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하는 손, 존재를 덧 그리는 일

미술관의 Copiste로 보는 '닮는다는 것'에 대하여

by 박 스테파노

중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벽면에 붙은 커다란 모과 그림을 바라보며, 우리는 책상 위에 펼친 스케치북에 그 이미지를 ‘데생’해야 했다. 단순히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교과서 위 그림을 가로 세로 두 줄씩 그어 아홉 칸으로 나누라 하셨다. 전체를 닮기 위해선, 전체부터 보지 말라고. 칸마다 다른 비율, 미묘하게 기울어진 곡선, 그림자 한 점의 방향까지를 하나씩 베껴 그리는 일. 그건 손끝의 연습이기보다 눈의 훈련이었고, 결국 마음의 감각을 바꾸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예술은 모사에서 시작돼. 보라, 그리고 다시 그려라. 본다는 건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닮아보려는 마음이니까.”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나는 종종 루브르 박물관을 떠올리게 된다. 그곳에 가면 명화 앞에 캔버스나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모나리자 앞의 밀물 같은 인파 너머, 홀 한편에서 루벤스나 다비드, 푸생의 대작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붓을 들고 있다. 마치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언의 대화처럼, 그리는 자와 그려진 자가 묵묵히 서로를 응시하는 풍경. 루브르의 ‘copiste’들이다.


Art Students and Copyists in the Louvre Gallery. Winslow Holmer. FineArt America


루브르 박물관은 지금도 정식 허가를 받은 이들에게 명화를 직접 모사할 수 있도록 공간과 시간의 일부를 내어준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작품을 지정해 신청서를 제출하고, 작품의 크기와 위치, 사용할 매체와 기간까지 상세히 기술해야 한다. 허가를 얻으면 copiste ID가 주어지고, 지정된 시간 동안 미술관 한복판에서 그림을 베낄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다만 유화는 금지된다. 수채화, 파스텔, 연필 등의 재료만 허용되며, 원본과 같은 크기로 그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복제의 완전성을 금하는 이 제한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모사를 창작에 가깝게 만든다. 그래서 이들을 Art Studen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제도는 루브르만의 특권이 아니다. 스페인의 프라도,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 이탈리아의 우피치 갤러리까지—세계의 유서 깊은 미술관들은 저마다 ‘모사하는 자’들에게 조심스럽게 길을 열어준다. 그들은 고전 회화의 결을 눈으로 좇고, 손끝으로 되짚으며, 단순한 재현을 넘어 회화의 언어를 통과해 가는 무언의 수행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카소, 마네나 세잔, 앵그르 역시 copiste의 계보에 속한다. 이들 중 다수는 젊은 시절, 거장의 작품 앞에서 붓을 들며 그들의 시선과 구도를 '닮아보는 법'으로 예술을 배웠다. 그들은 단지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 다시 그려내며 배웠다.



모사, 단지 닮는 일이 아닌 ‘살아보는 일’


모사(模寫), 이 익숙한 단어는 표면적으로는 ‘그림을 본떠 그리는 일’을 뜻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모(模)’는 본을 뜨는 일이다. 형상뿐 아니라, 구성, 균형, 시간의 감각까지를 담는다. ‘사(寫)’는 손으로 베껴 쓰는 행위지만, 단순히 손의 기술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정신을 옮기는 방식이다. 결국 모사란 형식과 정신을 함께 옮겨 심는 일이며, 하나의 ‘실존적 재현’이다.


예술에서 모사는 반복이 아니라 변주이고, 재현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기다. 존재의 껍질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지닌 리듬을 다시 울려보는 일이다. 회화에서 그랬듯, 문학에서도 모사는 창작의 가장 근원적인 방식을 구성한다.


모사(Copiste)의 흔적을 중세시대 수도원의 필사수도사의 공간 스크립토룸(scriptorum)에서 찾을 수 있다. 스크립트룸은 중세 시대 수도원 등에서 필사본을 만들던 공간을 의미한다. 특히 수도원 내에서 책을 보관하고 필사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다. 영화로 제작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벌어지는 살인 미스터리가 일어 나는 곳이 이곳이다. 스크립트룸의 수사들이 금서를 필사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곳. 모사와 유사한 필사의 역사 중 한 장면이다.


필사 수도승. Sora


이런 연상에서 많은 이들이 문학에서의 ‘필사’를 모사와 동일하게 여기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필사는 모사의 전 단계일 뿐이다. 필사는 그저 따라 쓰는 일이다. 문장과 어휘의 표면을 따라가되, 그 속의 호흡과 시선을 가늠하지는 않는다. 반면 모사는, 특정 작가의 문장을 읽고, 그것을 해체하고, 자신의 언어와 경험으로 다시 구성해 내는 행위다. 하루키의 문체로 내 상실을 말하고, 김훈의 문장 호흡으로 내 침묵을 붙잡는 일. 그건 더 이상 ‘따라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말투로 나를 말해보는 연기이자 수행이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자기 언어를 얻은 작가들은 많다. 김연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사했고, 김훈은 ‘좋은 문장을 베끼며 문장이라는 숨을 익혔다’고 고백한다. 이들에게 모사는 형식의 연습이 아닌, 감각의 훈련이며, 존재의 내력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었다. 문학에서 모사는 그래서 하나의 ‘시선 훈련’이고, ‘내면을 덧칠하는 기술’이며, ‘형태를 되살리는 사유의 방식’이다.



기계는 모사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모사와 ‘AI의 재현’을 혼동한다. 거대언어모델은 인간의 문장을 학습하여 그럴듯한 말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사가 아니다. 기계가 수행하는 것은 사유 없는 패턴의 재배열이며, 상호성과 감응이 결여된 추론적 조합이다. 그것은 손의 기억도, 눈의 떨림도, 마음의 흔들림도 갖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그 어떤 ‘카피스트’도 될 수 없다.


거대언어모델로 지칭되는 생성형 AI에게 글쓰기를 시켜보면 제법이다. 그럴듯하게 나의 글을 학습하고 비슷한 어조로 빈칸을 채워 준다. 처음에는 편리와 편의로 시작한 조력이 이제는 주요한 수단과 몸통이 되어 버린다. 언어모델은 수많은 문장을 학습하여 한 단어, 어절 다음에 확률적으로 어떤 어절이 와야 작업 주문자의 요구에 부응하는지를 추론 계산해 텍스트를 찍어낸다. 이는 문장을 의미와 기표로 읽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0과 1의 반복적인 연산으로 내는 구구단과 같은 방법일 뿐이다.


AI는 모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계산을 하는 것. Sora


결국 인간이 AI의 편의적 생성물에 길들여져 복합적이고 사유적인 문장을 스스로 창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인간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계산하여 대처하는 것이다. 그 대처는 창조의 저 반대편에 존재할 뿐이다.


모사는 삶을 살아낸 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림 앞에 오래 앉아 본 자, 문장을 쓰다가 멈춰 선 자, 타인의 형식을 통과하며 나를 발견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예술적 윤리다. 그것은 흉내가 아니라 공명이고,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존재론적 행위다.



닮고 싶은 것을 담고 싶은 마음


중학교 미술 시간, 내 손은 단지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균열을 내고, 내가 무엇을 ‘본다’고 여겨왔는지 되묻는 연습이었다. 아홉 칸으로 나뉜 화면은 단지 구획이 아니라, 관찰과 인식의 질서를 훈련하는 장치였고, 모과의 음영 하나하나는 나와 세계 사이에 맺어진 감각의 관계를 섬세히 되짚는 지도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구획을 마음 안에 그어가며 세상의 형태와 의미를 다시 더듬는 작업인지 모른다. 우리가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세우고 침묵을 배치할 때마다, 그것은 단순한 창작이 아닌, 세계와 존재를 다시 그려보려는 모사적 행위다. 창조란 무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들—형태와 시간, 고통과 사랑, 타인의 문장과 나의 기억—그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고, 다시 말하고, 다시 살아내는 과정일 것이다.


모사는 그런 의미에서,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구현(embodiment)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복제가 아닌 감각의 되살림이며, 형식의 이식이 아닌 생명의 이입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떤 윤리가 깃든다. 타인의 형식에 잠시 몸을 싣되, 그 안에서 나의 호흡을 발견하고, 결국 나만의 리듬을 되찾아 나오는 일. 그것은 닮아가되 흡수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되 사랑하는 방식의 글쓰기, 나아가 존재 방식이다.


최근 '국제도서전'에 인파가 몰려 사전 예약이 마감되었다고 한다. 책에 대한 사랑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 무엇이 문제겠냐마는 출판 시장은 최악의 국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실정과 비추어 보자면 비현실적인 상황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진정 책을 사랑해서 모여들었을까. 아니면 모여듦의 관성에 휩쓸렸을까.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좋아하는 척의 사이는 매우 멀고도 깊다.


Text hip은 일종의 스노비즘일 수도. Sora


Text hip, Writing hip이라는 유행적 풍조가 필사의 시대를 열고 있다. 필사는 예전 선조들의 서예로 대표되는 중요한 수련 방법이자,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암기를 위해 연습장에 빼곡히 적어 넣는 훈련이었다. 심신의 신앙 행위로의 성경, 불경 필사도 오래되었고, 최근에는 문학 작품을 필사하거나 아얘 필사를 위한 도서가 출판되기도 한다.


도서 전이라는 이벤트의 열풍과 필사의 유행은 어쩌면 맞닿아 있는 시대의 현상이 아닐까 싶다. 필사는 심신의 수양이 되지만 창작의 근본이 되기는 어렵다. 필사보다 모사의 연습이 필요한 때다. 모사는 해석하여 해체한 후 재구성하는 지난하고 덧없는 노동이다. 어릴적 분해해 이리 저리 붙여 대는 고장난 라디오를 마주하는 것 처럼.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이 그저 내 기억과 해석의 문장을 만들 근육을 만드는 내밀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닮기 위해 그리는 것’과 ‘그리기 위해 닮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 질문의 틈에서, 비로소 예술은 시작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 틈을 오래 바라보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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