중문화 속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콘텐츠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서사가 아니라 ‘스토리’의 범주에 머문다. 한병철이 지적한 대로, 현대 사회에서 ‘서사’는 점차 위기를 맞는다. 서사는 멀리서 오는 ‘느린’ 의미를 포용하는 존재였지만, 오늘날 스토리는 ‘바로 다음’을 위한 ‘즉각적’ 정보의 나열이다. 서사가 지닌 ‘설명할 수 없음’의 무게는 사라지고, ‘설명할 수 없으면 무가치하다’는 기준이 지배한다. 이는 근대화와 기술 발전이 원격성을 해체하고, 모든 것이 바로 눈앞에 즉시 설명되고 소비되는 상황과 맞닿는다.
특히 한국어 ‘이야기’의 중의성은 이 구조적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서사’와 ‘스토리’ 모두를 ‘이야기’라 부르면서, 서사의 깊이와 무게가 묻히고 만다. 이 ‘언어적 환원성’은 문화적 차원에서 서사의 소실을 가속한다. 말하자면, 우리 문화는 ‘이야기’를 통해 ‘서사’가 내포하는 침묵과 설명 불가능성, 그리고 시간의 깊이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져 ‘서사’를 잃어간다.
샤메니투스 왕이 마지막 노예가 잡혀오자 터뜨린 오열은 그 ‘말할 수 없음’과 ‘서사’의 부활 순간이었다. 그 오열은 서사가 말하는 ‘존재의 진실’을 압축한다. 설명 불가능한 고통과 존재의 침묵, 그 자리에서 비로소 서사는 형성된다.
현대에 필요한 것은 이 ‘서사’의 회복이다. 설명 불가능한 침묵을 견디고, ‘말해질 수 없음’을 품으며, ‘멀리서 오는 의미’를 기다리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단순한 정보 소비를 넘어 삶의 깊이와 인간 존재의 진실에 닿는다. 그렇기에 서사는 예술과 철학, 신학이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깊고 먼 길이다.
오늘날 ‘스토리셀링’의 홍수 속에서 진짜 ‘서사’는 점점 소멸해가고 있다. 속도와 즉각적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 깊이와 침묵을 견뎌내는 서사의 시간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서사가 사라진 자리는 결코 공허하지 않다. 그 자리는 허망한 ‘즉각적 의미의 허상’으로 채워질 뿐이다. 진정한 서사의 회복, 설명 불가능한 존재의 무게를 품고 먼 곳에서 오는 의미를 기다리는 일만이 우리 시대의 문화적·철학적 과제를 완성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