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작가 귄터 그라스의 고백에 붙인 생각
누군가의 과거가 들춰질 때,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일생이 아니라 한 세계의 내부를 해부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대중은 그 세계의 복잡성을 감당하지 못한 채 한 겹의 껍질에 묻은 얼룩에 열중한다. 지금 그의 손이 쓴 문장과 마음이 만든 관계, 수십 년간 쌓아온 존재의 궤적은 어느새 지워지고, 과거의 한 장면이 증거물처럼 소환된다. 언젠가의 말실수, 어설픈 입장, 무지했던 시절의 침묵. 그리고 그 자리에 판결처럼 내려지는 ‘진짜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선언. 우리는 언제부터 사람을 이렇게 해석하게 되었을까. 단일한 프레임 속에서, 단일한 과거를 들어, 복잡한 현재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최근 들어 과거를 검증의 도구로 삼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이른바 ‘과거 캐기’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넘어, 학자와 작가, 활동가에게까지 뻗어 있다. 선의와 성과, 태도와 맥락은 사라지고, 단 한 줄의 과거 발언이나 이력만으로 삶 전체가 조각난다. “그는 과거에 이런 사람이었으니, 지금의 말도 믿을 수 없다.” “그녀는 한때 이렇게 행동했으니, 지금의 입장은 위선이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을 다루는 방식은 ‘기록’이 아니라 ‘증거’로서의 기억이며, 그 증거는 타인을 응시하는 칼날로 사용된다.
과거의 축적이 현재의 시간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거의 총합이 현재의 진실을 담보한다는 것은 거짓에 가깝다. 어떤이의 과거가 현재의 그를 단정할 전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검증이라는 두 음절 아래 그 누군가의 과거를 펼쳐 들고 돋보기 대어 살펴 보곤 한다. 누구나 한 줄 정도 남겨 있을 얼룩진 구석을 발견하고 바로 지금의 그에게 대어 보고 맘대로 부적격을 판정한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엄격한 잣대는 정작 자신에게는 들쑥 날쑥한 편의의 해석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대작가의 고백, 너무 늦은 고백이란 없다
<양철북>으로 잘 알려진 귄터 그라스도 노벨 문학상을 받고도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귄터 그라스는 달랐다. 그는 스스로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것도 무려 60여 년의 침묵 끝에.
2006년, 그는 자서전적 회고록 <양파 껍질 벗기기(Beim Häuten der Zwiebel)>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꺼내놓는다. “나는 열일곱 살의 나이에 SS 무장대(Waffen-SS)에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전후 독일의 ‘도덕적 지식인’으로 여겨지던 그가, 나치 친위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독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아니, 충격을 넘어 배신감이 일었다. 왜 이제야 말하는가? 왜 수십 년간 침묵했는가? 그리고 이 침묵은 그가 쌓아올린 모든 문학적 작업의 진실성을 흔드는 것은 아닌가.
그에 대한 논쟁이 격렬히 오갔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침묵을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그 침묵이 문학의 기저에 흐르고 있었음을 느꼈다. 그라스는 <양파 껍질 벗기기>에서 기억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억이 조급하게 밀려들 때, 그것은 마치 껍질이 벗겨지길 원하는 양파와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하나 글자를 읽듯이, 드러난 것들을 읽을 수 있게 된다.”
(Wenn die Erinnerung bedrängt wird, gleicht sie einer Zwiebel, die geschält sein will, damit man, Buchstabe für Buchstabe, lesen kann, was da bloßgelegt ist.)
기억은 한 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회전하고, 중첩되고, 때로 왜곡된다. 그래서 그라스는 “기억의 글자는 종종 거울글씨처럼 쓰여 있다”고 덧붙인다. 우리는 그것을 읽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고, 시선을 바꿔야 한다. 껍질을 벗겨낸다고 바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백 역시도 해석되어야 할 언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기억을 해석하는 일이고 작가란 기억의 해석사라 할 수 있다.
나는 <양철북>을 떠올린다. 진실을 외면하는 사회, 침묵하는 개인, 자라기를 거부한 오스카. 그 모든 비유 속에는, 어쩌면 그라스 자신의 고백이 이미 쓰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지 못한 죄책감과 들통날까 두려웠던 심연이, 회화적이고 은유적인 언어로 탈바꿈되어 문학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언어를 통해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문학은 늘 은유를 통해 고백하며, 고백은 늘 시간 속에서 천천히 밀려나온다.
우리는 문학을 진실의 반영으로만 읽을 수 없다. 문학은 진실과 허구,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내면의 실험실이다. 그 실험실에서 작가는 한 번도 완전하지 않았던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성자의 삶을 살아온 사람보다, 죄인의 삶을 살아내며 회심의 언어를 발견한 이들이야말로 문학의 진짜 해석자들이다. 무결한 생애가 아니라, 얼룩진 기억과 비틀린 문장 사이에서 건져낸 의미들이 독자를 흔든다.
이제 나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백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그것을 도덕의 잣대로 곧장 심판대에 세울 것인가, 아니면 그 고백이 도달한 내면의 시간들을 읽으려 애써야 할 것인가. 그라스는 단지 과거를 고백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 기억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구성했는지를, 그것이 문학의 심층부에서 어떤 문장을 낳았는지를 보여준다. 양파의 겹처럼, 그의 문장은 겹겹이 쌓인 회한과 사유, 침묵과 고통을 품고 있다.
문학은 기억을 해석하는 일
문학은 고백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고백이 없는 곳에서조차 고백을 품는다. 진실은 고백의 시점이 아니라, 고백이 남긴 언어의 흔들림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좋은 문학은 그 흔들림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야 귄터 그라스의 문학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고백이 문학의 신뢰를 훼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더 깊은 질문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숨기려 한 작가가 아니라, 죄를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넘겨준 작가였다. 그 죄의 무게는 고백의 시간이 아니라, 고백 이후의 독서 속에서 진짜 무게를 드러낸다.
양파를 벗기면 눈물이 난다. 기억은 벗겨지는 것을 원하고, 문학은 그 눈물 속에서 잉크를 묻힌다. 우리가 껍질을 벗겨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끝내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자 했던 중심을, 그 회색의 언저리를 더듬기 위해서다. 껍질을 벗겨낸 자리에 남는 것은 언제나 단순한 진실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복합성이다.
그 양파는 지금, 우리 손 안에 있다. 당신은 그 껍질을 어떻게 벗길 것인가. 눈물을 삼키며 그 안의 글씨를 읽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귄터 그라스의 양파 껍질 이야기는 지난 어느 날 홀로 찾은 제주에서 마주했다. 엄청나게 퍼붓던 비를 피해 제주 현대미술관에 들어가 우연히 만난 '귄터 그라스 전'. 또 다시 길을 헤매고 잠시 쉴 곳을 찾아 다니다 그 문장을 보았다. 껍질을 벗기고 회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벗겨낸 회상에서 마주한 '진실'은 버겁지만 애틋한 것이었다. 이렇게 살다보면 나중에 뒤돌아 본 삶들이 모두 '휴일'같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어거지로 생각했다. 요사이 몰려 오는 다사다난한 일들에도 좀처럼 휘청대지 않는 것도 언젠가 마주할 '진실'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어 보았다.
회상은 누군가 벗겨주길 원하는 양파와 같고, 껍질을 벗겨내면 진실과 마주한다.